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조사(3-5 2017210322 정연수)/B070/남감리회/Nichols, Lillian E (1881-?, MS)

닉네임
정연수
등록일
2019-12-06 05:57:23
조회수
68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조사 2017210322 정연수.hwp (852480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 Nichols, Lillian E. / 니콜스
한국명 : 예길수(芮吉秀), 만길수(萬吉秀) https://his.kmc.or.kr/foreign-missionaries/ 감리교회 역사자료 검색 서비스에서는 한국명이 만길수(萬吉秀)로 나옴.

2. 생몰연도 : 1881.10.19. - ?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4. 한국 선교기간 : 1906-1912, 1913-1937
5. 연표
1881.10.19. 미국 플로리다주 아파라치나코나에서 출생
1901 앤드루전문대학교 졸업, 3년간 교편
1906 미주리주 캔사스시 스칼렛 신학교 졸업, 남감리회 한국선교사로 파송
1908-1910 개성 호수돈 여학교 교장
1910 서울 배화여학교 교장 대리 승진
1912 안식년으로 귀국, 대학에서 문학사(A.B.) 취득
1913 서울 배화여학교 교장 대리(1년)
1914-1916 개성 호스돈 여학교 교장
1916-1919 호스돈 여학교 부교장
1920-1937 호스돈 여학교 교장
1937 은퇴 감리교 역사 등 기록물에는 1927년까지 호수돈 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나오나, 동아일보 1938년 3월 12일자 기사에 예길수 여사가 전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신병으로 인하여 돌아오지 못하여 교장이 바뀌었음을 기사로 낸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 사역은 1937년까지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됨.
, 죠지아주 제습시 제일감리교회 선교회장으로 10년 시무

6. 가족사항 : 기록 無

Ⅱ. 선교사 소개 : Nichols, Lillian E.(1881-?, MS)

1. 한국에 열리게 된 여성교육의 장

니콜스(한국명: 예길수) 선교사는 연표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지만, 선교사역의 대 다수의 시간을 교편에 있었다. 특히 예길수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였다. 그녀는 호수돈 여학교의 3대 교장 이었다. 선교사가 호수돈 여학교에 교사와 교장으로 사역한 것은 1908년부터 1937년까지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일제의 탄압을 받는 시기였다. 특히 1915년은 총독부에서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해 기독교학교가 성경과 지리, 역사 등의 교육과정을 첨가하는 것을 불허하는 규칙을 발표했었다.
일제는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의 사상적 동향을 감시하였으며, 경찰과 군대, 대검(帶劍)한 교사가 일체가 되어 기독교 학교를 탄압했다. 이에 대한 선교회의 공식적 태도가 1915년 선교연합회의 “개정 교육령에 대한 결의문”에 나타나있는데, 그 내용은 “적어도 일본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정도의 종교교육의 자유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교단체는 두 가지 입장을 내보였는데 선교회의 학교 경영이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포교에 있으므로 성경의 교수와 종교의식을 할 수 없다면 10년간 유예기간을 정해서 투쟁하다가 실패하면 폐교하자는 입장의 “강경론자”와 성경의 교수와 종교의식 거행은 과외나 방과 후에는 무방하다는 당국의 양보가 있으니 이에 순응하자는 “온건론자”의 대립이었다. 장로회 학교는 대부분 강경론자의 입장으로 총독부에 저항했기에 일대의 고난이 닥쳐왔지만, 예길수 선교사가 속한 감리교는 대체로 온건론자의 입장을 취했다. 정정숙. 『한국기독교 여성교육사』. (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01). 238.
이로 인해 1918년 호수돈 여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호수돈 여학교의 교장은 Ellasue Wagner였고 예길수 여사는 부교장이었다.

이 사건은 척박한 교육현실을 가진 조선의 땅에 여성교육의 씨를 파종한 시기라 볼 수 있다. 일제는 ‘민족말살전략’에 의해 여성교육을 저해하고 방해하였으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여성교육에 대한 끊을 놓치 않고 그 명맥을 이어갔다. 호수돈 여학교의 가장 탄압이 심한 일제강점의 시기에 예길수 선교사가 있었던 것이었다. 감리교의 학교들은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교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도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호수돈 여학교는 6.25전쟁이 휴전되는 해인 1953년 대전에서 다시 재건되었다. 정정숙. 『한국기독교 여성교육사』. 266.



2. 주일학교가 정식학교가 되기까지 틀을 잡아간 예길수 선교사

호수돈 고등학교는 1899.12.19 캐롤여사가 ‘쌍소나무집’이라 불리던 초가집을 사들여 주일학교로 개교한 학교였다. 그리고 1904년 정식 학교로 설립하면서 12명의 학생이 있었다. 『조선남감리교회30년기념보』 127.
학교는 급 성장하여 예길수 선교사가 교사로 있던 1909년 4월에는 중학과를 설치했으며, 1909년 6월에는 DR. E. Staley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친구들이 준 거액을 본교의 교사를 짓는데 내놓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텐리 박사의 거주지인 Holston를 한자 음역으로 바꾼 호수돈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1909. 8. 12.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4년제 고등과를 설치하고 같은해 9. 27 석조본관 건물을 준공했다. 또한 그녀가 부교장으로 있던 1918년 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받고 기예과를 병설했다. 1922년 2월 제2차 교육령 발표로 4월에 예길수 교장은 수업연한을 4년으로 변경하였다. 방병욱. 『한국감리교여성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248.
예길수 선교사가 교장 또는 부교장으로 사역한 시기에 개성 호수돈 여학교의 기반과 틀이 잡혀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사역기간을 생각해 볼 때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성 교육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그녀 공헌이 크다고 생각된다. 또한 6.25전쟁 직후 호수돈 여학교가 대전에 다시금 개교할 수 있던 원동력도 이때 자리잡고 운영했던 역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보인다.


High School Building
……………………………………

100,000
Primary School Building
……………………………………

20,000
Chapel
……………………………………

20,000
Kindergartens
……………………………………

1,750
Kindergarten on Holston Compound
……………………………………

20,000
Domestic Science Building
……………………………………

1,600
The value of ground and plant
……………………………………

49,100
Equiqment
……………………………………

17,600



231,700
(Nichols, Lillian의 학교 설립 예산안) 『조선남감리교회30년기념보』 126.




3. 학교를 세운 선교사의 영향력

첫 번째, 호수돈 여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인류발전을 위한 사업과 복음전도의 일꾼으로 활약했다. 1929년 졸업생 212명 가운데 선교사업 종사자 3명, 여자 신학교 재학 39명, 신문기자 1명, 상업종사자 1명, 교원이 70명, 가정의 어머니 91명으로 상당한 수가 종교, 사회적 위치에서 일하며, 한국 여성의 발전과 향상, 복음화에 기여한 것이다. 예길수 교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우리가 어찌 이 사업의 영광과 주의 나라를 위하여 구원 얻은 생명들과 세상을 위해서 준 희생적 봉사를 말하지 아니할 것이랴. 이모든 사실은 영생록에서 역력히 드러날 것이다” 방병욱. 『한국감리교여성사』 249.


두 번째, 광복을 향한 개성에 분 만세 바람의 시작이 호수돈 여학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호수돈 기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가 있었다. 이 비밀 결사대는 1919. 3. 3 독립선언을 위해 권애라, 장정심, 조숙경 세 사람이 핵심 멤버로 이들은 독신으로 오로지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이들은 예배당 지하실에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4층 기도실에서 선언문을 중심으로 비밀회를 가졌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맹세한 결사대였으며 80명의 기숙생을 포섭하는 공작을 나눠 맡기로 하였다. 또한 엄한 경계로 인해 기숙생들이 밖을 왕래할 수 없어 4층 커튼을 뜯어 극비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놓고 거사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돈여중고등학교. 『호수돈백년사』(서울: 홍익전자출판. 1999). 98.
호수돈 여학교는 여성교육이 전무했던 한국 사회 가운데 획기적인 역사를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민족을 향한 회복을 꿈꾸는 인재를 길러내었다. 여 학생들이 사회 각층에 나가 자신의 소명을 발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억압 가운데 민족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진 리더를 양성하는 학교로 발돋음 하였음을 살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백년 역사를 가진 학교가 되었다. 호수돈 여학교는 6.25전쟁 직후 대전으로 그 자리를 옮겨 다시 개교되었다. 이 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가지며 다양한 인재들을 배출 해 내었다. 예길수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어를 배우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원받은 물질을 학교를 세우는데 사용한 결과 100년이 지난 지금 명문학교로 학교가 성장되었고, 인재가 배출되었다.





(최초의 교표는 1927년 2월 예길수 교장때 제정)
호수돈 여학교의 교표는 1927년 예길수 선교사가 재직중이던 때에 만들어 지게 되었는데 이는 원형의 푸른 바탕에 별을 그려 넣은 것으로 둥근 형은 지구를 상징하여 인류애와 민족애를 뜻했고, 푸른 빛은 평화를 뜻했다.
별은 호수돈을 상징하는 것인데 겨레를 위해
인류를 위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보아도 학교의 성격을 알 수 있지만 현재 호수돈 여학교의 교훈은 “남을 위해 살자”이다. 처음의 교표가 의미했던 바도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학교의 첫 방향을 잡았던 예길수 선교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로 검색한 동아일보 1938년 3월 12일자 7면에 나온 기사인데, 이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 전교장 예길수 교장이 전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신병으로 돌아오지 못해 왕래 여사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는 기사로 보아 예길수 총장의 마지막 연대는 1937년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대부분의 자료에는 1927년까지 호스돈여학교 교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0-1937 호스돈 여학교 교장”
작성일:2019-12-06 05:57:23 14.53.23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