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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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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조사 과제 Morris, Charles David(1869-1927, M) / Morris, O. Louis(미상,M / 2017210309 / 3-5 / 이사무엘

닉네임
3-5 이사무엘
등록일
2019-11-29 10:34:01
조회수
727
첨부파일
 한국교회사 내한선교사 조사 (이사무에 (273207 Byte)
내한선교사 조사
Morris, Charles David(1869-1927, M) / Morris, O. Louis(미상, M)

1. 생몰연도 : 1869. 5. 10 – 1927 아일랜드 출생
2. 학력 : 1900 드루 신학교 졸업
3. 경력 :
1901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항, 북한 전체가 선교구역
1903 루이스와 결혼
평양에 거주하며 영변까지 순회전도
영변에서 시약소 건립, 교회 설립, 신자 양성
1912-16 평양에서 영변, 해주, 평양 지방선교 주관
1926. 11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전도여행길에 건강 악화
1927. 1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
4. 가족사항 : Morris, O. Louis (부인)과 2녀
6. 참고문헌 : 기백 6권; 개신교사; 감신대사; 기감중부연회록, 1927; 이화 80년사; 감리여성; 영변지; 신학세계 2.1(48p), 11.1(1925); MKACC; 미감리회 조선연회록, 1927; 윤춘병, “Achienements of Rev. Charles David Morris(1869-1927) in Korea”; 감리교화 역사, vol.2, No.2, 1985; 기독신보 영인본 8권, p.445;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그는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명은 모리시이다. 그의 조상은 프랑스인이었는데, 1685년 루이 14세가 위그노파에 대한 박해를 인정했기 때문에 많은 귀족층 위그노들이 여러 지역으로 이주해 갔고 모리스는 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나의 19세 되던 해인 1888년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1900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하는 한편 미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1년 한국에 파송된 그는 북한 전체를 선교구역으로 배정받았으며, 평양에서 거주하면서 영변까지 순회전도를 하였다.
1905년 그는 반한옥 모양의 집을 영변에 건립하여 이사했고, 1912년까지 이곡에 거주하는 동안 의료선교사를 받아들여 시약소를 개소했으며, 이 지방 10국역 내에 49개소 예배당 설립, 장로, 목사 8명, 신자 3,193명을 길러냈다. 다시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4년(1912-16)동안 그는 영변, 해주, 평양 지방선교를 주관했다. 1916년 그는 원주에 새로 개설된 선교부로 전임되었고, 그곳에서 계속 선교사업에 헌신하여 1925년 12월 7일 영변군 서부동에 소재한 감리교 예배당에서 그의 선교 2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26년 11월 모리스는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전도여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1927년 1월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한국에 내한한지 3년째 되던 해 (1903) 모리스는 루이스(O. Louis)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으며 차녀(Muriel)와 부인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26년 동안의 한국 선교 사업을 통해서 그의 필생의 신념인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온전히 실현하고자 했던 모리스를 가리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모리스는 더없이 훌륭한 선교사였다.”
모리스 선교사는 1901년에 모인 제 17회 선교회에서 진남포와 영변지역 전도사업으로 파송되었다. 주택은 노블 감리사가 거주하는 평양에 임시 있기로 했다 해도 주력은 영변에 두기로 한 후 그 해에 1차 영변지역을 순회했다. 그 다음해부터 그는 영변지역만 담당키로 했다. 영변지역은 평남도의 5개 군(안주, 개천, 덕천, 순천, 맹산), 평북도 6개 군(영변, 박천, 태천, 운산, 북진, 회천) 등 모두 11개 군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무척 넓은 지역인데다 묘향산을 주봉으로 강선산, 가마산, 용문산 등이 있어서 전도에 애로가 많은 산악지역이었다. 그러나 인심이 후하고 감리교 단일 전도지라는 점에서 전도하기에는 단순한 지역이기도 했다.
모리스 선교사가 처음 영변지역을 순회할 때에는 이미 여러 권서와 전도부인들이 지나간 뒤여서 1901년에는 운산, 박천, 안주에 교회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복음은 소리 없이 민중 속으로 스며들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고 박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 양인 추방해야 한다”고 민중이 몰려와 폭력을 쓰려고 했으며, 생명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동행했던 친구가 권총을 꺼내들고 발사하자고 했을 때 모리스 목사는 친구의 손을 잡은 후 “우리가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지라도 무기를 쓰는 것은 결코 부당하다”고 만류했던 체험도 있다.
모리스 선교사는 첫 순회전도에서 14처에 예배처를 조직해 놓았고 그 해 연말에는 24처로 늘어났다.
오래 전부터 영변구역 전도에 관계가 있던 벙커 목사도 같은 해 여름 한국인 전도인과 권서 등을 대동하고 운산 북진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 결과 그 들은 씨를 뿌리지 않고도 성시한 광부들을 모아 아주 튼튼한 교회를 두 곳씩이나 설립했다.
1902년경에도 네 구역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곧이어 다섯 곳에서도 시작했다. 그 후 영변과 맹산에도 예배처가 형성되었다.
영변 시내에 가옥 1동을 구입한 모리스 선교사는 시내에 몇몇 믿는 자들을 모아 교회를 창립했다. 창립 당시 한인 주역은 선신제, 김창희, 오영룡, 선원제, 김홍제, 유병식, 정학수, 김신온, 이메리, 김사은, 이승연 등이었다.
모리스는 1904년도까지도 평양에 거주하며 그 해 2월에 열린 제1회 선교연회에서 평안도 감리사 겸 영변구역과 평양구역을 담당했다. 영변구역에서는 그 해 맹산 구역을 새로 조직하고 베커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나 실제 목회는 그의 전도인이 담당했다.
모리스 목사는 영변에 선교부를 설치코자 하여 같은 해 부지를 구입했다. 앞으로 의료교육기관 설치와 여선교사 주재에 필요한 부지까지 예상하고 자리를 넓게 잡았다. 1905년에 주택을 건축하고 영변읍으로 들어갔다. 1905년에는 한국 북 지방에서 평양지방과 영변지방으로 분할하고 감리사의 책임을 계속 맡아 영변지방 개척과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동안 영변읍 교회는 부진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모리스 선교사가 영변에 정착한 이래 읍내에서도 전도활동이 활발해졌다. 입교인 4명, 세례인 9명, 학습인 19명, 원입인 58명 도합 90명으로 교회의 틀이 잡혀져 갔다.
1906년에는 남녀 숭덕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시작했고, 1909년 교사를 신축한 후 숭덕소학교의 연장교육기관으로 숭덕중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같은 해 영변에 진료소도 개소했다. 의사는 폴웰이 평양 홀기념병원과 영변을 오가며 겸무했으나, 1909년부터 노튼 의사가 부임하여 진료소를 확충한 후 제중원이라 했다.
1916년 모리스 선교사는 16년 동안 피땀 흘려 개척해 놓은 영변지방을 떠나 강원도 원주지방으로 전임되어 갔다. 미감리교회 지방 중에 가장 열세에 놓여 있는 지방은 원주 지방이었고 그 지방의 조속한 벌전을 위해 연회에서 모리스 목사를 특별히 파송한 것이다. 영변지방 교우와 모리스 자신도 영변을 떠난다는 것이 좀 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의 파송을 하나님의 파송으로 믿는 모리스는 새로운 희망과 계획을 품고 기쁜 마음으로 원주를 향해 영변을 떠났다.
1925년 12월 7일 영변지방회에서는 모리스 선교사의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영변읍 서부동 모리스 기념 교회당에서 모인 25주년 기념 축하 예배에는 평양 무어를 비롯하여 영변 유지 신도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때 영변사회에 끼친 모리스 선교사의 공적을 치하했는데 그 중요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신학세계>의 기록이다.

1926년 11월 모리스 선교사는 강원도 원주지방의 전도사역 중 건강이 악화되었고, 치료를 받았으나 건강이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27년 1월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26년의 한국 선교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사역들을 해 나갔음을 그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작성일:2019-11-29 10:34:01 121.168.15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