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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B091/Railton, George Scott(1949-1913, SA)

닉네임
3학녀 5반 마정훈
등록일
2019-12-12 22:31:24
조회수
787
첨부파일
 선교사 보고서 마정훈 - 레일톤.hwp (496128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Railton, George Scott / 레일톤 / 푸랜시스 오 클락/ 한국명: 구을락
2. 생몰연도: 1849 - 1913
3. 학력: Cornell University 졸업, Columbia University 졸업, 켄터키주 베리아 대학 직업교육 담당 교수.
4. 한국 선교기간: 윌리엄 부스의 출실한 보좌관으로 구세군의 기틀 마련
미국과 독일에 선교사업 개척
네델란드, 프랑스의 구세군사령관으로 활동
터키, 러시아에 구세군 개척
일본에 파송되어 일본인과 같은 양식으로 생활, 전도
1907년 일본사업 정비하며 조선방문, 노일전쟁 초로들을 위한 활동
이후 사전답사를 통해 한국구세군의 기초 마련
5. 연표: 1907. 조선 입국
6. 가족사항: 아내 Marianne Deborah Lydia Ellen Parkyn
아들 David Railton

II. 선교사 소개: Railton, George Scott

1. 서론: 레일톤의 선교 사역
그는 감리교 선교사 랜슬롯 레일톤과 그의 아내 마가렛 스콧의 아들로 1849년 스코틀랜드 아브로스 지역의 세인트 존 감리 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864년 11월에 콜레라로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15살의 나이에 노숙자이면서 동시에 실업자가 된 그는 런던의 해운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가 1869년 선교사로서 모로코로 여행을 가고자 하였다. 이는 그의 형이었던 감리교 목사 랜슬롯 레일톤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대 모로코로 가는 길이 막혀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70년 운송업을 하고 있던 삼촌의 회사(Stockton-on-Tees)에서 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자리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 해에 윌리엄 부스는 회복하기 위해서 매틀록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조지의 형 랜슬롯 목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서 부스는 조지가 열정 있는 선교사로서 모로코로 가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스는 조지가 기독교 선교를 위해 자신이 찾던 종류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 부스는 조지에게 크리스쳔 미션의 두 번째 보고서 인 ‘복음으로 대중에게 도달하는 방법’의 사본을 보냈는데 이를 본 부수는 본격적으로 구세군에 뛰어들게 된다.
1872년 10월 런던으로 들어와 윌리엄 부스의 비서로 그의 집에서 몇 년 동안 살았으며, ‘기독교 선교지’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1973년 9월에는 기독교 선교부 사무 총장으로 일하였다. 1880년 부스의 아들 브람 웰 부스가 아버지의 비서가 되자 부스는 조지를 선교사로 보내기 위해 뉴욕으로 보낸다. 이는 조지가 모로코로 선교사로 가고 싶었던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선교에 앞장서서 일했다. 뉴욕에서의 선교 사업은 잘 진행되어 1880년 5월에 16명의 장교, 40명의 생도 및 412명의 군인을 두었고 이러한 선교 사업의 성공은 이후 구세군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자선 단체로 1,200개가 넘는 교회와 12만명이 넘는 회원이 있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뉴욕에서의 선교를 성공시킨 조지를 통해 더 큰 선교에 대한 욕심이 난 부스는 1881년 그를 영국으로 소환한다. 조지는 항의했지만 결국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3월 돌아가는 길에 캐나다에 들리게 되는데 그 곳에서 영국으로 가는 배를 놓쳐 한 주간 핼리팩스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1년 후에 캐나다에 구세군이 공식적으로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후 1884년 조지 레일톤은 마리안 파킨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구세군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결혼에 반대했지만 결국 승낙하여 엑스터 홀에서 1월 17일에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지만, 조지는 많은 시간을 해외 여행에 투자하였으며 남아프리카, 홀랜드,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극동, 서 아프리카, 러시아 및 터키 등지를 오가며 선교 사업을 진행했다. 1886년 독일에 들어가서 사역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1890년 캐서린 부스의 장례식을 수행하고 1893년에는 독일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결국에는 추방되었다. 1894년에는 스페인으로 들어가 1895년 영국으로 다시 들어갔고, 1899년에는 남아공, 1901년에는 프랑스, 1903년에는 서 아프리카로 갔다. 이 많은 일정 가운데에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말년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해 선교 여행을 쉬지 않았다. 결국 스위스에서 독일 퀼른으로 가는 기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윌리엄 부스와 캐서린 부스의 무덤 옆에 있는 런던의 애비 파크 묘지에 묻혔다.
작성일:2019-12-12 22:31:24 49.173.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