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oyles, Helen E.(미상, M)

닉네임
정대웅
등록일
2019-12-13 00:57:15
조회수
102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05_정대웅.docx (1114147 Byte)
I. 기본사항

1. 이름:Boyles, Helen E.(미상, M) / 보일스 / 한국명: 박일숙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884.9.20.-1890.
5. 연표1926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공주에 배속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봉직
1928년 평양으로 이전하여 정의여학교 교사로 봉직
평양, 영변, 진남포, 사리원, 강서 지방의 유치원, 소학교 사업
공중위생, 아동보건 사업 등 광범위한 선교사업
1939년 휴양차 귀국, 1948 재내한하여 인천에서 활동
1950 6.25전란으로 귀국
5. 가족 사항:
6. 논저: [논문] Primary Schools in Pyengyang, 50 years of Light, 1938; Yengbyen educational work, 50years of Light, 1938.

II. 선교사 소개: 보일스 선교사(Boyles, Miss Helen E.)

1. 1926년 공주 영명학교로 배속되다.
1926년 병인년(임시정부 대한민국 8년,) 미국에서 감리회 여 선교사이자 교육가인 보일스 선교사는 한국에 내한선교사로 입국하게 된다. 그녀는 이후 조선에서 박일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기존 감리교의 선교사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진다. 첫째로는 교회 개척사업이며 둘째로는 교육사업이 이루어졌고 셋째로 의료사업이 이루어져왔었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Ⅰ(1884-1992)』, 유동식,kmc,p.131-144
하지만 1920년대 들어오면서 남감리교회 여선교부가 모색하여 온 선교적 특새은 과거와 다른 성향을 띤다. 그것은 바로 다각적 선교정책으로 4개의 지방, 즉 원산지방, 서울지방, 송도지방, 춘천지방에 지방별로 센터를 만들고 여기서 여성을 위한 여러 가지 부문을 두고 선교와 연관을 가지고서 실시하는 정책다. 1920년대의 선교는 일종의 문화선교로서 시대적 흐름을 따라 다각적인 선교를 모색하였다. 『한국감리교여성사(1885-1945)』, 張炳旭, 성광문화사, 1979, p.392

그녀는 감리회의 지도에 따라 공주에 배속이 되었고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게 되었다. 공주 영명학교는 1900년 Dr. Mcgill.과 R.A.Sharp 부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03년 5월 1일 선교 연회(19)때 내한하여 소개되면서, 그 때 무어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감리교회사』,,기독교 대한김리회 총리원,1975 p.84-85

첫 시작은 다섯명의 선교사 가정과 당시 있었던 3명의 W.F.M.S 직원들이 있었다. 이후에는 두 가정으로 줄게 되었고 당시 W.F.M.S.에 대표되던 인물이 바로 Miss Helen boyles 였다. 그녀가 오기전 1915년 중등학교인 3년제 영명여자고등학교로 개편하여 이전의 교과였던 성서 국어 역사 지리 영어 이과 산수 창가 도화 체조 수예에서 요리법 편물 자수 등을 추가로 가르쳤었다. 1928년 봄에 실업 및 직업과를 설치하여 학교를 졸업하는 소년들에게 손수 생계를 유지하도록 실제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1921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 100주년 기념관이 학교에 건립되었다. 『The Korea missions year book, editors, F. E. C. Williams, Gerald Bonwick ; sta
tistician』 M. L. Swinehart.1928,p.48-52

영명학교에는 총 105명의 학생과 7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1907년에는 남자학생들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1921년 모든 건물들이 완성이 되어졌다. 그리고 학생들은 고등보통학교에서 첫 3년만 가르쳤기 때문에, 그 소년들은 서울 배제나 평양에 있는 광성고등보통학교로 가게된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보일스 선교사는 학생들을 교육 시켰고 그녀 자신도 1928년 평양으로 이전하여 정의 여학교 교사로 봉직하게 된다.

2. 1928년 평양으로 이전하여 정의여학교 교사가 되다.
남감리교의 평양사업은 여러 가지로 펼쳐지게 된다. 이러한 사업은 보일스 선교사의 앞으로의 일정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은자의 나라 문에서』 c.a. sauer. 한국기독교역사 연구소
남감리교의 평양사업은 우선 복음주의 사역에 힘을 실었다. 두 번째로 여성 성경교육학교를 진행하였다. 세 번째로는 의료시시설을 진행하였고 네 번째는 학교사업이다 여기에는 광성고등보통학교와 정의여고와 초등학교들와 유치원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공위생과 아동보건 사업에도 뛰어들었는데 이 모든 일정들이 그녀의 연표와 관련되어져 있다.
무엇보다 평양은 기독교 문화의 발상지이고 우리 나라의 초기 감리회선교사 허을 박사가 처음으로 희생된 곳이다. 정의여학교는 노블부인과 폴웰부인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1899년 5월 12일 제 15회 한국선교회 때에 노블 부인의 여학교 설립 건의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감리교회사』,,기독교 대한김리회 총리원,1975 p.87

정의여고는 Miss Grace L.Dillingham and Miss Esther L.Hulbert.의 지도 아래 있었다. 1920년 5월 대략 교사들은 여성이 반 남성이 반이었는데 보일스 선교사는 이 중 하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정의여고같은 경우 220여명의 여학생이 모두 합격하였지만 125명만이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는 명문 학교였다. 졸업색들은 교사나 기독교 선교사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1920년 5월 16일 사립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가 인가를 받은 이후로 Miss Grace L.Dillingham는 교장에 부임하며 가사와 실습에서는 3학년생에게 주로 한식요리법을, 3학년과 4학년에서는 서양요리법을 교수하였다. 『한국감리교회사』,,기독교 대한김리회 총리원,1975 p.89

이 당시 평양의 경우 38개의 초등학교가 존재하였으며 대부분이 지역 교회와 연결되어졌다.더하여서 800여명 유치원생이 다니는 14개의 유치원이 존재하였다. 평양지역에서는 초등학교 만큼 유치원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 한국기독교인들의 희생적 봉사와 자원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그녀가 있었던 당시 정의 여학교는 1929년 8학급을 증설하였고 1930년 당시 이사장은 무어(J.Z.Moore, 문요한)였고, 이사는 앤더슨(A.G.Anderson, 안도선),김득수,오기선이었다. 당시 같은 교사로 안식수, 한유신, 김도광, 소애련, 무어(R.B. Moore, 문로득), 헐버트 등이 봉직하였다.

3.아동복지와 보건사업에 참여하다.
그녀가 참여하였을 선교사업중 공중위생과 아동보건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Miss edith Gaylord로부터 시작하여(1908) 대부분이 Mrs. A.G.anderson의 지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한차례 중단되었다가 1921년이 되어 다시 계속되었다. 공중위생의 경우 공주시를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지방에까지 시민의 건강과 복음사업을 위해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더불어 아동복지를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사업은 baby clinic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의 한 방을 빌려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 1929년 여러 분과를 가진 아동복지 사업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초창기 한 때 유아의 사망률이 전체적으로 6-8퍼센트까지 내려가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감리교회사』,,기독교 대한김리회 총리원,1975 p.403-404

비록 사업은 느리게 진행되어졌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사업들에 대하여서 굉장히 감명깊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The Korea missions year book, editors, F. E. C. Williams, Gerald Bonwick ; sta
tistician』 M. L. Swinehart.1928,p.53-58


4.영변 유치원, 소학교사업
『The Korea missions year book, editors, F. E. C. Williams, Gerald Bonwick ; sta
tistician』 M. L. Swinehart.1928,p.71
영변에는 W.F.M.S.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유치원과 소학교 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보일스선교사이다. 이곳에서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위한 소학교와 여학생과 남학생을 위한 별도의 보통학교가 존재하였다. 보통 3년제 학교로 운영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5년제 고등학교로서 등록되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노력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이 2년 이상 학교를 위해 기도해왔으며 그들은 일주일 동안 단식을 하기도 하고 교육적인 일의 유대를 위하여 기여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비단벌레 재배사업마저도 진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에서는 영적 부흥회를 진행하며 사람들의 열기를 한층 더 고무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1924년까지만 해도 영변지방에서는 단 한 개의 유치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유치원이 시작된 곳이 바로 영변시였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이 처음 시작하였을 때에 많은 군중들이 와서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였다. 당시 학생 현황은 40명 중 남자가 대부분이고 여자는 겨우 6-8명이었다. 여자가 적은 까닭은 유치원에 가려면 반드시 형제 중 오빠나 남동생이 함께 가지 않으면 홀로는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1926년 영변유치원은 졸업생 22명이나 배출하였다. 유치원이 당시끼친 효과는 대단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는 아동의 완전한 발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 중요성을 대단치 않게 취급하는 어른 중심의 또는 가장 중심의 사회였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아동교육과 발달에 대한 인식은 처음부터 선교사들이 교회 안에 유치원을 둠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한국감리교여성사(1885-1945)』, 張炳旭, 성광문화사, 1979, p.402-403

이러한 사업의 시발점은 1927년 평양지방에서 농촌 부녀자들을 상대로 계몽 교육을 실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농촌 사업은 김활란이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석한 직후 여자기독교청년회 안에 농촌부를 창설한 1928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감리교회 역사』 , 이덕주·서영석·김흥수, kmc p.251


5.1939년 휴양차 귀국하였다가 1948년 내한하다. 그리고 그 이후..
수많은 일정아래 그녀는 결국 1939년 휴양차 그녀의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그 로부터 10년뒤인 『한국 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윤츈병, 한국감리교회 사학회
1948년 그녀는 다시 내한하여 인천사회관에서 선교사업에 힘쓰게 되었다. 그녀는 19c말 미국 감리교회가 보낸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이용하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들을 가지고 4월 인천기독교사회관으로 다시금 창설하였다. 1894년에 지어진 건물은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시설하였다. 현재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서 창영사회복지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korea trip tips” http://www.koreatriptips.com/tourist-attractions/1114573.html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으로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이자 결국 그녀는 고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작성일:2019-12-13 00:57:15 121.133.21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