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자유게시판

제목

3학년 5반/김범상/2017210275/내한선교사 조사보고서/글쓰기

닉네임
김범상
등록일
2019-12-12 12:43:51
조회수
173
Ⅰ. 선교사 인적사항
1) 이름 : 영문 : Price Roy (프라이스 로이); 음역 : 필아수(畢雅秀)
2) 생몰연도 : 1896년 ~ ?
3) 연표
: 1926년 본국에서 집사목사 안수
1927년 부인과 함께 입국 및 강원도 춘천 파송 동년 장로목사 안수
1928년 철원에서 사역
1931년 휴양을 목적으로 귀국, 동년 원산에 부임
1933년 귀국
4) 사역기간 : 1927~1933년 (1931년 휴양 차 귀국)
5) 가족 : Mrs, Roy (부인)
6) 소속 : 미남감리회


Ⅱ. 선교사 소개
1. 배경
프라이스 로이 선교사는 미남감리교 선교사로서 강원도 지역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첫 사역지는 강원도 춘천이었고, 이어서 철원과 원산에서 사역하였다. 프라이스 부부 선교사가 강원도에서 사역하게 된 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바탕으로 장감연합공회에서 지정된 선교지 분할 정책으로 인해서이다.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미남감리교는 경기도에 한양과 개성, 강원도의 춘천과 철원, 양구, 이천, 지경대, 함경남도의 원산과 회양, 안변, 용동을 선교지로 분할 받아 사역하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 내에 있는 4개의 장로교단과 2개의 감리교단 간에 선교경쟁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다른 교단들이 선교지를 분할받아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서 프라이스 부부 선교사는 미남감리교에 소속되어있기 때문에 첫 사역지로 강원도 춘천에서 시작하여 철원에서 사역하였고, 휴양 차 귀국한 뒤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1년간 선교사역을 하고 귀국한 것이다.


2. 선교사역
프라이스 로이 선교사는 1926년 미국에서 남감리교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고 1927년 한국에 아내와 함께 입국하였고, 그 해에 조선매년회에서 에인스워드 감독으로부터 장로목사로 안수 받았다.
그 후에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남감리교의 선교지인 춘천에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의 사역은 한국어 습득훈련과 함께 지방 전도사역으로 선교사역을 진행하였다.
1년 후에는 철원으로 지역을 옮겨서 철원에서만 2년 동안 사역하였다.
1931년에는 휴양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휴양을 마친 후에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입국 후에 함경남도 원산으로 귀환하여 1년 동안 사역을 하였다. 주된 사역은 지방 전도대 일원으로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역을 하였고, 부인공중위생사업을 함께 전개하다가 남편과 함께 1933년 귀국하였다.

프라이스 로이 선교사 부부의 자료가 많지 않다. 그리고 사역한 시기도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추정하면 선교사 부부가 입국한 시기가 1927년부터 1933년까지였는데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 땅에 극심해지고 있을 때였다. 그러기에 도중 철수했던 시기가 일제의 식민지배 때문은 아닐까 판단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 이후 1919년까지의 무단통치로 식민통치를 시작하였고,
3.1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은 문화통치로 정책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여전히 식민통치는 계속되었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들의 반일감정은 3.1운동 이후 일본의 계속된 식민정책에서 기독교 박해와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였다.
그리고 프라이스 선교사 부부가 사역을 하고 있을 당시는 이러한 일본의 식민통치가 확장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프라이스 선교사 부부가 본국으로의 철수가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인한 추방 또는 자진 철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작성일:2019-12-12 12:43:51 182.211.24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