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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B152/White, M.C.(미상, MS) 3학년6반/2017210399/한석원

닉네임
한석원
등록일
2019-11-29 12:19:47
조회수
76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6반_B152_한석원.pdf (309737 Byte)
M.C 화이트 (Mary Culler White) 선교사 1875-1973

I. 기본사항

1. 이름: Mary Culler White / M.C. 화이트 선교사 MS
2. 생몰연도: 1875.5.12. 미국 조지아주 Perry에서 출생 1973.05.18. 98세로 미국에서 소천
3. 학력: 1893 웨슬리안대학 졸업. 1901 스캐릿신학교 졸업.
4.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5. 경력: 남감리교 중국선교사로 파송, 중국 교회 및 성도의 영적 부흥운동에 기여 1903년 한국에 초청되어 함남 원산에서 일주일간 감리교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기도와 성경공부 인도. 하디(R.A Hardie) 선교사의 성령임재의 체험을 필두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확산되기 시작,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6. 한국선교기간: 1903년 08월 (약 한달간) - 선교사 2년차였던 화이트 선교사는 1903년 여름 자신의 선교지인 소주를 떠나 여름휴가로 서울에서 사역하던 하운셀 선교사와 함께 원산으로 가 남감리교 여 선교사들과 함께 보냈다.
7. 연표1875.5.12. 미국 조지아주 페리(Perry)에서 출생. 어머니, 엠마 캐롤라이나 컬러(Emma Carolina Culler)와 아버지, 조지 화이트(George H. White)사이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혹킨스빌(Hawkinsville,GA)에서 자라남.1899. 화이트는 자신이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하던 자신의 모교회 혹킨스빌 제일감리 교회(Hawkinsville First Methodist Church)의 후원을 받아 1899년에 스캐 릿성서 및 훈련학교(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한다.1901. 선교사 준비를 마친 화이트는 1901년에 남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nary Society, 이하 WFMS)의 파송을 받아 중국 소주(蘇 州, Suzhou-당시는 “Soochow“였음)로 배치되었다.1903.2. 화이트는 부임후 얼마되지 않아 기술학교 (Industrial school)를 맡고 있던 미스 윌리암스(Miss Susie Williams)선교사가 결혼하면서 지역을 옮기게 되 자 기술학교를 맡아 아이들에게 재봉, 자수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1942.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일본군이 소주지역을 점령하면서 화이트는 7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1943. 43년간의 중국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1951. 화이트를 파송한 혹킨스빌제일감리교회는 새 교회 건물을 봉헌하면서 소 예 배당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화이트는 그 강단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1973.05.18. 혹킨스빌제일감리교회에서 약 20여년간 더 일하다가 소천함.
8. 가족사항아버지: 조지 화이트 (George H. White) 어머니: 엠마 캐롤라이나 컬러 (Emma Carolina Culler)

II. 선교사 소개: M.C 화이트 (Mary Culler White) 선교사 1875-1973

1. 미남감리회 여선교사, 미국 출신, 일찍기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중국 교회 및 성도의 영적부흥운동에 큰 기여를 한바 있다.

그녀는 1903년 한국에 초청되어 함남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를 인도한바 있다. 이 집회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함께 기도하며 열심히 성경공부에 임한 유익한 집회가 되었다. 이 집회에서 캐나다 출신 의사로 남감리회선교회에 가담, 활동중이던 하디(R.A. Hardie) 선교사가 크게 감화를 입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거듭나는 성령임재의 체험을 했다. 이를 필두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곧 1907년의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화이트 선교사의 원산집회 인도가 곧 한국 기독교 초기 부흥운동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2.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실제적인 원동력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사 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은 두 명의 여자 선교사가 시작한 기도회가 도화선이 되었고 의료 선교사인 하디(Robert Hardie, 河鯉永 1865-1949)가 초청되었는데 그는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그것을 공개화한데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에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3. 화이트선교사와 1903년 원산에 대한 기록 비교

a. 박용규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대부흥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903년 8월 원산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의 모체는 무명의 여선교사들이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 하디(Robert A. Hardie)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이 부흥운동의 모체인 기도의 불씨를 놓은 사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남감리교 여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여선교사 매컬리(Louise H.McCully) 두 명의 여자 선교사였습니다. 화이트 선교사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문에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온 사람이었고 매컬리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로 원산에 거점을 삼고 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이 모여서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선교사들 가운데 영적인 각성 운동이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기도모임이 1934년 한국선교 50년주년을 맞았을 때 하디가 “1903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여 기도하는 중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그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스톡스가 증언하는 것처럼 “만약 하디의 리더쉽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요구하는 성령의 권능을 수납한 두 명의 헌신적인 여자 선교사들의 진지한 기도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대부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여인의 기도의 “십자군”은 하디에게 알려지지 않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하디가 얼마후 알게 되었습니다. 북장로교 선교사 해리 로즈(Harry Rhodes)역시 한국북장로교선교사에서 두 명의 여자 선교사들의 기도에서 한국부흥운동이 시
작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b. 박용규의 두 번째 책을 제외하고 화이트선교사를 언급하고 있는 한국교회사 주요 서적들은 화이트 선교사가 단순 내한한 것으로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단순 방문자 화이트가 내한한 시점이나 그 내한과 의화단 사건과의 관련성, 또 그가 한 일에 대한 기록에 보면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출판한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에 의하면,

1903년...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화이트(M.C.White) 여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가졌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 및 일부 한국 교인 그리고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인사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회 모임으로 발전하여 원산 창전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하디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중략) 이러한 회개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마침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내한한 선교사와의 기도 모임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은 초기부터 용이하지 않았지만 1900년 의화단(義話團)사건 이후 외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이 더욱 위축되었다. 따라서 여간한 인내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는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화이트 선교사로부터 들었을 때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선교활동에 대하여 회개 어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c. 그 외에도 다른 어떤 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바로 화이트 선교사가 중국 의화단 사건과 중국 선교사의 어려움에 대한 실상을 보고한 것과 이것을 들은 하디가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양대인(洋大人)자세에 대해 회개하였을 가능성을 연결한 점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박용규는 화이트가 중국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고 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화이트의 내한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기록들을 보자. 민경배는 그의 책에서,

그 해 1903년 겨울 한국을 잠시 다녀가던 스웨덴의 프란스 목사와, 중국 체재의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Miss M.C.White)여사와 함께 원산(元山)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연구를 위해서 한 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 후 이들은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교인들과 연합하여 창전교회서 한 주일간 매일 밤 집회하면서 보냈다. 이 때 카나인으로서 남감리교 선교사로 일하던 의사 하디(Dr.R.A.Hardie: 하리영(河鯉永)은...

민경배의 서술에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원산부흥운도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실제로 선교사들의 기도회는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그 해1903년 겨울”이 아니라 그 해 여름, 즉 8월 24일부터 30일에 열렸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위의 인용문과는 달리 프란스 목사와 화이트 선교사는 함께 기도회와 성서연구를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프란슨(Franson)은 중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연맹 소속 선교사로 그가 원산을 방문한 것은 1903년 10월이었다. 그는 한 주간 하디 선교사 집에 머무르면서 원산지역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흥집회를 인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디 선교사의 기록처럼 여름, 즉 8월에 방문한 화이트 선교사와 함께 기도회를 인도할 수는 없었다.

d. 한편 김영재의 <한국교회사>에서 화이트 선교사와 원산 기도회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3명의 감리교선교사들이 모여서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때마침 한국을 방문한 미스 화이트(Miss M.C.White)를 강사로 모시고 한 주간 성경공부를 하며 기도회를 사셨다. 그리고 얼마후 같은 선교사들이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함께 이번에도 중국에서 선교하는 스칸디나비아 선교사 프란손(Franson)을 강사로 한 주일간 저녁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원산의 한국인 신자들도 참석하였다. 여기 참석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한 주 전부터 프란손 목사를 자기 집에 모시고 있던 의료선교사 하디도 있었다.

위의 글에 의하면 화이트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내한하여 기도회를 가진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얼마 후 같은 선교사들이” 프란슨을 모시고 교파연합으로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 기도회에서 하디가 회개하였다고 전하는 점에서 앞서 한국교회사연구회의 기록과 크게 상이한 기록임을 보여준다.
4. 화이트선교사와 중국의 의화단 사건관계

의화단 사건과 관련하여 화이트선교사와 함께 원산부흥운동의 “모체”로 소개된 선교사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루리스 맥컬리(Louise H.McCully,)선교사가 있다. 그는 캐나다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한국으로 피신하여 머물게 되면서 한국여전도회 초대회장으로 성경공부와 계몽운동을 하고 1903년 말에는 함흥지역에서 주간 성경공부반을 개설하고 1908년에는 마르다월손 여자신학원을 설립하고 1934년에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컬리 선교사가 의화단 사건 직후에 한국으로 피신한 것이나 결국 선교지를 옮긴 것을 고려해 볼 때, 화이트 선교사가 역시 맥컬리와 함께 의화단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잘못 기록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화이트가 왜 굳이 의화단 사건이 정리된 1903년에야 그 사건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였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는지에 대해 더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a. 그렇다면 화이트 선교사는 왜? 한국에 방문한 것일까? 화이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첨가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한국에서 보낸 즐거웠던 휴가를 뺄 수가 없다. 한국에서 나는 미국에서 함께 일하던 또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오신 집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상승되고, 이 땅의 교회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기회를 보고, 수많은 산들과 빛나는 바다로부터 건강을 들이마시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화이트에 의하면 그는 1903년 여름 휴가로 한국에 갔으며 그것은 미국에서부터 친분을 쌓아온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친구들과 우정을 새롭게 하고 집회를 통해 영적으로 재충전되는 기회를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소주 지역 보고서의 내용은 화이트 선교사는 의화단 사건을 피해 한국으로 갈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화이트 선교사의 방문에 대하여 1903년 9월 24일 열렸던 남감리교 한국 선교부 7주년 회의록에 수록된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는 몇 가지 내용들을 더 구체화시켜 주고 있다. 하디 선교사는 비록 화이트 선교사를 이름으로 거명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온 방문 선교사의 제안”(the suggestion of a visiting member of our China Mission)에 의해 한주간의 성경공부가 열렸는데 그 기간 중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임하였고 자신의 선교사역의 실패가 바로 성령의 약속을 의지 못함에 근거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전한다. 져다인(J.L.Gerdie)선교사는 “하나님은 온전하게 그의 약속을 지키셨다. 내가 말하건대 우리는 지난 달 원산에서 말씀과 기도로 한 주간동안 하나님을 기다렸다. 이 지역 선교사들 외에 서울에서 하운셀(Miss Hounshell)선교사와 중국에서 온 화이트 선교사가 우리와 함께 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의 새로운 비전을 소망하였고 그것이 우리에게 확인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며, 힘이며, 기쁨이요...” 또한 아레나 캐롤(Arrena Carroll)원산 주재 선교사는 하운셀 선교사와 화이트선교사가 머무는 기간 중에서 8월 24일부터 30일 까지는 자신의 집에서 성경공부 시리즈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축복의 쏟아짐”이 있었고, 이 모임에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도 함께 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성령의 약속을 굳게 붙들 때 그들이 사역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같은 성령의 능력이 임할 것을 기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운셀 선교사의 보고에는 화이트 선교사와 함께 원산에 갔으며 3주간 그곳의 친구들과 동료 선교사들과 지냈다고 전한다. 그는 이어서 원산은 참으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소개하고 원산의 사역들이 잘 진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이어서 한 주간의 성경공부 집회를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집회에서 성령이 임했으며 자신은 지난 해 자신이 성령의 능력에 잡혀있지 못했음을 깨닫고 자신을 주님께 새롭게 드렸다고 전하였다.

b. 마지막으로 의화단 사건은 화이트 선교사의 내한과 관련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185년 북감리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자 중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교 미국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를 일본과 한국으로 확대 할 것에 대하여 고려하였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클래런스 라이드(Clarence F.Reid)와 윤치호였다. 라이드의 한국선교 결정은 그가 가졌던 초기 목적, 즉 ‘중국 북부에서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일할 곳을 찾는다’ 와는 사뭇 거리가 먼 결정이었지만, 선교의 전체적인 성과면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국의 선교지들이 라이드나 그 외 남감리교 선교 정책자들에게는 중국 남부지역에서 사역이 어려운 자들, 혹은 휴가가 필요한 선교사들에게 대안으로 제시된 곳이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휴가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남감리교 내 WFMS의 선교사들의 휴가 규정은 다음과 같다.

건강과 강건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선교사들은 매 해 적어도 한달간의 휴가를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사역을 조정하도록 한다. 휴가시에는 정규 사역을 완전히 중단하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선교지에서 완전히 떠나서 휴가를 보내야 한다.

위의 규정을 참고로 하면 화이트 선교사는 한 달간의 휴가에서 원선까지, 또 소주로 돌아오는 여행길에 넉넉히 한 주를 사용하고 서울과 원산에서 3주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화이트선교사의 책임자 역할을 했던 제니 애트킨슨(Jennie Atkinson)선교사가 의화단 사건 당시 일본으로 떠난 것을 볼 때 일본이나 한국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가는 것은 라이드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중국 주재 선교사들에게 비교적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마땅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의화단 사건은 화이트 선교사의 내한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제니 애트킨슨 선교사는 의화단들이 서희 황후의 계략에 말려 외국인들에게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던 1900년에 소주에 있었다. 애트킨슨 선교사는 7월초에 다른 선교사들과 중국인 교사 리씨와 그의 가족,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맡겨진 아이들과 함께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남감리교 선교부로 가게 되었다. 나가사끼에서 그들은 임시 중국인 학교를 열면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의화단 사건이 해결되어 애트킨슨 선교사와 그의 일행들은 상해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한 달 안에 미국 공사는 그들이 소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소주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에 있던 동안 소주에서는 거의 아무런 폭력도 없었고, 약탈이나 살해가 없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중단하고 갔던 사역들을 쉽게 재개할 수 있었다. 화이트 선교사는 1901년 애트킨스 선교사가 그의 40번째 생일(11월 8일)을 맞기 한 달 전에 소주에 도착했다. 그는 1901년 또 그 이후의 애트킨슨의 사역을 기록하면서 의화단 사건에 대해서는,

의화단 사건 이후로 중국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어린이들은 “외국인 악마”라고 소리치지 않고 더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피가 다시 교회의 씨가 된 것이다. 더 많은 소년들이 서소주학교(West Soochow School)로 몰려오고 작은 교회는 성도수와 활동이 늘어만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의화단 사건과 화이트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그가 원산에서 의화단 사건을 애기했다면 그것은 다른 지역의 경우를 선배 선교사들에게서 들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인용문과 같은 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한국교회사 연구의 일부가 화이트 선교사를 의화단 사건과 연결시킨 것은 맥컬리 선교사의 경우를 확대적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작성일:2019-11-29 12:19:47 175.193.7.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