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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Lindquist, Ellen(1890-1959, SA)

닉네임
기드온
등록일
2019-12-05 20:36:08
조회수
94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40_이기드온.hwp (5952000 Byte)
내한선교사/B040/EllenLindquist/3학년4반/2017210241/이기드온


린드퀴스트 선교사 / Lindquist, Ellen(1890-1959)

I. 기본사항

1. 이름: Lindquist, Ellen 린드퀴스트 / 한국명 : 인귀지(印貴地) / 스웨덴 / SA)
2. 생몰연도 : 1890-1959
3, 출신 및 소속 : 스웨덴, 구세군
4. 한국선교기간 : 1914.3.7.~1940.12.9.
5. 연표
1890. 스웨덴 출생
1914.3.7.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 본영, 지방영에서 근무
1914.5.15. 충남 공주 지방영으로 파견
1922.10. 안식년 후 귀국
1924. 본영 총무부에서 근무
1927. 유성부관으로 임명
1928. 안식년 후 귀국
1930. 7.15. 참모정위로 승진. 사관학교에서 여학생 담당사관으로 사역
1931. 충북 영동군영 정위(영동지방관)로 파송
1933. 사관학교 여학생담당사관으로 발령
1934. 참령으로 승진
1936.7. 안식년 후 귀국
1937.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신구약성서, 구세군관리, 영어 등 교수
1937.12. 서울여자관장으로 취임
1939. 가정단 서기관으로 임명
1940.12.9.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출국, 북경으로 전임
이후 만주 구세군에서 봉사하다가 침례교회로 이적하여 선교활동

6. 가족사항 : 독신



II. 선교사 소개 : 린드퀴스트(Lindquist, Ellen,1890-1959)

1. 스웨덴 구세군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한국에 온 선교사. 전방위적사역, 총체적 복음의 모본

1900~1910년은 이후 110여 년 간 한국 교회가 한국 민족에게 준 가장 놀라운 선물이자 한국 교회의 영적 원동력이 되었던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이 부흥운동이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일환이었고 당시 스웨덴과 조선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스웨덴에 어떻게 역사하셨기에 독신 여성 선교사 린드퀴스트가 머나먼 이국 조선 땅에서 27년여 간 사역을 감당했는지 더듬지 않을 수 없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는 원래 기독교 선교회를 해외로 파급시키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울의 사역이 그러했듯, 그의 구령사역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가는 곳마다 열매를 맺게 된다. 그의 아들이자 훗날 구세군 2대 대장이 된 브람웰 부스(Bramwell Booth)는 1876년 과로로 인해 스웨덴 Värnamo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집회를 여는 중에 어크토로니(Hanna Ouchterlony)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구세군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이 운동을 스웨덴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1878년부터 구세군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1881년 런던으로 가서 윌리엄부스의 집에 머무르며 교육을 받은 후, 1882년 구세군 장교가 되어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발족한 스웨덴 구세군은 구세군 역사상 가장 총체적이며 토착화된 구세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스웨덴 구세군은 국내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4년 뒤인 1886년에는 1,400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이후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한 구세군 선교사는 다섯 차례에 걸쳐 모두 12명이었다. 최초의 스웨덴 선교사는 코흘러(Kohler, Magda), 프릭(Frick, Sofia), 우을선(Olsson, Verna)으로 이들은 1911년 12월 24일 여성 독신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제2진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1914년 여섯 명이었는데(어륵손(Ericksson), 하변천(Havenstein), 인귀지(Lindquist), 위설영(Westhling), 옥거흠(Akerholm)부부), 바로 이때 인귀지 선교사가 25살 되던 해인 1914년 3월 7일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하여 본영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1914년은 유럽의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해로, 인귀지 선교사가 전란을 피해 조선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쟁은 1914년 7월 28일 발발했고 인귀지 선교사는 이보다 4개월 이상 빠른 3월 7일 내한했기에 3월보다 일찍 스웨덴을 떠났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스웨덴은 스페인 등과 같은 중립국이었기에 1차 대전의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또한 1914년이면 브람웰 부드가 구세군 대장이 된지 2년째 된 해로, 각 교회들이 전쟁 때문에 나누어진 나라의 국민들을 돌봐주는 것을 최대 사명으로 하던 시기였다. 전운의 어둠 속에서도 저들에게 앞을 볼 수 있을만한 영원한 별빛을 비추기 위해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곳으로 더욱 들어갔던 것이 바로 구세군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인귀지 선교사는 유럽의 전쟁을 피해 조선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 혼란에 빠진 조선에 빛을 비추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구세군의 특성상 인귀지 선교사가 조선을 향하기 전 1차 대전이 먼저 발발했더라면, 그녀는 오히려 유럽의 피난민들을 돌보기 위해 조선에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1861년 미국의 남북 전쟁이 있기 전인 1857~1859년에 미국을 정오기도 부흥운동으로 준비시키셨다. 우리나라 역시 1910년 한일병탄에 앞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무장시키신 것을 한국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08년 창립된 한국 구세군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한 조각이었다. 로버트 허가드 정령 동부인이 1908년 8월에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0개 마을에 구세군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1910년 한일병탄 때는 국내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은 2,500명의 병사로 늘어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 1914년 인귀지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온 것 또한 하나님 섭리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한국 구세군 연혁 도감에 따르면 그녀의 첫 임명과, 이어진 임무는 사관학교 교관이라고만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녀의 사역은 학교 내에서만 머물지 않았고, 조선인의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흩어진 사료를 모으며 발견할 수 있었다.

2. 초기 사역 준비(1914~1924) - 한국어 공부

그녀가 한국에 들어온 1914년부터 1924년 본영 총무부에서 근무할 때까지의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장형일의 조사에 따르면 1919-1924년의 구세군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상실되었다고 한다. 인귀지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여가 지난 1914년 5월 15일, 그녀에게 충남 공주 유구 지방영으로 가서 조선어를 배우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그녀가 한국에 오자마자 언어를 공부한 것은 이후 그녀의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세군의 사역의 특징은 현장중심이다, 이들은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과는 달리 바로 통역인을 두어 길거리 전도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통역관을 내세워 선교에 임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지인 사관의 배출이 시급히 요청되었기에 구세군은 사관학교의 설립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구세군 사관학교가 장로회신학교와 비교했을 때 곤란을 겪었던 문제가 바로 ‘언어’였다. 장로회신학교의 경우 초기 교수진들이 선교사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수업은 직접 한국어로 실시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에 들어온 이후 한국어 공부에 열중했던 경우를 볼 때, 간단한 수업정도는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구세군사관학교(구 성경대학교)의 경우 통역관을 세워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피했는데, 통역관으로 고용되었던 사람이 후에 고백하기를 “자기는 영어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개종자가 되어 사관학교에서 실제로 통역을 했고, 구셰신문의 주요 기사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고백을 토대로, 초기 통역관들을 통한 통역의 정확성에 의문이 들 뿐더러 통역의 미숙함으로 수업내용뿐 아니라 의사소통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음이 상당하다. 결국 사관학교가 세워진지 불과 2년 만에 한국인을 교수로 채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해결해줄 뿐, 수업의 질을 높이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귀지 선교사는 1934년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신구약성서, 구세군관리, 영어 등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관학교에서 이렇게 다양한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오랜 시간 준비되었던 한국어 능력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선교사의 토착화 문제는 이후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구세군 분규사건을 일으킨 한국인 사관들의 진정서 내용 중 6번째로 “서양인 사관으로 조선인의 고유한 도덕, 풍속, 습관과 조선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조선인 사관으로 지방관을 임명할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여전히 토착화에 실패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관들 간의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귀지선교사는 1926년 황태자 쿠스타푸공이 내한 했을 때, 조선호텔에서 서전사관을 예방 환담했었고, 같은 해 8월, 이규연 부관 동부인의 환영식에서 독일계 스위스인과 프랑스출신 사관의 언어를 모두 한국말로 통역을 해서 회중들을 잘 이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만국심령 특무 데비스의 통역을 이건영 부령이 했을 때, 풍랑(storm)을 돌(stone)로 통역하자 곧바로 잡아주었다는 기록 등 그녀의 조선어 실력에 대한 언급을 다양한 자료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진정으로 조선인의 삶에 녹아들고자 했던 그녀의 관심과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3. 시련 가운데서도 현장을 지키며 총체적 사역을 감당함(1924~1940)

1) 사회절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인귀지 선교사는 1924년부터 본영 총무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구세군은 구세공보 창간호가 발행된 1909년 7월 1일부터 음주 흡연의 해독을 알리는 글을 처음으로 썼고, 1910년 한일병탄이 조인되던 10월에는 보다 적극적인 계몽활동의 일환으로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7대 사역으로 교육, 의료, 농촌운동, 문화, 여성, 가정생활개선, 사회봉사, 금주, 금연운동을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아직 대 사회활동이 미진할 때 금주금연과 더불어 퇴폐풍조와 사회악 척결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던 구세군의 절제운동은 기독교의 대사회적 활동에 큰 힘을 주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금주호를 발행, 배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24년에도 금주운동이 지속되었는데, 우울선 부관은 인귀지 선교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귀지 기관과 나는 낮에는 시장마다 돌아다니고 밤에는 영문을 방문하면서 여행을 한 후 지난 토요일에 집에 돌아왔다. 우리는 어깨에 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어깨띠를 두르고 이 정신을 살려 가로전도를 19번하였으며 9번의 실내 집회를 가졌다. 구세공부 금주호를 상당수 판매하였으며 인귀지 기관은 그녀의 할당인 500부를 빠르게 처리하였다. 모든 사관들이 다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으며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2) 구세군 분규사건에 연루

한편, 교회들이 상처받은 국민을 돌봐주는 것을 최대 의무로 하던 시기에 일어난 구세군 운동이었지만 영‧일 동맹의 틈바구니에서 구세군은 영국 성공회와 프랑스 천주교회와 함께 1919년 3‧1운동에 불참했다. 이로 인해 구세군은 조선민족에게서 환영받는 민족교회로서의 이미지를 가질 수 없었고, 이는 구세군의 토착화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지속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 감정이 후에 일어난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에서 표출된 것이다. 이 분규는 선교사들이 일본인 사관을 우대하고 조선인 사관을 차별 했기에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구세군 분규사건을 일으킨 한국인 사관들의 진정서의 요구사항은 20가지였다. 진정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는 재정내용 공포, 둘째는 차별대우 폐지, 셋째는 참정권 문제, 넷째는 도덕적 정화운동, 다섯째는 생활개선을 요구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인 사관들의 생활 향상과 지위향상, 그리고 선교사들의 교단 정화운동을 골자로 한 개혁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 진정서는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떳떳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 혼잡 속에 인귀지 부관도 합세했기에 한국인 사관들과 함께 징계를 받아 계급이 강등되는 아픔을 겪는다. 징계를 수용하지 못한 이들은 사역을 포기하기도 했고, 안식년을 얻어서 고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 중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인귀지 선교사는 1922, 1928, 1936년 세 차례에 걸쳐 안식년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중 1928년에는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반 만에 일어난 구세군 분규사건의 후유증으로 별세한 두영서 사령관의 부인을 따라 고국에 가게 된다. 자신 역시 같은 사건으로 강등을 당한 상황이었고, 당시 선교사관들에게 있어서 조선의 풍토는 낯선 환경일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풍토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많은 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의료적 상황은 열악하여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적절한 치료가 어려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선교사들이 생겨났다. 구세군 선교사관들 중에서도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가난과 질병이 만연했던 조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관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했던 시기의 한가운데, 인귀지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다.

3) 영동지방관에서의 복음전파 사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귀지 선교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역을 지속한다. 구세군분규사건이후 영동지방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딸을 잃는 아픔 가운데서도 영동지방의 분규사건을 수습했던 스미스(W.H.Smith)가 제5대 구세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자, 인귀지 선교사는 그의 후임으로 1930년부터 영동지방관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구세군은 1932년 개전 25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영적성장, 아동구원, 기념 감사금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맞추어 같은 해 10월 인귀지 선교사는 박준섭, 우의인과 함께 양적, 신흥, 광평, 영동, 교평, 주곡임계, 심천 원동을 두루 다니며 전도했고, 그 결과 28명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4) 여성문제해결을 위한 사업

당시 구세군 교육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교육을 일찍부터 허락했다는 것이다. 구세군 사관학교는 부부를 함께 사관학생으로 교육시켰을 뿐 아니라 여성 독신 사관학생도 입교를 허락했다. 보통 여성들의 경우 남편이 사관인 경우 사관 부인의 자격으로만 활동했다. 그렇지만 구세군은 1918년 학칙을 바꾸어 사관학생의 아내도 입교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 아니라 여성사역자의 입교를 장려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사에서 한국인 최초의 여성목사는 1955년 감리교에서 배출된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구세군은 이보다 36년이나 앞서서 여성사관, 곧 여성목사를 인정했던 것이다. 인귀지 선교사는 1930년부터 사관학교에서 여학생을 담당하는 사관으로 사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37년에는 서울 여자관장으로 취임하며 여성 사역자 양성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인귀지 선교사는 여선교사와 한국교회가 중심이 되어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사업에 헌신했다. 그녀는 1939년 가정단 서기관에 임명된다. 가정단은 1930년 2월 13일에 설립되었는데, 1919년 평양에 온 선교사 웰즈(L. Wells) 부인이 시작한 루라 웰즈학원(The Lula Wells Institute)을 통해 소박맞은 부인, 과부, 취학 못한 소녀 등 불우한 여성을 모아서 4년 과정으로 보통학교 과정을 교육시킨 것이 시초였다. 이후 1922년에는 한국 주재 각 교파 선교단체협의회 내에 사회봉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호주장로회 선교부와 한국 구세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1926년에는 서울에서 '소녀의 집'을 개관하였다. 뒷날 '서울 부녀관'으로 개칭, 발전시킨 이 기관은 구세군 여사관 아케홀름(Mrs. E. Akeholm)과 린드퀴스트(E. Lindquist) 등이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귀지 선교사는 1933년부터 다시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30년대 구세군 사관학교 교과목을 보면 영어뿐 아니라 가정부인단이라는 과목도 개설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과목은 가정부인단 관리와 함께 여성들에게 필요한 가정관리를 위한 각종 교양을 위한 교육이었다. 1930년을 전후한 그녀의 사역을 검토해볼 때, 그녀는 가정단 서기관에 임명된 1939년 이전부터 가정단 사역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을 돌보는 사업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관은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서울, 대전, 부산 지역에 모두 5개의 복지시설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들 5개의 시설 모두 요보호여성을 위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주로 10대와 20대 초반의 미혼모, 매매춘 경험이 있는 가출청소년들, 그리고 학대당한 아내와 자녀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제공되고 있다.

4. 한국을 떠난 뒤에도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후 한국기독교는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분열, 회유공장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변질의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질은 구세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0년 11월 ‘조선 구세군’도 그 명칭을 ‘조선 구세단’으로 바꾸어 일본 구세단과 긴밀히 협력하며 ‘순일본적 지도이념’ 및 기구를 확립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외국 구세군 사관들이 강제 출국을 당하는데, 인귀지 선교사도 1940년 12월 9일 강제 추방으로 출국하여 북경으로 전임한 후 침례교로 전임하여 사역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의 한국사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6‧25 사변 중, 한국의 상황을 염려했기에 미국을 통해 한국에 소식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5. 나가는 말

사관학교 교수로만 알려졌던 인귀지 선교사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후손에 의해 보존된 기록이 없고, 한국에서 사역을 마무리하지도 않았기에 양화진 선교사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 없었으며, 이후 교단을 옮겨 침례교에서 사역을 했기에 구세군에서 찾을 수 있던 자료에 한계가 있었고, 스웨덴 출신 선교사였기에 언어상의 한계 때문에 인터넷으로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에 관해 한 줄씩 기록된 사건들을 퍼즐처럼 모아보니 총체적 복음을 향한 그녀의 삶의 자취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녀에게서 1937년 교리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장형일은 인귀지 선교사를 소개한 글의 마지막 줄에서 “그녀의 인자하고 청아한 모습을 오래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그녀의 사역기간에 해당하는 구세신문을 다 뒤져보았으나 끝내 그녀의 사진 한 장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사역의 흔적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감 하나로 청춘을 바쳐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녀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작성일:2019-12-05 20:36:08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