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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한선교사) Thomas Mary 2017210355 박기쁨 (글쓰기)

닉네임
박기쁨
등록일
2019-12-12 12:30:50
조회수
159
들어가는 말

필자의 부모님은 ‘피지’라는 섬나라에 10년째 선교사이시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사의 삶을 간적접으로 체험하는 시간들이 필자에게는 있었다. 선교사로서 본 부모님의 인생은 참으로 따뜻하신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힘드시지만, 그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살아가시기에 자녀로서 도전이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한국에 오시면 꼭 드시는 음식들이 몇가지가 있다. ‘순대’, 그리고 ‘오뎅’.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100년 전에 한국 땅에 들어온 선교사님들 그들로 하여금, 한국이란 땅에서 한국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타지에는 많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파송 되어 있어,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짧은 소논문으로 하여금 한국 땅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모든 선교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많은 선교사님들 중에서 캐나다에서 출생한 ‘도마리아 선교사님’의 약력과 그녀가 활동 당시의 상황과 활동 영역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사항
이름 : Thomas Mary / 도마리아
생물연도 : CP (미상)
출신 및 소속 : 캐나다, 장로교
활동 기간 : 1916-1941

시대적 배경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해는 1898년이다. 일제는 1894년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군사력을 다시 한번도에 주둔시키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3국간섭과 한국인들의 반발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04년 러일전쟁을 일제가 일으키고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러일전쟁의 승리가 확실하게 되자 그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식민지로 전략하게 되었다.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하는데 어려움 중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와 한국인의 사이에서 외국인 제3자로서 선교사들의 지위와 행동은 더욱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활동 내용

1916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리고 함북 성진과 회령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하셨다. 이후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교사도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후 캐나다에서 선교업무를 하였다.

평양 외국인 학교

평양 외국인 학교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로 북부 장로교, 북부 감리교, 남부 장로교, 호주 장로교 및 캐나다 연합 교회를 대표하는 이사회에 의해 운영 되었다. 하지만, 선교를 함에 있어 외국인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보다는 선교사를 개발하기 위해 더욱 많은 훈련을 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수익에 있어서도 불합리화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것의 중요성은 모든 사람과 외국에서 일을 수행하는 선교위원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함북 성진과 회령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선교사업

기독교 선교사들은 여성들 사이에서 일의 중요성을 항상 인색해왔다. 어머니들의 활동이 미래 세대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의 회심과 기독교 소녀들의 훈련은 특별한 목표가 되어야 하였다. 이 정책에 따라 선교사 부인들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성경공부반 및 여성 교육 기관을 가정 의무에 추가했습니다. 해외 복음화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직면했던 대부분의 문제점들은 남성과 함께 공동으로 겪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문제점들은 여성에게 특히 심각한 시련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오히려 남성보다 연약한 여성에게만 적용되기도 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질병과 죽음의 위협으로 고생하였다. 독신 여성들은 출산의 기쁨과 고통을 겪진 않았지만, 그들 역시 남성 선교사들이 겪지 않았던 독특한 문제점에 직면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성들이 절실히 체험해야 했던 또 하나의 시련은 외로움이었다.

나가는 말

도마리아 선교사님을 포함한 많은 선교사님들이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 그들의 독립운동을 포함한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우리나라의 복음화의 근대화를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게 된다. 또한 선교사로서 타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의료 선교사, 목회 선교사, 교육 선교사 등으로 헌신 하는 모습을 보며, 글을 쓰고, 정보를 찾는 필자로서 도전의식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된다.

교수님, Thomas Mary 관련하여, 자료가 거의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하여서 여러 사이트를 비롯한 책들을 찾아 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많이 찾지 못한 부분에 대해 죄송합니다. 남편 및 가족 관련하여서도 자료가 나오지 않으며, 결혼에 대해서도 언급이 전혀 되었는지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Thomas M, T mary, 토마스 매리 캐나다투코리아 등 나오지 않았습니다.
작성일:2019-12-12 12:30:50 220.117.20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