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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51 / McCormick, Nettle Flower (Cyrus,NP)

닉네임
최모세
등록일
2019-12-04 16:37:34
조회수
736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51_최모세.hwp (516608 Byte)
맥코믹 / McCormick, Nettle Flower (Cyrus) (1835-1925)

Ⅰ. 기본사항

1. 이름 : McCormick, Nettle Flower (Cyrus) / 맥코믹 / 한국명: 맥고묵(麥古黙)
2. 생몰연도 : 1835년 – 1925년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없음
5. 경력: 1) 선교사 마펫을 통해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재정적인 지원2) 1908년 : 5천5백달러 기부로 평양신학교 교사 마련3) 1912년에 1만달러, 1922년에 3만5천달러 한국 신학교육의 터전 마련에 공헌4) 1913년 : 5천달러 기부로 숭실전문학교 교사 건축

II. 선교사 소개: 맥코믹 [McCormick, Nettle Flower (Cyrus), 1835-1925]

1.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사의 신축에 크게 공헌한 맥코믹
미국 시카고의 여류 자선사업가로 알려진 맥코믹은 한국에서는 맥고묵 부인으로 알려졌다. 그가 한국에 방문한 기록은 없지만 선교사 마펫을 통해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45,000명의 인구를 가진 평양은 잘 건축된 성으로 이루어진 도시였으나, 1910년 도시의 현대화와 확장 계획에 따라 성들이 무너져 내렸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서울이 아닌 평양에 위치한 것은 평양 지역의 교세의 신장과 깊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에 거점을 마련한 선교사들은 장차 평양 선교부가 들어설 만한 터전을 마련하기를 원했다. 1895년 1월 청일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마포삼열과 이길함은 평양에 내려와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135,802평(110에이커)에 달하는 좋은 위치의 땅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맥코믹 군단의 수장 격인 평양의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이렇게 넓은 터를 구입한 목적은 그가 갖고 이는 뚜렷한 비전 때문이었다. 장차 그는 동방의 예루살렘을 마음에 그리며 평양에 그와 같은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을 물색했고, 드디어 그런 적합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그것을 구입했던 것이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이곳에 장차 신학교와 성경학교는 물론 선교사 사택, 병원, 대학까지 설립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종합 콤플렉스를 마음에 구상했던 것이다. 이미 신학교가 자신의 집에서 시작될 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그의 머리 속에서 구상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되고 이 곳에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그의 비전은 1908년 현실로 찾아왔다.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마련된 5,000평 대지 위에1.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한 마포삼열은 1908년에 맥코믹 신학교가 위치한 시카고에서 가장영향력 있는 맥코믹 여사로부터 1만1천원에 해당하는 신학교 설립 기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08년 5월 15일 정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채필근 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1907년 장로회 신학교라는 공식 신학교 명칭을 얻은 후 그 이듬해인 1908년에 신학교 기공식이 거행됨으로써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명실공히 전국적인 장로회 신학교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건축비도 당시로는 대단한 규모였다. 신학교가 설립되기까지는 5,500불이 들었는데, 이와 같은 거금을 들여 1908년 신학교 건립 기초가 놓여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맥코믹 여사의 기부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맥코믹 여사의 지원은 계속되었다.


2. 숭실중학교 기숙사 2개동 건축 비용을 헌금한 맥코믹. 아마도 그녀만큼 한국 장로교 선교의 발전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참으로 헌신된 맥코믹 여사는 그 후에도 “기숙사 2개동 건축에 해당하는 비용도 북장로교 선교회를 헌금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 사람이 윌리엄 뉴톤 블레어이다. 1908년 전반에 속하는 블레어 자신의 저서 Gold in Korea의 ”미국에서의 기금 모음“이라는 장에서 어떻게 맥코믹 여사를 만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밝힌다.


나는 맥코믹 여사를 소개받으려고 시카고에서 일주일을 지냈다...(중략)...종이에 쓴 소개장이 없으면 그분을 방문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들었다. 도한 유능한 비서가 소개받지 않은 모금자들이 여사를 괴롭히는 것을 막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맥코믹 신학교의 옛 교수님들이 맥코믹 여사에게 소개장을 써주리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거절하였다...(중략)...내가 문을 두드리자 한 아가씨가 문으로 나왔다. 아가씨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나를 거실로 들어오라고 하고는 사라졌다...맥코믹 여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책상까지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믿을지 모르지만 책사엥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이 당신 사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진은 마펫 박사와 내가 평양신학교 건물 앞에서 찍은 것이었다...(중략)...그 다음날 거의 하루 종일 맥코믹 여사와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여사는 사역과 개개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내가 먼저 여사에게 돈을 부탁할 필요조차 없었다. 여사 자신이 “당신을 위해서 할 일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숭실중학교의 기숙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사는 필요한 돈을 기꺼이 주겠다고 대답했다.

한편의 아름다운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같기도하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시기 위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섭리하고 개입하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해외에 선교 헌금을 하는 것, 그것도 한 선교회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는 무수히 많은 선교단체들의 기부금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코믹 여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헌금으로 동방의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평양신학교 건물이 건축되었다. 또한 감사한 일은 “이 노부인 맥코믹 여사는 1922년에 다시 칠만여 원의 대금을 기부하여 새교사를 건축하는 데 큰 힘을 썼다.
맥코믹 여사가 기부한 당시 달러의 가치는 이러했다. 1900년대 1달러의 가치는 현재의 50만원의 가치였다. 1만달러라 하면 현재의 50억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이것으로 보았을 때 맥코믹 여사가 후원한 총 약5만 달러는 현재의 약 250억의 가치로서 한국장로회신학교 건립의 역사에 엄청난 공헌이 아닐수 없다.
맥코믹 여사의 지원으로 학교가 세워진 후 기숙사 건립은 네 개의 선교회가 지원하여 건축되었다. ”기숙사는 1911년에 기공하여 13년에 완성하였다. 기숙사 6동은 각각 선교회 재정 지원자의 이름을 따라 호주 장로교에 의한 것을 기숙사 빅토리아 기념관, 남장로교에 의한 것을 기숙사 알렉산더 기념관 그리고 북장로교에 의한 것을 기숙사 매코믹 기념관이라 불렀다.
작성일:2019-12-04 16:37:34 175.214.2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