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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A032 / Ross. John

닉네임
조재흥
등록일
2019-12-13 00:37:42
조회수
86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A032_조재흥.hwp (457216 Byte)
존 로스 선교사 / John Ross (1841-1915)

I. 기본사항

1. 이름: John Ross / 존 로스
2. 생몰연도: 1841-1915
3. 출신 및 소속: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4. 한국선교기간: 1873-1910
5. 연표
1841. 존 로스 ( John Ross ) 탄생
1872. 존 로스 (John Ross ) 만주 우장(牛莊) 선교 개시,
1873. 한국선교 시작
1874. 이응찬 존 로스의 어학선생이 됨, 달레, Historie de L’Eglise de Coree 간행
존 로스의 한. 영 회화책 (A Korean-English Primer) 완성
1877. 존 로스의 한. 영 회화책 (A Korean-English Primer) 출간,
1879.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
존 로스의 K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출간
1882. 로스와 맥킨타이어,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젼셔 요인뉘복음 간행,
1884. 11. 로스와 웹스터 서간도 집안현에서 75명에게 세례,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 全書)
1884. 로스 6,000권의 성경 서상륜에게 전달,
로스와 맥킨타이어 예수셩교말코복음과 예수셩교맛뒤복음 간행
1885. 2. 로스와 맥킨타이어 로마인서, 코린돗젼후셔, 가라탸서, 이비소서 간행
1887. 예수셩교전서 완간
1910. 과로로 귀국
1915 . 서거

6. 가족사항아내 : 스튜어트
여동생: 캐드린 로스(C.ROSS)
매부 :존 매킨타이어(John Mecintyre)



II. 선교사 소개: 존 로스(John Ross)

1. 존 로스 선교사의 활동적 배경

존 로스의 생애를 언급함에 앞서 그의 활동적 배경에 관하여 설명을 가한 후에 생애를 추적 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만주의 우장(牛莊)과 봉천(奉天) 이 두 고장이 로스(John Ross) 목사에게만 중요한 곳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선교 선구지라고 할 수 있다. 우장( 牛莊) 은 최초의 신자를 낳는 곳이요, 최초의 한글성서를 번역한 곳이다. 또한 봉천 (奉天) 은 최초의 한국 성서를 출판한 곳이요 최초의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했다는 점에서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와의 사이에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장소들이다. 또한 우장은 봉천 서남쪽에 있는 영구(營口) 항구 바로 북에 위치한 항구로서 지금은 한적한 마을에 지나지 아니하나 당시에는 이 일대가 영국이 만주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번창하여 영국의 영사관 세관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김광수, 『한국기독교전래사』. (기독교문사. 1976), 258
그러므로 영국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일찍부터 1869년에 이곳에 두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을 개시하였다. 두 사람의 선교사: 제임스 와들(J.Waddel) 목사와 의사인 조셉 헌터(J. Hunter)이들은 바로 전년에 윌리엄 번즈(W.Burns) 선교사가 만주선교여행중에 우장 ( 牛莊) 에 들렸다가 별세한 것에 크게 감동되어 이 지역의 선교사를 희망하였다.



2. 매부, 매킨타이어와의 공동선교

다음에 이 지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분이 스코틀랜드 일치 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 of Scotland)의 죤 로스(John Ross)와 그의 매부인 존 매킨타이어(John Mecintyre) 두 목사였다. 로스목사는 1872년 산뚱성 주재 선교사로 부임하였는데 와서 보는대로 이곳에서는 이미 미국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그는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하였다. 로스목사는 윌리암슨 목사와 상의한 결과 아직 미개척 상태에 있는 만주선교를 시작함이 보람 있는 것이라고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남 매부 간인 로스 (John Ross)와 매킨타이어 두 목사는 우장으로 철수한 후에 아일랜드 장로교회에 헌의하여 공동선교를 할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기독교 대백과사전. 권 5.( 교문사, 1983). 256
그러다가 두 선교회는 1891년에 가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로스목사가 우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후 그는 만주선교회의 큰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우장보다는 봉천이 중심지가 될 것으로 간파하여 선교본부를 봉천으로 이전하였다. 그는 이 곳에서 만주선교에 큰 뜻을 두었는데 로스목사가 만주선교를 희망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영국인으로서 한국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함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박 완, 실록한국기독교 100년. 성서교재사. 권 1 (여평편), 95



3. 한국선교를 위한 계획과 고려문에서의 만남

그의 선교계획은 병인양요 이후에 있어서 한국의 경계는 더욱더 심하여 졌기 때문에 우선 만주 땅에 있는 한국인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국 국내에 잠입시켜 선교의 성과를 달성하여 보려는 것이었다. 만주는 한국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인접한 지역이었음으로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에 최적지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였다. 김광수, 『한국기독교전래사』. (기독교문사. 1976), 260

1873년 가을에 로스목사는 제 1 차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 여정은 천리 길이나 되는 먼 거리였으며 1개월여에 걸친 오랜 여행이었다. 그는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 흥경을 지나 압록강 상류 임 강까지 이르렀을 때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한 마을에 들리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고도(古都)인 즙안현(楫安縣), 이양자(裡楊子)이었으며 약 2천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반갑게 만났으며 한국 입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한국 입국을 위한 길안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하면 처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로스목사는 다만 이곳에서 한국에 입국을 포기하고 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권』.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9), 316

로스목사는 귀로에 고려문(高麗門) 고려문: 남만주 봉황성 “투카”라는 곳에 있는 책문의 하나로서 조선의 의주에서 120리 되는 곳에 있었고 춘추 양계절에 정기시장이 열리는 때를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가 청나라 상인들과 더불어 문화를 교역하는 특정구역이었으므로 개시 계절에 맞추어 가기만하면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는 곳이었다.
에 들렸을 때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다음에 1874년 봄에 로스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고려문에 있는 한국인 전도를 목적으로 하여 제 2 차 만주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고려문 시장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인들이 국법이 금하는 어려운 사정으로 인하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는 서양인을 피하는 사정을 알아차렸으므로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한국인을 자기들이 유숙하고 있는 주막으로 데려오도록 일을 진행시켰다. 중국인 서기는 여러 날 동안 거리에 나가 한국인을 데려오려고 힘써보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 청년 4명을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들은 평안북도 의주 청녀들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 이었다. 박완, 실록한국기독교 100년. 성서교재사. 권 1 (여평편)
그들은 선진과학을 배우려고 청운의 뜻을 품고 장사를 핑계하여 멀리 이역 (異域) 을 헤매는 중이었다. 그들은 서양인을 만나고픈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서도 당시 서양인이 한국에 비친 인상은 국가의 기밀을 살피러 온 정탐꾼으로 의심받고 있었기에 쉽게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장 나이 많은 백홍준의 제의로 중국인 서기와 동행하여 로스목사를 만났다. 김광수, 『한국기독교전래사』. (기독교문사. 1976), 260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청년들에게는 후한 월급과 서양과학을 배우게 한다는 약정 하에 네 청년은 로스목사와 함께 우장으로 갔다. 네 청년은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 또 그곳의 영국 세관장과 병원장의 어학선생이 되었으며 성심껏 일하면서 또 신문화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이 네 청년은 예수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는 매우 완강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후에 고국에 돌아가게 되더라도 기독교 신자만 되지 아니하였으면 사형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스목사나 매킨타이어 목사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급한 기대를 갖지 아니하였고 반드시 그 언젠가는 생명의 말씀이 뿌리내릴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꾸준히 네 청년의 마음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기독교 대백과사전. 권 5.( 교문사, 1983). 256


4. 존 로스의 저술활동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열심히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1874년에는 한 ·영 `회화책(A Korea English Primer)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879년에는 한국지(韓國誌) 또 그 역사 생활습관 (K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대백과사전, 5권,(교문사, 1983), 256.

그리고 1875년에 이미 “예수 성교 문답” “예수 성교 요령”의 두 책을 한글로 편찬하였음은 참으로 한국선교의 문호 개방을 위한 그들의 노력의 지대함을 말하고 있다. 김양선,『 한국의 성서 번역사』, 32-33.

로스목사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는 만주 봉천시의 동문 밖에 위치한 동개교회 강단 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최상순, ‘존로스목사와 선교활동과 로스역이 한국역사에 미친 영향, (서울장로회신대원. 1985). 27
비문에서 말하는 생의 위업을 번역하면,

영국의 신학박사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서 1841년에 태어났으며 그는 공부하기를 끝낸 후 주님의 뜻을 순종하고 받들어 멀리 중양을 넘어 중국으로 갔으니 전도를 한 때는 31세였다. 먼저 어려움을 개척하여 교회를 창립하니 그 어려움과 곤란은 극에 달하였으나 마침내 봉천에 교회당 설립을 성공하였다. 요양과 경원 및 조선 등지에서 사람을 얻으니 심히 많았더라. 다시 또 고아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길렀다. 또 성경을 번역하였고 신학교를 창립하고 신학을 가르쳐 신앙인을 양성하였다. 시험을 거쳐 중국인 목사 10명을 뽑았고 70세에 달하니 너무나 지나친 과로로 인하여 귀국하였다. 그러나 말씀을 위하여 근면하였고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하늘의 기운이 다하여 75세에 서거하였으니 1915년 가을이었다. 부고가 서쪽에서 와서 교우들이 “서거”의 소식을 듣고 잊지 못해 감히 그 난망(어려움)을 잊을 수 없어 이 찬어를 지어 보존하였노라.


5. 존 로스 선교사와 해외선교부 및 한국선교부와의 관계

첫째, 해외선교부는 한글성서번역보다 전통적인 선교방법인 전도와 설교에 우선권을 두기를 강하게 권고했음에도 로스 선교사는 한글성서의 번역에 헌신하였다.
둘째, 로스는 1884년 이후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하여 세례를 베푸는 등 목회를 전개했으며 해외선교부 역시 대체로 이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한인촌 방문의 지리적 인 장애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선교부의 도움을 갈망해야만 했고, 결국 한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셋째, 강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내 선교에 대하여는 사실 상 해외선교부가 거절하였고, 만주선교위원회는 때마침 이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와 선교예양협약을 맺고 사역을 이양하였다. 강계지역으로부터의 선교요청을 기회로 한국선교를 확대하려던 로스의 꿈은 사라져버렸다. 박형신, 존 로스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한국선교에 대한 갈등, 한국기독교와 역사(46), 2017. 65.
작성일:2019-12-13 00:37:42 121.168.15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