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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Oilver, Bessie Orena(1888-?, MS)

닉네임
이진주
등록일
2019-12-11 19:47:48
조회수
96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 5반_B076_이진주.hwp (6092288 Byte)
내한선교사/B076/Oilver, Bessie Orena


Ⅰ. 기본사항
1. 이름: Oilver, Bessie Orena / 올리버 / 한국명: 오리부(吳利富)
2. 생몰연도: 1888.9-? 미국 조지아주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12 - 1958
5. 학력: 1905 조지아주립고등학교 졸업
1907 아킨스조오지대학 강습과정 이수
1912 미주리주 스카릿성경학원 수료
1917 텍사스주 남감리회대학 졸업
6. 경력: 1912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춘천선교부 여선교회 사업
1922-25 원산의 루씨여학교 8대 교장
1926-32 루씨여학교 10대 교장 역임
1931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
1932-33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휴양
1933-40 개성에서 지방여선교회 사업 관장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1947-1952 재내한, 태화사회관 제5대 관장으로 활동
1958 대전에서 활약 후, 은퇴하고 귀국

Ⅱ. 선교사 소개: 올리버(Oilver, Bessie Orena, 1888.9-?)
1. 복음을 들고 어디든지 갔던 올리버
24세의 나이에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된 올리버는 한국 여성들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었다. 춘천선교부의 여선교회 사업을 시작으로 루씨여학교, 지방여성교회 사업, 태화사회관 등에서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 복음전파를 위해 평생을 힘썼던 것이다.
올리버가 한국에 와서 섬기게 된 처음 사역은 춘천선교부 여선교회였다. 춘천은 서울에서 독립구역으로 확정된 1904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1905년 춘천의 교세는 교회가 8처, 세례교인 44명, 학습인 65명으로 보고되었는데, 1907년에는 교회 76처, 세례인 202명, 학습인 1,914명으로 불과 2년 만에 5배 이상의 성장을 보였다. 1904년부터 서울을 오가며 사역을 하던 무스는 1908년 9월 가족들과 함께 춘천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무스 부인은 춘천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여인으로서 춘천의 여선교를 체계적으로 세워갔다.
올리버는 1911년 개성으로 옮겨간 무스 부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와 잭슨과 함께 여성선교와 매일학교 사업을 진행해갔다. 여성선교는 기도회, 사경반, 한글반, 교리반으로 매주 오후 정기적 모임을 가졌다. 기도회는 매주 집에서 모여서 기도회 시간을 가졌는데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고, 사경반은 전도부인이나 교회를 위해 일하려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또한 한글을 배우는 한글반과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를 배우는 교리반이 있었다. 그리고 오전에는 여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매일학교가 되었다. 매일학교는 1909년에는 켐벨부인이 보내준 선교기금으로 학교 건물까지 마련되었고, 점차 확장되었다.
특별히 올리버는 전도부인과 더불어 지역 순회를 통하여 가는 곳마다 성경반을 열고 그 후에는 불신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1917년 Korea Mission에서 보고하고 있다. 당시 춘천 지방은 춘천, 가평, 홍천, 양구, 화천 등지를 내포하며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룻길 이상 다녀야 할 정도의 원거리를 가진 지역이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여자의 몸으로 지역을 순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온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이다. 올리버는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당시 교육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을 찾아갔고,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2. 여성 교육의 앞장 선 루씨여학교의 교장 올리버
올리버는 춘천에서 여선교회 사업을 이후 원산으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원산에 있는 루씨여학교의 교장으로 섬기기 위해서였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8대 교장, 1926년부터 1932년까지 10대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거의 10년을 루씨여학교를 위해 섬겼다.
당시 등한시 되어져왔던 여성 교육의 현실 속에서 1903년 여성을 위한 학교인 루씨여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루씨여학교는 원산시 산제동의 초가집에서 15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개교하게 되었고, 초대 교장은 캐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자녀 교육이나 여성 교육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때라 학생 모집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는 올리버가 쓴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때 사람들은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모집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일일이 먹을 것과 옷을 주고 교과서까지 무상으로 공급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학교는 성장했고, 1907년에는 학생수가 70명이 되었다.”

이 보고서 통해 올리버는 루씨여학교의 설립과정부터 자신이 10대 교장으로 역임하던 때까지의 학교 운영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그녀의 보고에 따르면 교실이 협소하여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남감리회 선교부에 건축비를 요청했는데, 미국 북캐롤라이나 여선교회 회장 루시 커닝햄(Lucy Armfield Cuninggim, 1838~1908)은 한국에서 여학교를 위한 건축비를 청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미선교부에 알렸으며, 그 금액을 차용하여 원산으로 직접 보내왔다. 루씨 부부는 그 뒤 은행이자만 지불하다가 별세할 시에 그들의 생명보험료로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았다고 한다. 원래 협소한 한국 가옥이었던 학교는 이 돈으로 4층건물의 양옥의 석조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1913년 사립학교인가를 받을 때 학교 이름을 루씨컨닝김여학교로 정하였다. 루씨부인이 별세이후 고인의 뜻을 따라 많은 기금을 학교로 보내와 1919년에는 부설유치원까지 설립하였다.
1921년에 4년제 고등학교를 설치하였고, 올리버가 교장으로 있던 1925년 봄에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국권상실 후 기독교계 학교의 고등보통학교 승격문제로 논란을 벌이다가 1925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게 되었고, 올리버가 교장으로 있던 1927년에는 학교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1927년 3월에 고등보통학교의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졸업생 15명 중 12명은 교사, 1명은 이화여자 전문학교로, 1명은 이화유치원 사범과에 1명은 경성여자 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각각 진학하였다. 그해 5월에는 North Caroliona Conference에서 $10,000.00을 후원하여 고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기 시작했다. 이는 9월에 완성될 것인데, 이는 현재 고등학교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키는 건물이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숙사의 계획은 아래와 같다. 1927년 등록은 고등학교 145, 초등학교 331, 유치원 80이다. 이는 모두 한국인 여학생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올해 음악부의 등록은 매우 좋다. ... 이렇게 강력한 교수진, 좋은 학생, 부모 연합이 있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기에 학교의 미래는 매우 유망해보인다.”

올리버의 글을 통해서 학교가 세워질 초반과 다르게 원산의 부모들의 인식을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버는 루씨여학교의 시설을 보완하고 다양한 교육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길 원했다. 그래서 루씨여학교의 가사과 실습실, 이화학실험, 지리와 역사 시간 등을 위한 특별실, 표본실, 음악관, 원예 실습지 등을 완비하여 전국적으로 볼 때에도 뛰어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올리버의 제자들인 루씨여학교의 학생들은 교회의 모든 활동에 참여하고 YMCA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 지역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농촌 계몽 운동가이자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강원도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화벽 등 민족의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루씨여학교의 교사였던 이신애는 독립선언서에 여성대표로 서명을 했고, 옥중에서 유관순과 같은 동에 수감되어 독립만세의거 1주년을 옥중에서 맞이해 독립만세를 불러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올리버가 10년동안 교장으로 섬겼던 루씨여학교는 당시 지역에 있는 유일한 여성교육기관으로 기독교여성지도자와 민족운동 지도자를 배출하였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민족교육기관의 구실을 하였다. 루씨여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원산 청년학관 학생 160여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격문 수천 장을 뿌려 60여명의 학생이 붙잡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기의 격화된 황국신민화정책의 강요로 총독부에 의하여 강제로 공립화되었으며, 당시 교직원들은 총사직하였다. 광복 이후 국토분단과 함께 이북에서의 선교활동이 불가능하여짐에 따라 폐교되었다.


3.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올리버
한국 감리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자 목사를 배출한 것은 1931년이었다. 1903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되고,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조직되었던 이듬해, 1931년 6월 10~19일에 제1회 동부·중부·서부 연합연회가 개성북부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6월 14일 목사안수식이 거행되었는데, 특별했던 것은 목사 안수 후보자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15년이상 수고한 여선교사들 14명이 후보가 되었고, 초대 총리사 양주삼의 집례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아래는 한국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14명의 명단으로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올리버였다.

커틀러(M. M. Cutler), 밀러(L. A. Miller),와그너(E. Wagner),마커(J. B. Marker), 스네블리(G. H. Snavely), 헤인즈(E. I. Haynes),쿠퍼(K. Cooper),에드워즈(L. Edwads),틴슬리(H. Tinsley),샤프(H. Scharpff),올리버(B. O. Oliver),헤스(M. I. Hess),베어(B. R. Bair),채핀(A. B. Chaffin)

이들은 모두 미국인들이었지만 한국 감리교회가 배출한 목사였고, 안수를 통해 한국교회의 소속이 되었다. 또한 모두 안수를 받으면서 정회원으로 입회하였기 때문에 남성 목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목회와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미국교회에서도 실시하지 못하고 있던 여성 안수가 실시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한국에서 한국 총리사였던 양주삼이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안수를 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올리버를 비롯한 여성 목사들은 한국에서 15년이상 선교를 위해서 목숨걸고 헌신했던 선교사들이었기에 더욱 값진 안수라고 생각된다.


4. 가정 회복을 위해 힘썼던 올리버
올리버는 1년 정도의 안식년을 가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개성지역으로 가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지방여선교회를 8년동안 섬겼다. The Korea Mission Field 32권에는 1937년 올리버가 보고한 ‘Rural Evangelistic Work’가 실려있다.

“예배있는 모든 마을을 방문하는 대신 더 집중적으로 사역을 하려고 한다. 한 지역에서는 지난 겨울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야학교를 시작했는데, 큰 반대를 만났지만, 당국의 격려가 있었다. 이 마을은 무지한 마을이었고, 그들은 이곳에서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많은 기도자들에게 선생님의 급여를 도움받을 수 있었다. … 많은 아이들과 어린 사람들은 야학교의 출석했고 읽는 것을 배웠다. 한 10살 남자아이는 공부하는 것을 매우 불안해했고, 그의 부모는 학교에 보내길 원치 않았다.”

올리버의 보고처럼 지방에서의 사역은 도시와는 다르게 아직 반대가 많이 있었고, 인식이 변화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올리버는 변함없이 전도부인들과 함께 지역을 순회하고, 야학교를 열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성실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리버는 좋은 소식도 보고하고 있다.

“같은 마을에 있던 한 나이 있는 남학생은 그의 교회에 있는 주니어 선교회 회장인데, 그는 매달마다 야학교에 왔고, 전도여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 몇몇 교회에서는 각성이 일어났고 공동체에 봉사도 생겼다.”

이처럼 올리버는 계속해서 개성지방 곳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열매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올리버는 예배나 성경공부, 야학교뿐만 아니라 가정 사역까지 나아가는 총체적 복음이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음식만들기, 바느질, 통조림 제도, 정원가꾸기 등 가정은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들을 가르쳤다.”

올리버가 보고하고 있는 이 ‘hope chest’라는 주제를 가진 이 프로젝트는 공중보건과 새로운 가정 관리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겨울의 사용할 음식을 보존할 수 있도록 통조림 제조 등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세워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역을 진행하였다. 이때 집에서 이야기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한다. 또한 ‘Homes Day Program’도 계획하였는데, 이는 베드로전서 3:18 말씀에 따라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돕고, 더 나아가 비기독교인들의 가정까지 건강하게 돕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주안점은 가족 예배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올리버의 사역 보고를 보면 단순히 개인의 회심에만 집중하지 않고, 가정이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사회적 책임도 함께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정예배를 주안점으로 두었던 것은 굉장히 앞서있는 모습이자 성경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다.


5. 여선교회의 연합과 섬김의 선봉에 있었던 올리버
1920년에 와서 각 지방에 조직된 여러 여선교회가 연합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12월 6일 대표자 82인(춘천지방 대표 6인, 개성지방 대표 6인, 경성지방 대표 18인, 원산지방 대표 23인)이 경성 종교예배당에 모여 여선교대회를 조직하고 장정과 규칙을 제정하면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여선교대회로써 이때 초대 회장은 최나오미, 부화장은 어윤희, 총무는 마이어스, 회계는 올리버였다. 이들은 남감리회 구역 4개 지방에 전도부인을 한명씩 파송하였고,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 사업에 쓸 명목으로 정기적으로 기금을 모으며 선교준비에 착수했다. 심지어 1922년에는 회장이 직접 시베리아로 파송되어 6년동안 활약하기도 한다. 이후 점차 여선교회 회원의 수가 늘고, 유년사업, 청년사업, 선교사업 등 사업이 확장되면서 임원진도 대폭적으로 늘어난다. 올리버는 성실하게 계속해서 회계를 담당하며 여선교회 사업에 임했다.
이후 감리교회가 합동된 후 두 여선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를 구성하고 1년마다 지방 대표들이 회합하며 대회를 창립했다. 통합 당시 352개 지회에 회원수가 6,757명이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올리버는 안식년 이후 1935년부터 1936년 총무로 역임하였고, 1937년에는 협동 총무로 섬겼다. 특별히 당시 예산 지출 상황을 보면 해외 선교비와 국내 선교비를 합치면 전체 예산의 77.2%를 선교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선교회 회원들이 낸 회비는 거의 전액 국내외 선교비로 사용된 것이다. 이외 대회 운영비와 인쇄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인건비에 해당하는 총무와 회계 비용은 1백원에 그쳤다. 이것은 여선교회 대회 임원들의 무보수, 자원 헌신을 밝혀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올리버와 임원들은 여자 선교사들의 리더로서 헌신적으로 수고해왔다, 또한 이러한 희생과 헌신으로 다른 기관들이 적자에 허덕일 때도 적립금을 증액할 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국내와 해외 선교를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6. 한국 여성들을 너무나 사랑해 다시 돌아온 올리버
올리버는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되어 ‘마리포사호’를 타고 귀국하였다. 한국을 떠나기 너무도 싫었지만,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한국 교회가 더욱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만날 날을 기도하며 어쩔 수 없이 떠났다. 올리버의 몸은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여성들을 향한 마음을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1947년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일제 치하에서 고통당하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태화사회관도 1942년 9월 종로경찰서가 강제로 대여형식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1949년 1월 종로경찰서가 나가고 올리버가 5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독립된 기관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태화사회관을 다시 세워나갔다.
태화사회관 건물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음식점인 명월관으로 의미있는 곳이자 유명한 곳이었다. 이 건물의 주인은 친일내각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완용었는데,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는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 9월 20일 이완용과 20만원(미화 10만 달러)에 매매계약을 체결했고, 여선교사 마이어스(Mary D. Myers)를 태화여자관 초대 관장에 임명하여 1921년 4월 5일에 개관하였다. 이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봉사사업을 여성의 힘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태화사회관은 구령사업과 여성복지사업을 중심으로 진행하였고, 여성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 치하로 선교사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건물까지 점령당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겼던 태화사회관은 올리버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게 되었다. 올리버는 구제사역과 한글반, 영어반, 유치원 사업 등의 교육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재봉, 요리법, 가정경제, 가정장식, 원예, 어린이 양육법, 응급치료법, 간호법 등에 관한 기초지식을 가르쳤다. 또한 아동진료 및 위생 강의, 어린이 무료 욕실 운영으로 보건위생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태화사회관은 어머니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며, 가정 안에 모든 문제들을 진심으로 상담하고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서 실질적인 도움과 영적인 도움을 함께 주었다. 더군다나 일본의 통치와 6.25사변 등 나라의 어려움 속에서 여성들을 교육하고, 여성들의 안식처 구실을 하였다.


7. 교육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던 올리버
1952년 태화사회관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올리버는 대전으로 내려가게 된다. 6. 25전쟁의 폐허 속에서 90여개의 교회가 파손되고 다수의 교역자를 잃은 처지에서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활동을 확대해 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이 일을 추진할 인적 자원의 공급, 특히 농촌교역자의 확보가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4년 3월 16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대한감리회 연합연회에서는 남한의 중앙인 대전에 교역자 양성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회 남부연회에 한 감리교대전신학원의 보고를 보면 1954년의 감리교대전신학원의 첫 출범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작년 연합연회의 결의로 대전에 신학교 전수과를 설치하기로 하고 도익서 목사와 전희철 목사 두 명을 파견하였읍니다. 이것을 설치하기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것을 대전제일교회 내 한 건물을 빌어서 작년 5월 하순에 학생을 모집하여 남학생이 46명, 여학생이 16명, 합 62명으로 개교하였읍니다. 강사로는 이상 2명 외에 도익서 목사 부인과 오리부 목사, 전기완 목사, 남기철 선생, 그 외의 몇 강사들이 계셨고 제2학기부터는 김창일 목사가 오시게 되었읍니다.“

올리버는 6.25전쟁 이후 교역자들을 가르치고 세우기 위해 세워진 감리교 대전신학원의 초대 강사로 섬겼다. 1958년 은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올리버는 한국을 위해서 헌신하며 마지막에는 농촌교회의 교역자를 세우기 위해 교육에 헌신한 것이다. 올리버는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전하고 고치는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은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감리교 대전신학원은 현재 목원대학원의 모체가 되는 학교이다.


8. 나가는 말
올리버는 24세에 나이에 한국에 혼자 와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안식년과 일제에 의한 강제추방의 시간 외 40년을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섬겨왔던 선교사였다. 그는 3.1운동,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한국의 큰 위기 속에서도 꿋꿋히 한국에 머물렀고,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후에도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며, 한국 여성들의 교육과 복지,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은퇴하기 전까지 헌신했다.
특별히 그녀의 삶을 보면 3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는 지방 곳곳을 다니고 순회를 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서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왔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여성 교육을 통해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을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세 번째는 특별히 그녀는 예배와 성경공부 외에 가정 사역, 사회복지 사역, 선교 사역 등에도 힘쓰며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잘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한국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 후 은퇴하였고, 은퇴 후 McRae에서 그녀의 여동생 Mrs. Minnie Lee Johnson과 함께 노년을 보내며, 지역 교회를 섬기다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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