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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Widdowson, Chris W.(1896-1978, SA) / Widdowson, C. W.(?-1956, SA) 508

닉네임
허윤
등록일
2019-12-12 16:32:05
조회수
959
첨부파일
 Widdowson, Chris W.(1896-1978, SA) : Widdowson, C. W.(?-1956, SA) 508_3학년6반_B153번_허윤.hwp (1668096 Byte)
1.기본사항
남편
Widdowson, Chris W(위도슨/ 魏道善/ 남아프리카공화국 /SA)
1.생몰연도:1896.10.17.-1978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출생
2.학력:1913 옵서베트리고등학교 졸업
1923 구세군 사관학교 졸업
3.경력:1926.11 내한하여 후생학원에서 봉직, 후생학원장 역임
고아들의 미국 입양사업
1934.2 귀국하여 활동
1953.1.29. 재내한, 구세군 사령관으로 재건과 복구 사업
<구세공보>, <구세군가>등 복간, 기독교서적 출간
1956.5.10. 부인 소천
1957.10.29. 인도네시아사령관으로 전임, 기아구제에 헌신
4.가족사항:Widdowson, C. W.(매리골)(부인,?-1956.5.10.)
5.논저:[논문] salvation Army and the destitute Boys of Korea KMF 1918.3.
[저서] 구세군기원과 발저; 구세군문답; 구세군가; 성서요강; 사관군률; 구세군 교리
6.참고문헌: 기백13권; 한국구세군사, 1975; 구세군신문; 구세공보; 기독공보; 주의 인도하심따라 , 1957; 만국사관잡지


2.선교사 소개

남편
1896년 출생 1978 사망으로서 구세군 사령관, 한국명 위도선(魏道善)이라고 불림 그는 1896년 10월 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출생하여 1913년 옵세배트리고등학교를 거쳐 1923년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에 임관되어 군영을 담임하게 된다. 1926년 11월 한국 선교사관으로 파송되어 후생학원에서 봉직하면서 그보다 먼저 선교사로 내한해 있던 남아군국 출신 매리골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본영 후생 학원장으로 취임하여 원아들의 훈육 및 악대 편성에 주력하면서 고아들의 미국 입양도 도왔다. 그는 뒤에 이리 기독영아원을 운영한 최승유 사관과 동역, 1933년까지 이 사업에 근속하다가 일본 코오베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남아프리카 남자육아원장(1934-42), 켄임의 총무서기관(1942-48), 남아프리카 사회사업 및 자산부 서기관(1948-52)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10월 전후의 한국 구세군을 복구시키는 임무를 띠고 서리사령관에 임명되어 이듬해 1월 재내한, 부산 범일동 본영 2층에 주거지를 정하고 구세군 재건과 복구에 동분서주하였으며 이때 사령관으로 승진되어 활동하다가 1957년 10월 29일 인도네시아사령관으로 전임했다. 그는 재내한 5년동안 54명의 신임사관 및 11명의 복직사관을 배출시켰고 충서*경동지방 신설, 영등포*광주*부산2영*대구2영 등 19개 영의 설립, 부산*안동 등 18개 영을 신축하였으며 구세군 22,241명이 증가되었다. 또한 사회사업으로 군산후생학원, 서울양로원등 6개 기관을 신설하는 한편 영동병원을 확장하는 등 100만명 구제운동의 일환으로 극빈자 구호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구세공보>, <구세군가> 등을 복간시켰으며 <예수의 시대>, <음주의 해독>, <뿌드전>, <성서요강> 등 20여종의 기독교 서적을 출간시켰고 기독교 세계봉사회, 기독교 아동복리회, 의원단체협의회(CAVA), CARE단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56년 5월 아내를 여의고 양화진에 묘비를 마련하였던 그는 한국을 떠나 65세로 정년퇴임한 후에도 인도 등에 원정하여 악스포드 기아민구제회 일에 힘썼다.
[논문] Salvation Army and the destitute Boys of Korea, KMF, 1918, 3 이 있으며
참고문헌-구세신문; 구세공보; 기독공보; 한국구세군사 ; 주의 인도하심따라, 1957; 만국사관잡지 를 참고 할 수 있다.

아내
마리 위더슨(Mary. A. Widdiwson 1898-1956) 한국명 위도선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한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에서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1926년 한국 선교에 마음을 품은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약혼하였다. 그녀는 1926년 11월 먼저 내한한 크리스위더슨을 따라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변두리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 이라는 성경 말씀을 쫒아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로 인해 항상 전염병에 노출 되었고 위더슨 부부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던 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도 얻고 몇일 간 의식도 잃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7년간 봉사하다가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고 1934년 2월 한국을 떠났다가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 하면 어찌하려느냐?”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1953년 1월 19일 7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왔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전쟁의 페허 속에서 이들 부부는 구세군을 다시 제정비하고 부흥시켰다. 마리 위더슨은 구세군 한국사령관으로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남편을 내조하며 고아원장과 가정단총제로 헌신하였으며 특별히 위암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성탄절에는 자선냄비 모금에 적극 참여하고 거리로나가 전도하며 동료들을 격려하는 등 열정을 불태우다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 무한한 기쁨입니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해는 1956년 5월 10일 양화진 제 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1956년 9월 17일 건립되었고 묘비에는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 라고 새겨져 있다. 그의 남편은 위더슨은 사랑하는 부인을 양화진에 인장하고 묘지 옆에 두 그루의 단품나무를 심은 뒤 1957년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2-1 사역

제 9대 사령관 정령 위도선(Colonel C. W. Widdowson.1953-1957, 영국)은 재건시대의 지도자였으며 경험이 많고 유능한 사관 이였다. 그는 견고하고 확고한 방식으로 재선의 어려운 문제와 자산의 복구와 사관의 현역복귀와 사기진작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지나치게 확장시킴으로 생기는 우려 때문에 신중하게 진행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국제적인 관심이 결국은 다른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중에 지원 받지 못했던 것을 시작하는 프로그램들에 대한 신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1953년 이전에 허가 없이 시작하였던 몇 개의 고아원을 통합 정리하였고, 새로운 시설을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하였다. 심지어 영문담임사관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영문소유지에 그것들을 운영하려고 하는 경우까지도 거절하였다. 하지만 고아들과 미망인들, 맹인들, 불구자들은 머지않아 기독교 아동기금, 월드비전, 아동보호기구, 국제구호협회, 기독교세계봉사회 등 조직들로부터 큰 지원을 예상하였던 그는 구세군의 사회복지활동기반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1972년 구세군은 단지 13개의 신설, 3개의 학교, 6개의 유치원이 보고 되었다. 위도선 사령관은 한국인들의 사기가 아주 높은 것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관들은 구세군을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구세군이란 이름과 사회적 위치를 선망하고 있다. 그리고 사관의 능력에 맞게 적당한 균형이 이루어질 것을 원하고 있다.” (1954.1.7.) 한국교회는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배로 성장하였으며 전쟁과 수난 고통을 겪으며 부흥하였다. 구세군 역시 위도선 사령관의 확고한 지휘 아래 성장의 보조를 유지 하였고 1950년부터 1960년의 10년 동안에 구세군의 병사가 3.580명에서 10.311명으로, 시설인원은 11.055명에서 50.470명으로 그리고 영문은 57개에서 101개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1953년 새해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2월 4일 오후 1시 부산 보수동 2가 80번지 해군장교구락부 (LCI)에서 신임 한국 구세군 사령관서리 위도선 정령의 환영식을 한국 기독교 연합회 주최로 있었다. 당시 위도선 사령관의 한국 임명은 부산에 피난 가 있는 한국 기독교 교역자들에게 새 힘을 일으키는 기회가 되었다. 1953년 3월 전재 중에 정간되었던 구세 공보가 속간되었고, 5월에는 포로로 끌려가 소식을 몰랐던 로오도 사령관에 대한 소식이 들려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두 명의 한국 사관들은 여전히 실종상태였고 부산의 임시 본영에는 빠른 시일 내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였다. 새로운 군국지도자들의 도착으로 말미암아 사관들의 심기일전하여 어려움에 처해있던 구원사역과 사회사업시설운영 재개를 위해 활발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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