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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조사 과제 2017210316 3-5 이희석

닉네임
이희석
등록일
2019-12-11 15:36:07
조회수
151
첨부파일
 뉴스마 선교사 조사(2017210316 3-5 이희석).pdf (94411 Byte)
뉴스마(Dick H. Nieusma, Jr) 선교사 조사
2017210316
3-5 이희석
들어가며
2019학년도 2학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3학년으로 수학하며 한국교회사를 박용규 교수님께로부터 수강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선교사 조사라는 과제를 받게 되었고, 선교사 중에서 뉴스마(Dick H. Nieusma, Jr) 선교사에 대해서 조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뉴스마 선교사에 대해서 그의 출생과 배경, 사역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그에 대해서 마지막에 정리함으로써 이 글을 써내려가고자 한다.

출생 및 성장 과정
뉴스마(Dick H. Nieusma, Jr/한국명 유수만) 선교사는 1930년 9월 20일 미국 미시간주 홀란드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1952년 호프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1956년 미시간대학에서 치의학을 전공하고, 치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 1960-61년에 콜럼비아 신학교에서 선교사로 공부를 하였다. 아내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의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그 활동을 시작하였다.1961-63년까지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어학 공부후에 본격적인 의료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71-72년 미국 미시간대학, 1976-79년 광주 조선대학교, 1977-79년 광주 세원전문대학 초빙교수, 1970-79년 연세대학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였다. 또한 광주 기독병원에서 치과과장으로 재직하였고 이 가운데 부인도 함께 선교활동을 하며 한국인 고아 2명을 양자로 들이며 1남 1녀와 양자 2명을 양육하였다.
뉴스마 선교사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자신의 출생과정을 회고하고 있다.

“1930년 9월 20일, 경제 대공황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던 시기에 나는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플레즌트 에비뉴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나의 외조부모님은 1870년대에, 친조부모님은 1881년에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오셨다. 당시 프리슬란트 주 출신은 ‘고집불통 네덜란드인’으로 통했는데 명성에 걸맞게 외할머니는 세상을 뜨시기 전까지 미국에서 80여년을 사셨음에도 영어를 배우지 않으셨다. 그러고는 종종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덜란드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착한 녀석! 넌 자라서 좋은 설교자가 될거다.”
그런 할머니의 바람은 응답받으셨다. 왜냐하면 비록 안수받은 목회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선교사가 되어 내 몫의 설교를 감당했기 때문이다.

뉴스마 선교사가 자라던 시기는 1차 대전과 2차대전의 시기이며 세계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정세였지만 가족의 신앙을 물려받아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선교사로서 자원하여 선교지를 밟고 이억만리 먼 땅인 대한민국까지 와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그는 외할머니의 영향 뿐 아니라, 어머니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어려운 시기임에도 늘 성경으로 교육해야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그는 역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아는 성도 중 가장 신실한 분이었다. 애정 많고 겸손하고 가족을 위한 희생이 몸에 배셨으며, 때론 남자보다 강인하셨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여섯이나 되는 자녀에게 자신이 드실 빵을 주곤 하셨고, 추운 겨울에는 닭 사료자루를 잇대 만든 차가운 침대 시트를 다리미로 다려 우리가 온기 속에서 잠이 들도록 해 주셨다. 하루 종일 살림살이하느라 분주하셨음에도 자친 몸을 이끌고 밤마다 나를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준 뒤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도해주셨다.”

뉴스마 선교사의 어머니의 희생이 없이는 뉴스마 선교사가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하는 그러한 사역자로 자랄 수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한가지는 뉴스마선교사의 자서전을 통한 회고를 보았을 때 출생 및 성장 과정에서 지지해주고 교육해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내한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어진다.

주요업적
뉴스마 선교사가 내한을 하기 전 1956년 미시간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는 4년간 주일미군으로 복무하는 와중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훈련과정을 마치게 되었는데, 1년 동안 콜럼비아신학교에서 선교사 훈련 과정을 마친 후 1961년 9월 서울에 도착했다. 외국인으로 처음으로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뉴스마는 1963년 광주 기독병원에 부임하여 그 후 1986년까지 23년 동안 치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개설하고, 정기적으로 무의촌 진료봉사활동을 하고 암환자들을 위한 특수 보철 치료를 시행하는 등 치과의료선교에 매진하였다.
또한 호남 최초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과 광주보건전문대학 치위생과 개설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세계로 나아가 사랑을 베풀도록 1982년에는 ‘치과의료선교회’를 창설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광주기독병원 치과 개설 10주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는 여기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모두들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무의촌 봉사활동에 임했으며 소년원 주일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하고 싶었다. 치과 의료진은 가톨릭 과정센터에서 10주년 기념식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 기념식에는 병원 임직원, 선교사, 지역 치과의사 등 많은 손님들이 참석했고, 내 생일인 9월 20일에 거행되어 나는 아름답고 큼지막한 병풍을 선물받았다.”

“1974년에는 몇가지 좋은 일들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골 진료소 봉사를 나가고 싶었지만 운송 수단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리비 박사의 아들로 광주에서 성장한 엠머가 멋진 25인승 버스를 후원해주었다. 그로 인해 전 직원이 필요한 장비와 재료를 모두 싣고 봉사활동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병원과 선교회도 이 버스를 이용해 주일에 더 많은 교사들을 데리고 소년원에 갔다. 또 한가지 새로운 일은 치과진료소가 신축 병동 1층으로 이전하면서 진료대를 열네 대나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큰 기공실과 개인 치료실 및 강의실도 생겼다는 것이다.”

뉴스만 선교사는 한국에서 치과의사로 활동하며 단순히 진료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술로 봉사활동을 가고 또한 한국의 치의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치의학을 펼치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도 함께 흘러가게끔 하는 노력도 역시 함께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한 뉴스마 선교사에게 있어 광주광역시는 1986년에 귀국하게 되는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귀국 이후 그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8년 7월 7일 숙환으로 소천하였고 그 부부의 유언에 따라 광주 양림동산에 묻혀지길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자 그의 유언에 따라 제자들과 유족들의 노력으로 호남신학대학교 선교사 묘역에 안정되었으며 11월 16일 묘역에서 비석 제막식을 가졌다.

마무리하며...
뉴스마 선교사의 족적을 따라가기에는 작년에 소천하신 분인지라 그를 평가하는 글이라든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과 몇몇 기사를 읽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을 너무나 사랑했고 눈 앞에 보여주시는 영혼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은 것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없었다면 고국에서 눈을 감으면서도 자신이 일생을 바친 광주땅에 묻어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료를 펼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주신 의술은 그들을 위해 섬기라고 있는 것인줄 알고 아낌없이 펼치고,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동일하게 증거되어야 함을 인지했기에 그는 지금껏 달려온 것이다.
이제 역사는 뉴스마라는 인물을 재조명하며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혼을 위해 한 몸 아끼지 않고 먼 땅에서 섬기며 살다 간 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그 흔적이 한국 땅에 남아있으니 그 씨앗이 자라서 계속해서 많은 나무를 자라게 해 거목이 되고 숲을 이루는 일을 이루리라 여긴다.
민경배 박사님의 책 가운데 한 챕터 중에 “타도 타지 않는 숲”이라는 챕터가 등장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한국교회를 비유하여 이러한 챕터명을 쓴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러한 타도 타지 않는 숲처럼 한국교회 성도들을 양성하는 것은 말씀에 기반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후대 사람이긴 하나 뉴스마 선교사와 같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다 돌아간 복음을 맡은 자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이러한 결과를 얻은 것이라 여긴다. 그의 섬김과 헌신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작성일:2019-12-11 15:36:07 210.183.73.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