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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Frick, Jenny Sophia(1886-1912, SA)

닉네임
김성광
등록일
2019-12-05 16:31:57
조회수
89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4반_B019_김성광.hwp (3210240 Byte)
내한선교사/B019/Frick Jenny Sophia(1886-1912)/3학년4반/2017210210/김성광


소피아 프릭 선교사 / Frick Jenny Sophia (1886-1912)
I. 기본사항

1. 이름: Frick Jenny Sophia / 프릭 사관
2. 생몰연도: 1886.8.16.-1912.4.29.
3. 출신 및 소속: 스웨덴, 구세군
4. 한국선교기간: 1911.12.24.-1912.4.29.
5. 연표
1886.8.16. 스웨덴 Trelleborg에서 출생
년도 미상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사관학교)에 입학
1911.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사관학교)에 졸업
1911.11.20. 구세군 사관 참위 직분을 받고 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
1911.12.24. 일요일 상오 2시경 한국(경성)에 도착,
1912.4.18. 급성뇌염
1912.4.29. 오전 4시 45분 당년 26세 순교, 양화진에 안장

II. 선교사 소개: 프릭(Frick J. Sophia, 1886-1912)

1. 역사적 상황

1) 고난과 격동의 시기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와 역사는 한마디로 고난과 격동의 시기였다. 서구 및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의 지배싸움의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1592년), 병자호란(1636년)의 두 난을 겪으면서 사실상 국가의 위기로 기울어져 있었고, 경제력은 바닥이 났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였다. 구세군이 처음 조선에 소개될 당시 1900년대 조선의 정치 상황은 민족의 시련기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민족저항운동이 널려 있었고,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무단정치를 실시한 시기다.
조선에 구세군이 시작할 때는 국외적으로 영.일 동맹으로 영국과 일본의 왕래가 순조로웠고, 일제강점기의 수난 속에서도 선교사들의 회개운동과 조선교회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시기다. 이러한 때에 허가두 정령이 1908년 10월 1일 조선에 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런 후 3년 후에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은 프릭, 코흘러, 우을선 등 3인으로 1911년 12월 24일에 한국에 왔다. 이 중 소피아 프릭 사관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1912)로 양화진에 묻혔으며 코흘러는 다음 해(1913) 안장된 독신 여성 선교사이다. 프릭 선교사는 뇌염으로 병을 앓았는데,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며, 오로지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며, 한국 땅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이라던 그녀의 숨결은 순교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2) 사관의 고달픈 생활
구세군 사관으로 1911-1932년간 사망한 32명 중 선교사관이 5인인 바 뇌막염, 홍역, 티브스, 극심한 빈혈증, 충격인데 영예스럽지 못한 일들이고 한국사관은 폐병9, 독감5, 충격3, 심장2, 탈장1, 빈혈1, 해산고1, 강경변1, 피 안 멈추는 병1로 기록되었다. 의약이 발달되지 못한 때이기도했지만 생활고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프릭 선교사가 선교하던 시절은 의료시설이 없고,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하던 시대이다. 그러한 상황과 역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한국에 들어왔으며, 그들의 노고와 수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구세신문 판매
상업광고가 없고 신학논쟁이나 남을 비방하지 않고 허황한 소설류를 실리지 않고 구원, 성결, 봉사로 구세전쟁 보돌르 목적으로 한다. 기관지이면서도 비중의 절반 이상을 불신자의 구원에다 둘 것이다. 구세군 역사에도 쓴 그대로 한국 초창기 장날이면 구세 신문과 쪽 복음을 팔려는 구세군 사람을 피해 다녔다 한다.
이, 빈대, 벼룩에 시달렸다. 자주 병이 들었다. 살링은 만주 안동형 가서, 빠 사령관 부인은 북경 가서 치료, 마침내 죽었다. 오늘은 성묘도 힘들게 되었다. 외인묘지가 그대로 있을는지, 혼 서기장관 고선 사관은 부인의 신병 때문에 한국을 떠났다. 자녀를 잃은 사관들도 많았고 프릭, 허일 부인, 옥거흠, 리도식, 토푸드, 위도슨 부인은 한국서 생명을 바쳤다.
그 시대에 이, 빈대, 벼룩들에 시달리며 병균을 옮겼고, 선교사들은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던거 같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아침부터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문과 쪽복음을 가지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세신문과 쪽복음이 쓰였던 시절인데, 구세군들은 구세신문에 상업적이나 소설같은 글들보다 복음을 위한 글들로 가득핬다. 구세군사관학교에 가서 직접 본 구세신문에서는 복음에 관한 글들로 가득차 있었다. 구세신문을 읽어보며, 복음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2. 프릭 사관에 대한 증언들
1) 크리스핀(한국명: 길수빈):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오전 일곱 시쯤이면 성경을 들고 집 뜰 주변을 거닐었다. 궁금하여 그에게 하루의 생활을 물었더니 그는 매일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이를 실천한다고 했다. 또한 이른 아침에 자주 높은 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국을 위하여 기도한다고도 했다. 한국인을 구원하여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하다고 했다. 한국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구세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므로 칭송이 그치지 아니한다.”

2) 김병도: “그는 4만 리 먼 곳에서 한국인이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음을 전해 듣고 성신의 인도하심으로 대장의 명을 받아 일가친척과 고국을 이별하고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기차로 횡단하면서 여러 나라를 지나 언어와 풍속이 다른 땅에 왔다. 그는 육신을 한국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한국어와 성경을 열심히 익히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죽음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찬송할 것이다.”

3) 스웨덴 구세군 뷔버 지방장관 뷔버: “내가 프릭 여사관을 특별히 한국에 소개하여 보내는 데 더욱 기쁨이 가득한 것은 프릭 사관은 본시 성령의 감화를 받은 여성이라서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로 어디를 가든지 주를 위하여 선한 사업을 크게 일으킬 사람이다.”

3.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
프릭 선교사는 한국 체류활동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였다. 그의 장례식 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였다. 모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그의 선교사역은 무엇보다도 선교적인 열정이고 순결한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바친 위대한 선교사다. 그의 선교사역은 복음적이고 실천적인 사도 바울 같은 구령사역을 몸소 실천한 귀한 선교사다. 그는 한국을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가식 없이 사랑한 선교 중의 선교사다.
소피아 프릭이 비록 한국에서 오래 선교사역은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젊은 독신 여성으로 젊음을 미지의 땅 한국에 바친 고귀한 선교사역은 우리 한국선교학도는 물론 한국인들에게 크게 귀감이 된다. 그의 순교의 피가 오늘의 한국구세군을 성장하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의 정열적인 선교사역을 우리는 깊이 되새겨 선교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많은 열매가 맺힌 귀한 사례일 것이다.

4. 복음 전도자로서의 프릭 선교사
4개월 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서울에서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주며 문서전도, 축호전도, 가로전도 등 구세군의 힘인 전도에 힘을 쏟았다. 이국땅에서 복음의 열매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되었는지 급성 뇌염에 걸려 1912년 4월 29일 한국에 온 구세군 선교사로서 최초로 순직하였다. 프릭 선교사는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오로지 전도를 위해서이다. 프릭 선교사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여러 방식들로 전도에 임했다. 그들의 힘은 바로 전도에서 나왔고,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구세군 냄비의 모습들로 사회적 참여만 기억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사회참여보다 먼저 복음이 먼저였고, 거기에서 힘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5. 프릭 선교사의 일대기
스웨덴구세군성경대학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때 프릭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가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단단히 하고 조선을 택하였다. 그리고 선교부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음성을 간증하였다. 그녀의 간증을 들은 선교부 실무자는 곧 스웨덴 사령관에게 보고하였고 그녀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녀는 1911년 사관으로 임관하고 조선을 향하여 스웨덴을 떠났다. 1911년 12월 24일 목적지인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겨울이었지만 스톡홀름에 비하면 이런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비록 얼굴과 피부 색깔이 다른 이방인일지라도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줄 때마다 이를 거절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부족이라고 생각하여 매일 아침 6시면 기상하여 기도와 성경을 읽는 일로 일과를 시작하였다. 7시가 되면 다시 평창동 뒷산으로 올라가 한시간 정도 조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니 그녀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프릭 사관은 갑작스레 급성 뇌염을 앓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이사들의 정성어린 진료와 동료들의 기도로 곧 회복될 줄 알았지만 결국 1912년 4월 29일 하나님은 그녀를 불러가셨다.
그녀의 장례식은 구세군 본영에서 사관들과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허가드 사령관의 집례로 거행되었다. 식순에 의해 조선구세군사관생도가 모사를 낭독할 때 장례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4만리 먼 곳에서 조선인이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음을 전해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대장의 명을 받아 일가친척과 고국을 이별하고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횡당하면서 여러 나라를 지나 언어와 풍속이 다른 조선 땅에 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육신을 조선 땅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조선어와 성경을 열심히 익히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통곡할 일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찬송할 것입니다.”

6. 푸릭 선교사에 대한 기사
1) 구세신문(1912.2.22.호): 어느 때 이든지 무슨 일에 대하여 점차 전진되어 나아가는 것을 사람이 말하기 좋아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고로 본보를 애독하는 여러분에게 대하여 금번에 서양에서 여성사관 4분이 더 나아온 것을 공포한다. 지난 1911년 12월 24일(일요일) 상오2시경에 정위 베이티 여사관과 참위 션러 여사관과 올슨 여사관과 또한 푸릭 여사관 여러분이 남대문 정거장에 도달하였는데 동시에 허가두 정령과 기타 각 사관 일동이 정거장에 전왕하여 환영하였다. 그 중 정위 베이티 여사관은 영국으로부터 나왔고 나머지 3사관은 스웨덴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같은 날(일요일)과 그 다음날(월요일)에 경성제1영에서 특별히 그 사관들을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는데 동시에 사관 여러분이 풍유를 갖추어 찬미와 기타 여러 가지 기이한 곡조로 그 회중을 다 기쁘게 하였다. 그 사관들은 장차 기허간 경성에 주재하여 조선말을 연구할 계획이다.
2) The Korea Mission Field(1912): “지난해 12월 4명의 스웨덴 여인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구세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런데 매우 슬프게도 그중 한 명, 제니 소피아 프릭 사관이 단 12일을 앓은 후 사망했다.”

9. 후기
양화진을 도착하여, 순교자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마음 한켠에 드는 생각은 죽음을 불사하고 복음을 전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도 저들과 같이 순교할 수 있을까라는 내 믿음도 같이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꽃다운 나이를 한국의 복음을 위해 바친 프릭을 기리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프릭에 대한 기록을 더 알아보기 위해 한국에 있는 구세군대학원대학교의 도서관을 방문했다. 구세군에 관련된 도서들로 가득했다. 프릭 선교사들의 자료를 찾아보며, 그녀의 한국에서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많은 자료들로 적잖이 놀랬다. 4개월정도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삶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스웨덴에서 혈혈단신으로 몸으로 이 땅을 밞은 프릭 선교사, 오로지 복음 전도에 대한 일념 하나로 먼 이국땅까지 왔다. 도서관을 떠나며 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을 지펴야겠다. 박용규 교수님의 우리나라의 한국역사 수업들과 프릭 선교사의 일생이 서로 교차하며,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그려본다.
작성일:2019-12-05 16:31:57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