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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0내한선교사 과제 / B92 / Randle, Pauline Glass(? - 1925, MS) / 3학년 5반 / 2017210331 / 최현진

닉네임
최현진
등록일
2019-11-28 10:42:03
조회수
71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5_B92_최현진.hwp (485888 Byte)
한국교회사 내한선교사 연구 Randle, Pauline Glass
2017210331 3학년 5반 최현진

Randle, Pauline Glass (한국명: 禹蘭乭)

1. 생몰연도: ? ~ 1925.5.19. 미국 루이지애나 출생
2. 학력 : 맨스필드대학, 스칼렛대학 졸업
에모리대학 문과 수료
3. 경력 : 1918. 8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한국어 공부
5년 동안 개성과 춘천에서 여성 사업을 통한 선교활동
안식년으로 귀국해 에모리대학 문과 수료
1925.2 재내한하여 철원에서 선교활동
1925.5.19. 금성맹장염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천


1. 생애와 가족관계

파울린 랜들은 1890년 6월 8일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남감리회 소속의 랜들(Robert Randle)목사였다. 그녀는 맨스필드대학과 스카렛대학을 마치고 선교사업에 뜻을 두어 그에 따른 수련과정을 마쳤다. 특히 음악과 예술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를 이어 남감리회 소속이 되었고, 1918년 8월 남감리회 소속 한국 여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는 한국어에 익숙해졌으며, 한문까지도 해독하게 되었고 개성과 춘천에서 주로 사역하였다.

2. 남감리회 춘천 지역
남감리회는 1901년 강원도에 지경터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다. 하디가 이 지경터교회를 3년 간이나 왕래하며 수고하였지만, 별다른 선교적 결과를 얻지 못해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3년 자신의 교만과 부족을 깨닫고 회개 기도하며 ‘원산부흥운동’을 촉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지경터교회가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03년 원산부흥운동을 계기로 상황이 변하여 지경터교회를 비롯한 강원지역 교회가 발전하게 되었다.
강원도지역의 본격적인선교는 1904년 춘천이 서울에서 독립 구역으로 확정되면서부터 이루어졌고, 춘천 구역을 맡게 된 무스 선교사는 서울에서 춘천을 왕래하며 춘천의 선교 사역에 힘썼다. 그리하여 1908년 무스 선교사 부부의 지도하에 춘천지역 남감리교 선교 센터가 설립되었다

무스 선교사가 춘천지역 선교를 하며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춘천구역은 강원도지역의 중심이며 훌륭한 지방회가 형성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지역 보고가 서울 구역 보고 속에 포함되어 보고되었습니다. 이번이 독립된 구역으로 내는 첫 번째 보고입니다. 이곳에 우리 선교부가 개설된 후 대부분 지역에서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다만 결과는 다른 곳에 비해 그다지 훌륭하지는 못합니다. 세례교인들이 있는 교회가 8곳 있고 그 외에도 아직 세례 받지 않은 학습인이나 원입인들이 있는 교회도 몇 곳 있습니다. 이들 중 어떤 교회에는 50여 명이 넘는 교인들이 있어 가까운 장래에 강력한 교회로 발전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곳처럼 흥미 있고 기대감 넘치는 구역은 보지 못했습니다. 토양을 잘 갈기만 하면 머잖아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무스 부부가 춘천 선교를 개척하였고, 무스 부부의 뒤를 이어 힛치 부부가 와서 춘천 선교를 주관하게 되었고, 여선교사로는 에드워즈(L. Edwards) · 노이스(A. D. Noyce) · 잭슨(C. U. Jackson) · 핸슨(A. J. Hanson) · 스미드(O. smith) · 올리버(B. Oliver) 등이 계속해서 여성 선교와 매일학교 사업을 주관하였다. 남감리회는 강원도에서 춘천과 철원을 선교기지로 삼아 다양한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3. 파울린 랜들(Randle, Pauline Glass)의 사역
앞에서 남감리회가 춘천지역 선교 사업에 힘을 썼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파울린 랜들의 사역지가 춘천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남감리회 여선교사들은 춘천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18년 8월에 한국에 들어온 랜들은 춘천에서 사역하였다. 그녀는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이내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남감리회 연선교사 소속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랜들은 춘천의 여자들을 위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성을 위한 춘천의 학교는 8m²의 작은 방에서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정부에서 인정하는 시설이 잘 갖추어진 5개의 학교를 포함하여 학군 내 주간 학교 시스템을 갖추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교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들이 배출되었다.
5년 동안 춘천지역에서 여성 사업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던 랜들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미국으로 귀국하여 에모리대학 문과를 수료하였다. 2년의 안식을 가진 후, 1925년 2월 다시 내한하여 선교 사업에 힘을 썼다. 2차 내한에는 춘천이 아닌, 철원지역으로 넘어가 선교하였다. 철원지역에서 선교하던 중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었고 1925년 5월 19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21일에 태화여자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작성일:2019-11-28 10:42:03 121.169.58.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