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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B057/Mcquie, Miss ada E.

닉네임
신영경
등록일
2019-12-12 13:42:30
조회수
83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5_ B057 _신영경.hwp (430080 Byte)
Ⅰ.기본사항
1.이름: McQuie, Ada E. 한국이름: 귀애다
2.생년월일: 1890-?
3.출신 및 소속: 미 감리회 소속
4.내한일: 1922년 독신으로 내한함.
5.경력: 1922-25년 평북 영변 숭덕여자중학교
1926-33년 공주 영명여학교 교장
1932년 중부 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
1933-추방 때 까지 평양 정의여자고등 보통학교 교장 역임
1922-1948년까지 활동


Ⅱ.선교사소개
미 감리회 여선교사, 목사, 한국명 귀애다. 독신으로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922년 내한하였다. 또한 그녀가 속해했던 북감리 여선교의 시작에 대해서 알아보자.
북감리 여선교회의 시작: 북감리파의 여선교회는 그 기원이 1902년 조직된 “보호여회”였다. 서울의 이화학당 교장 룰루 E. 푸라이는 “보호여회”라는 이름으로 여선교회에 대한 하나의 계몽클럽을 조직하여 선교라기 보다는 회집 때마다 푼푼이 모은 회비로 크리스마스 때면 빈민굴을 찾아 구제하는 일과 수해를 당한 동포를 구제하고 병자를 방문하는 일로 훈련을 시키며 가정방문 전도를 장려했던 것이다. 1908년에는 평양에서 “노오블”(Mrs. W. A. Noble)부인이 서울의 정동교회와 같은 이름으로 “보호여회”를 남산현 교회에서 여선교회 계몽을 위한 클럽으로 조직하였고 1912년에는 이화학당 안에 청년 여선교회가 비로소 조직되었고 평양에서는 “모리스”부인 집에서 “공주회”라는 이름으로 청년선교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귀애다 선교사가 속해있던 북감리회에서는 여성교육에 대한 확실한 관점이 들어 가있다.
“그 옆에서는 여선교사들이 역시 여학교를 세우는 현상은 당시에는 아주 일반적인 추세였다. 여학교 설립은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사회참여, 여성해방 및 여성자원의 개발, 남녀평등, 여성 인격의 존중을 서서히 이 땅에 구축하고 구래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데 정초적인 역할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영변 지방의 유치원 사업
1924년까지만 해도 영변지방에는 단 한 개의 유치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영번시였다. 처음 이것은 이 시에 있는 사업과에서 시작하였다. 많은 군중들이 문에 몰려 들어 난생 처음으로 어린아이들이 노는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였다. 유치원이 시작되자마라 각 가정에서는 너도 나도 하며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혜택을 입고자 하였다. 학생 현황을 보면 40명 중 남자가 대부분이고 여자는 겨우6-8명이었다. 여자가 이렇게 적은 까닭은 당시만 해도 유치원에 가려면 반드시 형제 중 오빠나 남동생이 함께 가지 않으면 함께 가지 않으면 홀로는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신창에서도 유치원의 설립을 원하는 교회원들끼리 기금을 물고 기타 재료를 구입하여 유치원을 세웠다. 이 사업을 위해서 Miss Ada Mcquie가 주관했다. 문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선생이나 진급자는 두지 못하는 형편이다. 1926년 제2회에서는 영변 유치원은 졸업생 22명을 배출하였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한 설비를 갖추느냐의 문제가 있었다. 해결을 위해서 1929년에는 그곳 남자 고등학교 공예부로부터 정글 사닥다리와 시소를 기증하여 많은 도움을 얻었고, 또한 모자회가 있어 매년 유치원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하여줌으로써 차츰 해결을 보았다. 처음 이 지방에는 3개의 유치원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2개가 생겨 다섯으로 늘어났다. 영번, 신창, 태천, 구창, 북천, 태천이다. 나중에 다시 또 하나가 생겨 지방에는 생긴 유치원은 모두 6개가 되었다. 유치원이 당시 끼친 효과는 대단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동의 완전한 발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 중요성을 대단치 않게 취급하였다. 아무데서나 아동을 학대하였으며 개같이 취급하거나 아니면 종과 같이 다루는 무조건 아이는 어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만을 유일한 가훈으로 여겼다. 말하지만 어른 중심의 또는 가장중심의 사회였다. 어린이의 인격, 심리, 정상적인 지능의 계발, 소질 등은 전혀 무시된 체 방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입과 더불어 이런 관념과 관습은 시정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감리교회는 특히 남북을 막론하고 사회 헌장을 만들어 아동의 완전한 발달을 주장하고, 특히 교육과 체육을 이에 상응토록 했고, 제4조에서는 지금까지 가정에서 아동을 혹사하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아동의 노동을 폐지하는 것을 주장하고 교회마다 강조하였다. 유치원을 세워 사회와 부모들에게 아동의 완전한 발달과 교육에의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아동교육과 발달에 대한 인식은 처음부터 선교사들이 교회 안에 유치원을 둠으로서 비롯된 것이다. 이점은 한국 아동교육의 공로이며, 선구자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또 하나 유치원이 세워지면서 주민과 교회를 연결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보다 더 교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기여했으며, 동시에 교회가 주민들로부터 더 받은 오해를 해소하고 지역 사업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유치원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이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주지키시고 자녀의 교육이 현대 가정과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시키는 좋은 기여를 했다.

(2)공주영명여학교
공주영명여학교를 소개가 필요하다. 1905년 가을에 영명여학교를 샤프 목사 부인인 사애리시 여사가 설립하였고, 이듬해(1906년) 남편이 선교지인 공주에서 별세하게 되자 단신으로 교육사업에 더욱 힘써 논산에 영화여학교, 강경에 만동여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 1906년 이후 서 원보 목사의 부인 서사덕 여사가 교장이 되었으며, 1915년에는 고등학교의 인가를 받았고, 다음해(1916년)는 신축교사(벽돌 양옥)로 이전하여 가사과에서는 내외국 요리법을 가르켜 빵을 직접 만들어 판매부를 통해 공주 읍내의 각 관공서를 비롯하여, 다른 학교 수요자들에게 배달 판매하였다. 그 이익금으로 근로 장학생들 10여명을 보조하여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또한 서양의 과자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고, 직물 기계를 구입 설치하여 학과에 넣어 학생들에게 편물 자수까지 가르치는 특별계획으로 많은 현모양처와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멀지 않는 장래에 선교부 관리에서 벗어나 한국인 지도자만으로도 훌륭한 교육사업이 기대된다.”고 말하고 있다. 공주는 영명여학교와 영명 중, 고등학교(남학교)가 따로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감리교에서는 공주의 교육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로 인해서 감리교는 공주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교육을 듣게 되었으며, 남학생들은 총 611명의 재학생들 중에서 440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66%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작성일:2019-12-12 13:42:30 211.181.17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