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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145 / Walter Althea Jeannette (1885-1977) / 3학년 6반 2017210391 정인선

닉네임
정인선
등록일
2019-12-06 23:43:25
조회수
939
첨부파일
 Walter Althea Jeannette 3학년 6반 B145 정인선.docx (2738400 Byte)
월터 선교사 Walter Althea Jeannette (1885. 2. 3. ~ 1977. 6. 26.)

작성일시 2019년 12월 06일

Ⅰ. 기본사항(연표)

1. 이 름 • 월터 Walter Althea Jeannette ( 월터 / 우일태(禹日泰) / 미국 / F )
2. 생물연도 • 1885. 2. 3. ~ 1977. 6. 26. (92세) 미국 펜실바니아 주 래트럼 출생
3. 가정환경 • 캔사스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풍족한 집안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남
• Kingman , Kingman County , 캔자스 킹맨 출신
4. 학 력 • 베이커대학 및 노스웨스턴 대학 졸업
• 콜럼비아대학 사범대학원 졸업.
5. 소 속 • 미국북감리교회 여선교사. 교육자
• 해외여선교회 W.F.M.S. 토페카지부의 파송으로 1910년 12월 내한
6. 한국 선교 기간 • 1910. 12. ~ 1933.
7. 한국에서의 활동
• 1910.12. 내한. 이화학당 교사로 취임. 영어와 체육을 교육.
• 1919. 3. 3∙1운동 당시 옥사한 유관순의 시체를 인수.
• 1920-21 학당장서리.
• 1921. 4. 제5대 이화학당장에 취임.
• 1921. 280평의 심슨홀 증축과 한국최초의 유치원교사 100평 건물에 착수하였다.
• 1921-1925. 한.미 협동이사회 이사로 이화 재정에 큰 기여를 함
• 1933. 이화 퇴임 후 귀국
• 1954. 노스 고등학교(North High School)에서 카운슬러로 은퇴
• 1959.5.6. 이화 창립 73주년 기념식에서 이화여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취득
8. 매 장 • 월넛 힐 묘지
9. 가족사항
• 부: 데이비드 월터(David Walter) 1846 – 1927
• 모: 앤 엘리자 월터(Ann Eliza Walter) 1853 – 1943
10. 논저 AUNT JEAN by JEANNETTE WALTER (Johnson Publishing Company / Boulder, Colorado)


Ⅱ. 선교사 소개

1. 월터와 이화학당

미스 월터는 초창기 이화를 이끌었던 여섯 명의 미국 선교사 중에 가장 짧은 당장(堂長) 임기를 역임한 분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이화 역사에 남긴 의미는 크고 심장하다. 우선 그녀는 그 이전의 다른 선교사들이 「어두운 땅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러 와서 그 방편으로 가르치게 된 것과는 달리, 애초부터 한국 여성의 고등교육을 위해 이 땅에 온 W.F.M.S.(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토페카지부의 파송으로 온 “최초의 교육선교사”였다.

1910년 9월부터 이화학당(당장 프라이, Frey, Lulu E., WFMS, 1893-1921))은 대학교를 설치하여 15명의 학생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해 왔는데 당장 프라이는 대학교육에 필요한 교수진의 부족을 미국에 강력히 호소하여 그해 12월 파이(Ooive Fawcett Pye ; 과학∙그림∙체육), 하몬(Grace Harmon ; 음악) 등과 월터가 함께 오게 된 것이다. 프라이 당장은 여성의 고등교육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실천하여 1910년 마침내 이화학당 대학과를 시작하였다. 막상 대학과를 시작하려고 하자 그동안 자녀들의 신교육에 대해 긍정적이고 상당히 열의를 보이기까지 했던 학부형과 일반 대중들은 물론 기독교 선교와 교육에 뜻을 같이 하는 선교사들 중에서도 여성의 고등교육이 시기상조라는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조혼의 폐단은 소녀들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과년한 처녀들이 20여세가 넘도록 학교에서 공부만 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게다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경우 이제껏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가정에 적응하기 힘들며 그 결과 민족에게 봉사하는 일에도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반대자들의 이유였다. 여러 가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과를 설치한 프라이 당장이 미국 북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 고등교육을 감당할만한 유자격 선교사 파견을 각별하게 호소한 결과로 월터, 파이, 하몬 세 사람의 교육선교사가 오게 되었고, 서울에 1910년 12월, 서울에 도착하여 휴식할 사이도 없이 1911년 1월 3일 개학과 함께 강의하기 시작했다. 월터의 자서전에 의하면 배(Pye) 씨와 함께 한국어를 배운 기록이 나타난다. 함(Ham) 씨라고 불리는 한국어 선생님에게 한 달에 7.5 달러를 지불하고 배웠으며, 처음 교재는 성경과 찬송이었다. 외국 언어를 배우기 전에 그들은 문법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Ham 선생님은 동사, 명사 등과 같은 것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처음에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요 3:16과 눅 2:14절을 읽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함씨가 기도했다고 한다.

당시 이화에서 대학과를 담당할 만한 선생으로는 프라이 당장과 마커(Miss Marker), 해니그(Miss Hulda Haenig) 외에 한국인으로 일찍이 미국에서 B.A.를 취득한 하란사 선생과 한문을 가르치던 남자 선생 두 분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월터 선생은 대학과에서 수학을 강의하였으며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학교 운영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년) 5월 21일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Mrs. Mary F. Scrnaton) 부인이 한 사람을 가지고 시작했다. 이듬해 1887년 구 한국 왕후 민비께서 「이화학당」이라는 당명을 하사하였고, 1890년 미스 로드 와일러(Miss Lousia C Rothweiler)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1893년 학당장에 취임한 미스 페인(Miss Josephine O. Paine)은 1900년 메인 홀(Main Hall. 구교사와 기숙사 및 강당으로 됨)을 준공하였고, 1904년 4년제 중학과를 설치하였다. 1907년 미스 프라이(Miss Lulu E. Fery)가 학당장에 취임하였으며, 1915년 학관(Simpson Hall)을 준공하였다.

2. 학당장 월터

월터는 영어와 체육을 담당하였고, 프라이 당장이 병을 얻고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었다(1919. 8). 프라이 당장의 귀국으로 당장서리직을 맡은 사람은 이화와 함께 이 땅에 태어난 미스 아펜셀러였으나 다음해인 1920년 아펜셀러 당장서리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어 미스 월터(Miss A. Jeanette Walter)가 이어서 당장서리직을 맡게 되었고, 1920-1921년에 학당장서리로 봉직하였으며, 프라이가 세상을 떠난 1921년 4월 제5대 이화학당장에 취임하였다. 그녀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후 류관순 학생이 순국하였을 때 그녀의 시신을 인계 받는 등 학교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하다 1921년 학당장에 취임한 것이다. 1920년 봄학기 학당서리로 재직시 대학예과생이 2배로 증가하고 학생 중 상당수가 남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조속한 시일 내로 여자연합대학이 이루어지리라는 꿈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보건위생과 행정 면에 주력하여 280평의 심슨홀을 증축하고 한국 최초의 유치원 교사 100평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손탁 호텔 자리에 최신식 시설을 완비한 프라이홀을 건축했다.

3. 엘리스 아펜젤러 양에게 사려깊고 아름다운 학당장 양보

1922년 4월 미스 아펜셀러가 휴가를 마치고 귀임하자, 월터 당장은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한국말을 능숙하게 하고 미국에 지인이 많은 아펜셀러가 이화 전문의 교장으로서는 적임자」라는 월터 당장의 변에도 불구하고 이사회는 그(월터)의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월터 당장은 미스 아펜셀러와 단독 회담을 하여 교장 자리를 아펜셀러에게 맡기려는 뜻을 관철시켰다. 아펜셀러 교장이 기미독립운동 이후 미국 선교사들에게 껄끄러운 시선을 주고 있는 총독부와의 관계를 절충해가며 학사(學事)면을 발전시켜 전문학교 인가를 획득하고, 재정과 건물관리까지 책임지는 일을 난감해하는 미스 아펜셀러를 도와 월터 선생이 관리를 맡는다는 두 사람의 합의가 받아들여져, 1922년 10월 미스 아펜셀러가 당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10월에는 학당장의 자리를 아펜젤러에게 물려주고 프라이홀 건축에 착수, 건축 총감독에만 주력하였다.


4. 이화대학 발전의 숨은 공신 월터

월터는 당장직을 미스 아펜셀러어게 물려 준 뒤로는 이화의 매니저로 활약하였다. 흔히 공직에서의 ‘최단기’라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겨지는 데 반해, 이화의 제5대 당장 미스 월터의 ‘최단기’는 사려깊고 아름다운 진퇴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력있는 교사와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궂은 것을 마다않는 이화인이었다. 그는 또한 1923년 10월에는 김활란 박사와 함께 세계회의 선교단 간부회의에 참가, 이화학당 신축 대지기금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에 이화학당에는 그레이(Mrs. Phillip Hayward Gray) 부인이 세계 유람차 한국에 들렀다가 「이화」를 방문, 연합기독교여자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라는 아펜젤러 당장의 브리핑을 듣고 드디어 대지 구입비를 기부하기로 선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터의 꿈은 이뤄졌다. 동양선교사로 있는 장남을 방문하려고 두 딸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던 그레이 부인이 같은 배에 탔던 캐나다 선교사 미스 쌕스의 권고를 듣고 이화에 들른 것이었다. 그들은 캠퍼스를 둘러보며 특히 프라이홀과 대학 사업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레이 부인보다 한 발 앞서 다녀 간 미스 쌕스에게서 이들 일해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있던 선생들은 이제 눈 파에 다가온 기회를 놓칠세라 떨리는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이화가 기독교연합대학이 될 것이라는 것과 앞으로의 비젼을 열심히 설명하고, 신촌 대지를 안내하였다. 겨울을 채촉하는 차가운 비 속에 신촌의 송림은 이화의 웅장한 미래를 포용할 만한 엄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대지 구입비가 2만 5천 달러라는 말을 들은 그레이 가족은 잠시 의논하더니 마침내 대지 구입비를 기부하겠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장차 세워질 대학의 건물 어느 곳에도 자기들의 이름을 붙이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너무나 명백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 어떤 전보수단보다 신속하게 이화에 임하였다. 그레이 부인은 귀국 즉시 3만 달러를 보내 주었고 그후에도 신촌 교사 건축 시 2차, 3차의 기부를 해왔다.

월터 선생은 또한 기숙사 생활에 「큰언니운동」, 「공주회」, 「무흠단」 등의 서클 활동을 지도하여 신앙과 봉사, 자치 능력을 고양시켜 여성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북돋게 하였다. 1920년대의 무흠단(Purity League)은 뜻있는 몇몇 학생으로 조직되고 월터 선생이 지도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건전하게 살자는 목적으로 오늘의 M. R. A. 운동과 같은 것이다. 단원은 은으로 만든 「무흠단」이라는 뺏지를 달고 다녔다. 선교사의 요리사로 일하던 사람이 지방 출장 중에 그 딸이 병사하자, 미스 월터는 급히 아이의 아버지에게 연락하는 한편, 손수 관을 사다가 소녀의 시신을 모슬린 천으로 싸서 입관하여 매장해 주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그를 ‘서울에서 가장 염(捻)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월터는 또한 유달리 한국 민족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깊어 3∙1운동으로 옥사한 유관순의 시체를 인수하였다고 한다. 김혜숙 이화여대 총장도 “월터 이화학당 5대 당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월터 당장이 유 열사의 시신을 수습해 학교로 모시고 왔고, 다같이 모인 가운데 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고 말했다. 유관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장 프라이(Miss Lulu E. Frey)와 교사 월터(Miss Althea Jeannette Walter)는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일제에게 공식적인 요청 절차를 밟았다. 처음에 시신 인도를 거부했던 일제는 외국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프라이 등의 항의에 못 이겨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하였다.

월터와 파이 선생은 학생들에게 진취적인 기상을 기르기 위해 체육강의를 시작했다. 체육시간을 통해 한복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가슴을 꽉 조여 비활동적이라고 실감한 월터 선생은 미스 파이와 함께 치마의 고정부분을 개량한 소위 「조끼 허리치마」를 고안해서 학생들에게 착용시켰다. 전체적인 모양은 변함이 없으면서도 착용감이 편안한 이 조끼 허리치마에 매력을 느낀 학생들은 방학이면 고향에 돌아가서 이웃에게 전파하였고, 이것이 한복개량의 제1보가 되었다. 학생들의 위생과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였던 선교사들은 가슴을 꼭 조이는 것은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하여 조끼허리를 단 치마를 권장하였다. 월터와 파이 선생은 담당 과목 외에도 많은 시간을 체육활동에 할애하여 여학생들을 옥외로 이끌어 각종 놀이와 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화의 체육은 소수의 전문적인 선수 양성보다 전체 학생의 체력 향상에 그 목적을 두었으며 그 결과 학생들의 건강과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1924년 오하이로 웨슬리안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미스 로이스가 체육주임으로 부임하여 교과과정을 정비하기 전까지 그동안 보급된 각종 게임 종목들만 해도 당시 한국에서는 매우 새로운 것이거나 적어도 여학생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들이었다. 1913년 한국 최초로 정구와 농구가 소개되어 댕기를 늘이고 긴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들이 운동장을 뛰어 다니기 시작한 이래 배구, 야구 등 구기 종목과 아령체조, 곤봉체조, 덤블링 등이 보급되었다. 이 같은 다양한 운동 경기와 체육활동이 권장된 사실은 단순히 체육교육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음지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전통사회의 여성들이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여성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우선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때까지 학생들은 발등을 덮는 긴 치마와 짧은 저고리를 입고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넓은 치마허리로 가슴을 단단히 조이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발육을 방해하는 치마허리와 체조를 할 때마다 치마가 흘러내릴까, 겨드랑이가 보일까 노심초사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던 월터와 파이 선생은 마침내 한복 형태의 일대 혁신을 가져 온 조끼허리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조끼허리는 조그마한 변형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한국 여성들의 의생활에 끼친 영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먼저 몇 벌을 시험삼아 만들어 한국인 여선생님들이 입어 보고 학생들에게 재봉시간을 통해 체육 시간에 입을 옷 한 벌씩만 조끼허리로 고치도록 하였다. 처음 한동안은 어머니가 곱게 지어주신 치마허리를 뜯으라는 말에 강한 반발과 서운함을 표현하는 학생들이 있더니 얼마 안 가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고쳐 입게 되었다. 월터 선생은 자신들이 해 낸 이 조그만 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가 이화에서 이 같은 변화를 일으킨 후 석 달쯤 지난 여름에 영변에 가게 되었다. 주일날 작은 시골교회에 갔는데 어린 소녀들 한 무리가 바로 우리 앞자이에 앉아 있었다. 오 세상에! 그들 모두 조끼 허리가 달린 치마를 입고 있었으니, 나의 놀라움이 어떠했겠는가! 예배가 파한 후 나는 그들에게 물었고 그들은 말하기를 잠시 고향에 다니러 왔던 이화학생이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순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스릴을 느꼈다. 이 나라 전체 여성들의 건강을 위해 정말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5. 나가며

1933년 미스 월터는 청춘을 이화에 헌신하고 귀국했으나 이화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특히 6∙25전쟁 동안에는 이화에서 봉직했던 미스 칸로, 미스 모리스와 더불어 “이화의 친구들(Friends of Ewha)”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이화돕기 운동에 발벗고 나서서 이화를 위한 모금이 항상 활발한 곳이 캔사스주 위치타시였다. 수복 후 건립된 총장공관을 「위치타 하우스(Wichita House)」라고 부른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화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자세를 보여준 미스 월터는 1969년 회고록 <진아주머니(Aunt Jean)>를 남겼고 1977년 세상을 떠났다.

월터 선교사의 삶의 모습은 아름답고 귀하다. 학당장을 양보한 아름다운 배려도 귀하지만, 선교사의 요리사로 일하던 분의 딸이 병사했을 때 그분에 대한 섬김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삶의 실천이다. 한국의 어두움을 가슴에 품고 온몸을 다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던 그분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은 앞으로 내가 따라가야 할 삶의 모습이기에 겸손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새긴다. 아름다운 족적을 남긴 믿음의 선배 월터 선교사의 발자취를 닮고 싶다.
작성일:2019-12-06 23:43:25 124.51.228.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