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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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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B111 / Scott, Kenneth M. (1916- , NP) /Scott, Anna Bicksler

닉네임
강성웅(3-6반)
등록일
2019-12-12 14:32:10
조회수
86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11_강성웅.hwp (749568 Byte)
스코트 선교사 부부 / Scott, Kenneth M. (1916- , NP) /Scott, Anna Bicksler

I. 기본사항

1. 이름: Scott, Kenneth M. / 스코트 / 한국명: 사미화
2. 생몰연도: 1916- 중국주재 선교사의 아들로 중국 산동성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53-1963.7
5. 연표:
1953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1953-57 대구동산병원에서 마펫의 공석으로 대리원장 봉직
무의촌 의료진료, 순회전도, 계몽운동에 헌신
1954 대구 계명대학 재단법인이사, 대구나병원사업 겸직
1956-58 세브란스의대 이사, 연희대학교 이사
1958.8-63 서울선교부로 전임, 세브란스병원 의사, 의대교수
부인은 세브란스 소아재활원 일,
1960-63 캐나다장로교 선교사 스트리더(Ernest B. Struthers)가 감독해 온 세계기독교
봉사회 한국위원회 결핵예방사업에 헌신
1963.7 한국에서 퇴임, 인도 루디아나브라운기념기독병원 원장 및 의과대학 학장으로 파송

6. 가족사항: Scott, Anna Bicksler(부인)과 2남 1녀


II. 선교사 소개:스코트 선교사 부부
Scott, Kenneth M. (1916- , NP) /Scott, Anna Bicksler

1. 스코트 선교사의 출생 및 성장과정/한국입국과정(1916-1957)

케네스 스콧(Scott, Kenneth M. 1916-?, 한국명 사미화) 의료선교사는 중국 칭타오에서 선교사 부부의 자녀로 태어났다. 중국 칭타오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그는 펜실베니아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에는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병원에서 인턴을 했다. 1942년 인턴을 마치고 미국 군의관으로 입대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과 버마 등지에서 근무했다. 전쟁 중에 외과에 흥미를 느낀 그는 이후 펜실베니아 의대 부속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수련을 받았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북장로교선교사로 지원하였다. 1952년 10월, 스코트는 일본 도교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익힌 후, 그 이듬해인 1953.9월에 한국에 도착한다. 당시 대구동산병원장이었던 마펫(Howard F. Moffett; 마포화열)이 6.25 사변으로 귀국하고 원장자리가 공석중이었는데, 그 자리를 스코트 선교사는 대리원장으로 취임하여 1957년까지 근속하게 된다.


2. 스코트 선교사의 활발한 의료선교활동 (1차, 대구, 1954-1957)

대구동산병원장으로 취임한 스코트 선교사는 비록 약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무의촌 무료진료와 순회전도를 통해 당시 6.25 직후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영과 육의 치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또한 계몽운동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1954년 한 해 동안에 만도 무려 1,100명(어린이 34명 포함)을 돌봤으며 그중 744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세례 받은 자가 358명에 달했다. 또한 이 해(1954)부터 그는 대구 계명대학 재단법인이사 및 대구나병원사업 일을 겸직하였다.


3. 스코트 선교사 부부의 활발한 의료선교활동 (2차, 서울, 1958-1963)

첫 5년의 임기를 대구에서 마친 스코트 선교사는 1958년 8월, 대구선교부에서 서울선교부로 전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의사와 의과대학 교수로서 봉직하게 된다. 당시 세브란스의 외과는 민광식 교수가 주임교수로 있었으며,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파트는 주임교수인 민광식 교수의 파트였고, 다른 파트는 홍필훈 교수의 파트였다. 스코트 선교사는 홍필훈 교수의 파트였는데, 당시 직위상 홍교수는 조교수였고, 스코트 선교사는 정교수였다. 그리고 나이도 스코트 선교사가 5살 더 많았다. 그러나 스코트 선교사는 이러한 외적인 면들에 구애받지 않고 홍필훈 교수가 자신보다 뛰어난 외과의사이면서 행정가, 교육자임을 이유로 들어 파트의 책임자 자리를 홍필훈 교수에게 양보했다. 이 대목에서 스코트 선교사의 겸손한 인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외과의사로서 스코트 선교사는 여러 종류의 수술을 진행했다. 홍필훈 교수와 함께 심장과 폐 수술을 하기도 했으나, 본인은 주로 언청이 수술이나 화상 후유증으로 수축딘 피부를 재건하는 성형외과 수술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환자들의 병든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료하며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자면, 당시 치료를 받으러 온 시골 출신의 양남희라는 부인과 관련된 일화이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관으로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다. 하지만 이 부인 또한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어서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본 부인을 독살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독살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어느 날 남편은 부인을 외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추락사를 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했는데, 달아나는 부인을 향해 그는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그녀를 쏘았다. 그리고 총에 맞아 괴로워하며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부인에게 준비해간 휘발유를 얼굴에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달아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감사하게도 이 험한 일을 당하고도 부인은 목숨을 건졌고, 남편은 붙잡혀 투옥된다. 대신 부인은 얼굴과 목, 그리고 손에 심한 화상을 입고 수축이 일어나 입과 얼굴이 가슴에 유착되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갈 정도로 흉한 외모가 된 것이다. 몇 달 후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코트 선교사를 찾아오게 된다. 스코트 선교사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통해 그녀의 흉한 외모를 개선시킨다. 그런데 이 과정 가운데서 그녀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큰 상처를 입은 그녀의 마음까지도 치료를 받게 된다. 바로 스코트 선교사가 전한 복음을 그녀는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치료를 마친 후 그녀는 투옥된 남편을 찾아가 이제 당신을 용서한다는 말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스코트 선교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는 유명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부인인 안나 스코트 여사(Scott Anna Bicksler)는 1954년 내한하여 남편의 의료선교활동에 함께 동참한다. 특별히 그녀는 세브란스 소아재활원 일에 헌신하였다. 재활의학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상태였다. 전쟁 이후 소아마비 환자들이 급증해 이들에 대한 치료가 시급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기독교봉사회의 재정지원으로 1954년 11월 19일에 세브란스 병원에 처음으로 소아마비 진료소가 개설되었으며,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을 받아 1958년에 새로 이전하는 신촌 캠퍼스 안에서 소아재활원(Crippled Children’s Center)을 신축하여 1959년 10월 1일 문을 열게 되었다. 소아재활원의 책임은 바로 스코트 선교사의 부인인 안나 스코트(Anna Scott)가 맡았다. 소아재활원의 설립 이전에는 소아마비로 지체가 불편해진 아이들을 위한 물리치료나 재활치료 프로그램이 없었다. 소아재활원에는 4-12세 사이의 어린이들이 약 40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소아마비 환자들이었으나 화상 후유증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은 어린이들도 입원해 있었다.
소아재활원에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있었다. ‘세브란스 소아재활원 부속초등학교’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은 이 학교는 한국 유일의 재활원 학교였다. 155평의 건물 안에 입원숙소, 물리치료실 및 운동실, 학교 교실, 특수 예능교실, 식당, 놀이터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소아재활원에 입원한 아이들 가운데 학령미달의 어린이를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이 학교에 다녔으며, 1964년의 경우는 모두 17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모두 두 분이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자원 봉사의 형태로 이들을 돌보았다.
이 학교는 소아재활원의 독자 예산과 외부의 보조금, 그리고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로 운영되었다. 안나 선교사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간호사, 교사, 요리사와 다른 유지 인력들을 직접 고용했다. 비록 여러 종류의 보조기를 착용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기는 했으나, 활기찬 어린이들로 가득한 소아재활원은 금세 유명해졌다. 그래서 서울을 방문하는 국제적인 명사들이 흔히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소아재활원을 이렇게 발전시킨 안나 선교사는 1962년 5월 5일, 제 40회 어린이날을 맞아 올해의 어머니 세 명 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 외국인 여성이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4. 이후의 행보 (1963.7-)

이처럼 1953년부터 한국에서 활발한 의료선교활동을 펼쳐온 스코트 선교사 부부는, 1960년 캐나다장로교 선교사 스트러더(Ernest B. Struthers)가 감독해 오던 세계기독교 봉사회 한국위원회의 사업 중, 결핵예방사업의 감독을 위임 맡아 1963년 까지 지휘하게 된다.
환자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약은 기본적으로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적은 액수나마 진료비를 환자들에게 받았다. 또한 화학요법과 더불어 외과적인 수술이 가능한 환자들에 대해서는 폐절제 수술도 시행했는데, 주로 스코트 선교사가 담당했다. 수술을 위해서는 충분한 입원실의 확보가 필요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았다. 다행히 입원실 부족의 문제는 미8군 기념 흉곽병원의 건립으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식량이 부족할 정도의 극빈자들에게는 식량도 제공해주었고, 또 좁은 집에 결핵환자가 있을 경우 나머지 가족들, 특히 감염에 쉽게 노출된 어린 아이들과 환자가 따로 분리되어 있을 수 있도록 가설구조물도 제공해주었다.
이는 단순히 약물에 의한 치료만이 아니라 환자의 환경을 함께 고려하는 섬세한 프로그램 덕분에 결핵환자 관리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러한 성과가 널리 알려져서 1958년 스트러더가 세브란스를 떠난 후에도 이 사업을 계속 맡아서 진행한 스코트 선교사는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결핵관리 프로그램의 자문관으로 초빙되었다. 스코트 선교사는 세브란스가 진행해온 결핵관리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효율적이고도 경제적인 것으로 판명된 이 통원 프로그램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현명하고 과묵한 캐나다 의사 닥터 어니스트 스트러더의 지도력과 비전 덕분이었다. 그러나 더욱 큰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役事)였다. 때가 무르익었고 한국인들이 이를 수용할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트 선교사와 그의 가족은 1963년 7월 한국에서 퇴임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즉시 인도의 루디아나브라운기독병원 원장 및 의과대학 학장으로 파송 받으며 한국에서부터 이어온 의료선교를 인도에서 이어나가는 행보를 보인다. 이후 그는 자신의 선교사역을 회고하는 자서전인 『Around the World in Eighty Years』1998년에 출간한다.
작성일:2019-12-12 14:32:10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