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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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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B095/Ray, Rex(1885-1958) & Ray, Janet Gilman(생몰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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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반 조경택
등록일
2019-12-12 17:37:14
조회수
118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3-5 B095 조경택.hwp (145408 Byte)
렉스 레이 선교사 / Rex Ray (1885-1958) & 그의 아내 Jenet Gilman Ray(생몰연도 미상)



I. 기본사항

1. 이름 : Ray, Rex / 레이
2. 생몰 연도 : 1885.11.11.-1958.*.*.
3. 학력 : 길러 상과대학 입학
데카투어 침례신학대학
텍사스의 바일로대학교에서 수학
4. 선교사직 소속 : 미국 남침례회
5. 한국 선교 기간 : 1951-1956
6. 연표
1885.11.11. 미국 텍사주에서 J. Gilman의 아들로 출생.
1919. 미국 남침례교 외국선교부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아내(Jenet)과 함께 중국 광서성(廣 西省)으로 파송 받음.
1941. 중국 공산화로 미국으로 귀국.
1951.12.21. 한국 선교사로 다시 파송되어, 부산에 도착. 이후 전도 및 구호활동.
1953. 아들 Daniel Brooks 부부도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옴.
1956. 여름. 귀국.
1958. 소천.
7. 가족 사항
부인 : Ray, Jenet Gilman(*생몰일시 미상)
아들 : Ray, Daniel Brooks (1923.12.25.-2011.8.3.) 및 그의 아내 Frances Deal Ray
David F. Ray
딸 : Mary Dee Dobson
Lois McKenzie



II. 선교사 소개

1. 선교사 파송 전(前) 생애

: *한국 전쟁 당시 어간에 난민구제전도사역에 대활약을 펼친 렉스 레이 선교사는, 1885년 11월 11일 미국 텍사주에서 J. Gilman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목장에서 카우보이로 일했다[-참고로, 이런 카우보이의 경력은, 그가 후에 중국과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한 이후 고향에서 말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자서전, 『Cowboy missionary in Kwangsi』(1964)의 책 제목으로도 이어졌다]. 이후 길러상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침례회의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데카투어 침례신학대학에서 수학했으며, 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중국 선교사가 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후, 텍사스의 바일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미국 군목으로 복무하였다.


2. 선교사 파송 후(後) 생애와 사역

: *레이 선교사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1919년 미국 남침례교 외국선교부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 광서성에 부인(Jenet)과 함께 중국에 도착, 약 30년간 중국 남부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자, 불가피 1941년, 중국에서의 선교사 활동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레이 선교사가 속해 있던 미국의 남침례회는, 1949년 한국의 동아기독교(→*그 해 총회를 통해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개칭)로부터 보냄을 받아 도미(渡美) 방문한 우태호의 호소와 부탁으로, 한국의 동아기독교와 한국 민생들의 영적 • 육적 궁핍함을 접하게 된다. 이에, 한국에 대한 실상 조사 차, 1950년 초,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존 애버네티(1896-1973,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냉전 속으로 휘말리는 세계정국 가운데, 한반도에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나요한 선교사는 일시 필리핀에 가 있게 된다. 이후 1951년 3월에 다시 입국, 부산에서 본격적인 남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6.25의 참상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었다! 337만의 사상자, 수많은 고아와 과부, 굶주림과 헐벗음과 질병 등 한국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나요한 선교사는 이에 미국 남침례회 산하 침례교회들에게 구제 후원을 호소, 요청하였는데, 이에 미국 남침례교 교인들이 대거 동참해, 결국 많은 한국민들이 남침례회에서 보내준 구호 물품과 의료적, 물질적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때 미국 남침례회 성도들이 얼마나 한국민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는, 당시 텍사스주 어느 시골 마을의 한 침례교회 여전도회장이 미 남침례교 해외선교부 총재에게 보낸, 다음의 한 엽서에서 충분히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회장님, 지금 한국에서 전쟁이 터져서 많은 피난민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골교회 여전도회에서 옷이랑 통조림이랑 신발이랑 각종 구호품을 수집해 놓았는데요, 그것들을 어떻게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요? 그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당시 재원뿐 아니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요한 선교사가 선교지의 형편을 상세히 본국 선교부에 보고하자, 미 남침례회 해외선교부는 한국의 절박한 상황을 더욱 실감있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선교사들을 더 모집, 파송하게 된다. 그 첫 타로 한국에 온 선교사가 곧 렉스 레이 선교사이다. 1951년 12월 21일, 그는, 그의 아내 제닛을 비롯, 요컴(Dr. Yocum) 의사, 브라이언(Dr. Bryan) 의사, 두 명의 간호사와 더불어, 한국(부산)에 도착하였다.

레이를 비롯 이들 선교사들은, 먼저, 당시 미 남침례회 해외 선교부 산하 동양지역 담당 총무인 코든(Baker J. Cauthen)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국 침례교인들과의 장기적인 관계를 위해, 1952년 1월에 한국침례교선교부(Korea Baptist Mission)을 조직하였다. 의장엔 렉스 레이, 회계엔 나요한 선교사가 선정되었다. 이 선교부 설립을 계기로 이후 많은 미 남침례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 시작한다.

요컴과 브라이언은 곧바로 부산 충무로에 진료소를 차려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반면, 레이는 복음 전파와 더불어 특히 난민구호사업에 집중하였다. 여러 구호품들로 구호하되, 특히 옷을 나누는 일을 많이 하였다. 참고로, 당시 한국에서 남침례교의 구호사업은 대단하였다. 1951년 4월부터 시작된 남침례교의 구호사업은, 1952년에 이르는 동안 무려 10만 불($)에 해당하는 식량, 의류, 구호품을 한국(교회)에 투입했으며, 그 외에도 사적인 경로를 통하여 수천 불($)의 구호물자와 금품이 미 남침례교회로부터 한국에 플로잉(flowing)되었다.

레이는 구호품을 실은 차를 몰고 각 교회를 순회하며 구호 및 전도 사업을 하였다. 사역 초기인 1952년 봄, 레이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의 내면을 조금 엿볼 수 있다. “헐벗고 추위에 떠는 그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기 위해 우리의 차는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높고 낮은 길을 달립니다. 우리가 협곡의 꾸불꾸불한 길을 내려다볼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형제들의 기도로 이 여행은 안전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그렇게 지프 차와 트레일러에 옷을 한가득 싣고 산골이나 외진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더불어 복음을 전하였다. 예를 들면, 산꼭대기에 있는 태성 마을이라는 곳에서 93명의 사람들에게 옷을 주며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한국의 중부지역에 있는 어느 마을에서는 217명의 회심자들을 얻기도 하였다. 1953년 한 해 동안 20톤이 넘는 구제 의류들이 전국에 있는 최고로 가난한 지역들에 배포되었다. 1954년 5월부터는 레이의 아들인 다니엘 레이(Daniel Ray)가 옷을 나누어주는 사업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런 구호 및 의료 전도 활동에 힘입어, 1951년 남한에 약 50개 정도 있었던 침례교회는, 1952년 말에는 134개, 1954년엔 144개로 그 교회 및 예배 처소가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브라이언과 요컴 등은 부산 충무로에 있던 진료소를 영도로 이전 확장하여 구호 병원[→*(왈레스기념) 침례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레이는, 아들에게 의류 나눔 일을 맡긴 이후, 이 침례병원에 주재하면서 계속해서 복음 전파와 난민 구호 사업에 종사(관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다가 1956년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며, 이후 1958년 여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토록 그리던 하늘 아버지 품에 안겼다.


☘졸고자(拙稿者)의 소언(小言)

: *살펴보았듯이 렉스 레이의 한국 선교활동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 올 때 이미 60대 후반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 한국민을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구제와 전도에 헌신하였고, 짧은 약 5년간의 선교 기간이었지만, 한 책의 언급처럼, “그의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은 한국 침례교사에서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였다”라고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렉스 레이는, 인생의 황금기를 중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50대 후반경에 중국 공산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약 10년경을 미국(고향)에서 지내고, 무려 60대 후반에 한국 선교사로 자원해 오게 되었다. 여기서 그가 6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두어가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의 선교에의 열정이다. 그는 중국에서 쫓겨난 이후, 미국에서 있는 동안, 한편으론, 중국민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에 괴로운 면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도리어, 오랫동안 중국에서 지내고 돌아왔기에 미국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역차별’ 혹은 ‘제 2의 문화 충격’을 느낄 수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모든 형편에 대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결정 하에 위치시킬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께 향한 감사’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다시금 주께서 주신 선교에의 사명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도하던 중, 중국에 근접한 나라 코리아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에 대한 소식과 더불어, ‘와서 도우라’는 미 남침례교 해외선교회로부터의 콜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 남침례교 해외 선교부가, 한국에 선교 재원들을 보냄에 있어, 60대 후반인 레이 렉스를 보냈다는 것은, 과거 중국에서의 그의 선교 활약으로 인해 그가 미 남침례교 안에서 큰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 점이 바로 그 두 번째 시사점이다. 거액의 연보와 구호물자와 더불어, 두 명의 의사들과 두 명의 간호원, 더구나 아내까지 인솔하여 한국에 가도록 파송 받을 만한 인물로, 레이 렉스가 지목된 것은, 지난 30년간 중국 남부에서 그에게 익혀졌던 동양인 선교 역량이 선교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점을 반증해준다. 나이로 인하여 비록 그가 한국에 가서 장기간 사역하리라고는 기대될 순 없었어도, 그가 중국에서 보여준 헌신과 영성과 지혜와 열매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 될 것이라도, 레이의 한국 선교가 당시 너무도 급박하고 막중한 한국민 구호전도사역을 효과적이고도 능숙하게 감당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뢰를, 미 남침례회 해외 선교부 수뇌부들에게 충분히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미 남침례교 해외 선교부의 예상은 적중했다. 1951년 말, 레이의 사역 시작 이후, 한국 침례교는 3년 만에 3배 가까이 교회 처소가 늘어나는 등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레이는, 구호물자, 특히 구제 옷을 나누어주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한국의 시골 구석구석, 찾아가 전도하였는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어느 마을에선 217명이 결신하는 열매를 보기도 할 정도로, 그는 하나님이 쓰시는 전도인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육체적으로 수고하였는지는, 앞서 언급한, ‘1953년도엔 무려 20톤의 의류를 가장 가난한 시골 동네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1951년 말, 그가 60대 후반인 나이에 선교팀을 인솔해 올 정도였다는 것은, 오히려 그때 당시는 어느 정도 육신이 건장했다는 점 또한 시사해준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지나치게 헌신하고 혹사한 탓일까! 그는 한국에 온 지 5년 만인 1956년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으며, 귀국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소천하게 되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한국에서 선교 사역할 때 정열적으로 사역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사람의 일생 마냥, 한번 태우되, 끝까지 다 태우다 없어지는 촛불’처럼, 렉스 레이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의 사명의 레이스를 끝까지 주님을 위해 완주하였다. 자기 몸은 다 타고 녹아 없어질지라도, 오직 주님만 존귀히 전해지길 바랬을 레이의 삶은, 마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생명을 드렸던 세례 요한의 영성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지금이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 ☘렉스 레이의 부친인 J. Gilman 역시 미국 북장로교 중국 선교사이었고, 앞서 소개한 (렉스 레이의 아들인) 다니엘 레이(Daniel Brooks Ray) 또한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것에서 보듯, 렉스 일가는 그야말로 선교사 집안이다. 이에 사진을 첨부하고 싶어 여러모로 찾아보았으나, 아쉽게도 렉스 레이의 사진은 확보하지 못했고, 불가피 *그의 아들인 다니엘 레이의 사진을 참고삼아 첨부해보았다[←하지만, 본(本) 게시판 내용 글에는 이 사진이 나타나지 않음].

☘하지만, 렉스 레이의 자서전, 즉 그에 의해 주(主) 내용은 기록이 되었으나 최종 그의 자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여지는 책인, 『Cowboy missionary in Kwangsi』(1964)의 표지에는, 아래와 같이 그의 용모를 추정케 해주는 모습이 그림으로 제시되어져 있다[←하지만, 본 게시판 내용 글에는 이 그림(사진)이 나타나지 않음].

*이 책에 대한 리뷰(review)를 하는 자리에서, 렉스 레이의 한 ‘내종(內從) 손주’ 되는 이는 이렇게 의미했다. “이 책은 나의 할머니의 큰 오라버니(-진 외종조부)에 관한 책이다. 한 텍사스 카우보이 선교사! 나는 이 책을 얻게 되어 기쁘다. 이제 더 이상 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어렸을 때 가족들이 그의 선교사로서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을 때 느끼곤 했듯이, 중국에서의 그의 경험들로 인해 나의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따라 경험한 한 순간 한 순간을 열거하기 때문에, 나는 그 책이 일종의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명확히 그 시대 역사 가운데서 견디고 살아내라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콜링이었다.”



IV. 참고 문헌 및 웹 사이트

*Rex Ray, 『Cowboy missionary in Kwangsi』, Broadman Press(1964), the back cover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 4권』, 서울: 기독교문사(1981)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침례교회사』, 서울: 침례회출판사(1994)
*김갑수, 『한국침례교 인물사』, 서울: 요단출판사(2007)
*김남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서울: 생명의 말씀사(2008)
*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2016)
*김승태,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수정 증보판),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7)
*김용국, 『한국침레교사상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2005)
*허긴, 『한국침례교회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2000)
*https://www.scanioharperfuneralhome.com/index.cfm/obituary/4874902?browse_on=desktop (2019.12.02.)
*https://www.amazon.com/Cowboy-missionary-Kwangsi-Rex-Ray/dp/B0007EDTLQ (2019.12.03.)
작성일:2019-12-12 17:37:14 121.168.15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