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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A001 / Adams, James Edward(1867-1929, NP) / Adams, Nellie Dick; Adams, C. M. Babcock

닉네임
이현준
등록일
2019-12-13 04:57:41
조회수
89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A001_안길함이현준.hwp (416256 Byte)
안의와 선교사 / Adams,James Edward (1867-1929)

I. 기본사항

이름: Adams, James Edward / 아담스 / 한국명: 안의와
생몰연도: 1867.5.2.-1929.6.25.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기간: 1895.5.29. - 1923
연표1867.5.2. 미국 캔자스주 출생
1889 캔사스에서 중고등학교 및 대학 졸업
1894 인디애나주 매코믹신학교 졸업
1895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 및 지방풍습 공부
1897 대구선교부로 파송되어 확장시킴
1898 자신의 집에 대구제일교회 조직
1898.10월 제중원 설립
1900.1월 당회 조직
1902 제일교회 내에 대남 남자소학교 설립
1906 계성중학교 설립, 여러 지역에 교회 설립
1917-20 세브란스병원 이사
1922 전재산을 <아담스복음전도기금>으로 선교기금화
1923 대구선교부 은퇴 후 귀국
1929.6.25. 캘리포니아 버클레이에서 소천
가족사항부인: Adams, Nellie Dick(1909년 별세) / Caroline Babcock아들: Edward Adams (1895-1965) / Benjamin N. / George J.
딸: Adams, Dorothy D.
II. 선교사 소개: 아담스 (Adams,James Edward, 1867-1929)

1.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 5월 2일생으로 미국 맥코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8년 워쉬번 대학을 졸업후 매코믹 신학교에 들어가 수학 후 1894년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에 그의 아내 넬리 딕(Nellie Dick)을 만나 결혼하였다. 1895년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해 5월 29일 부산을 통해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이듬해 96년 11월 대구선교 업무를 인계 받은 안의와 선교사는 1897년 대구 부임과 동시에 대구,경북 모교회인 현 대구제일교회 남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역 일대에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그리고 1906년 현 계명 초,중,고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2.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의 전신 ‘제중원’ 설립
안의와 선교사는 대구에서 먼저 ‘미국약방’이라 이름하여 의료선교를 하고 있던 존슨 선교사를 만나 부해리 선교사와 협력하여 1898년 10월에 ‘제중원’이라는 간판을 걸게 되었다.존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존슨 선교사를 병원 원장으로 세우고 현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이름하고 있는 병원 제중원을 설립하였다.

3. 안의와의 학교 설립
1902년 대구남성정교회에서 교회 내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남 남소학교의 설립자는 안의와, 여학교의 설립자는 선교사 부인 부마태가 되었다. 구 한국학교령에 의하여 남학교는 대남, 여학교는 신명이라 칭하였으며, 미국 선교회 주최로 설립된 남중학교는 계성이라 칭하였는데 안의와가 설립자가 되었다. 1906년에는 계성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그 당시에 교육이 필요했던 조선땅에 교육사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4. 안의와 선교사의 경북지역 선교사역에 대한 기록들
아담스 선교사의 경북지역 사역을 살펴 보니 내가 자랐던 고향에도 아담스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라왔던 고향 교회에서 당회장으로 지냈던 ‘권찬영’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아담스 선교사는 경북 지역 일대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곳곳마다 복음을 증거하였던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담스 선교사의 경북지역 교회 사역기록들>
청도군 송서교회가 성립하다. 선교사 안의와의 전도로 김경수가 신하고 동지에게 전도하야 조병종 김양석과 총종찬의 전가가 귀도하야 교회가 설립될새 김양석은 연로 독신자로 금50원과 산판 일정 3반을 기부함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니라
경산군 사월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안의와의 전도로 신자계흥하야 교회가 설립되니라.
동군 전지동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송남극 김응두 외 수인이 선교사 안의와의 전도를 듯고 결심신교한 후 내반교회로 다니다가 신자가 증가되야 분립하고 송남극은 영수로 서자명은 집자로 김용구가 조사로 시무하니라.
경산군 송림교호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안의와가 조사 서성오로 순회전도한 결과로 기개인 신자를 득하야 예배당을 신축한 후 김강릉, 김형원이 인도자가 되고 조사에 김용태, 김용구 등 상계시무 하니라.
경산군 신기동교회가 성립하다. 선교사 안의와가 설립자가 되고 조사 서성오와 영수 김강릉 집사 김형원 등이 교회를 인도하니라
동군 개포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손한주가 신주 열심전도하야 자기가사를 예배당으로 봉헌하얏스며 이두천이 인도자가 되고 선교사 안의와가 시무하얏고 후에 임문길을 장로로 장립함으로 당회가 조직되니라.
영천군 평천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김필호가 대구에 여행하얏다가 복음을 듯고 신교하고 린리에 전도함으로 김홍도 등이 귀도하야 교회가 시작되야 선교사 안의와와 조사 서자명이 시무하니라
영천군 신령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권서 이기유가 전도하야 신자 육칠인이 됨으로 김준달 가에 임시회집하다가 왕산동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선교사 안의와 영수 이관용 집사 하덕윤 조사 박영조 여충호, 박재두가 상계시직 하니라.
영천군 우천동 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김명현, 김기원, 이석락 등이 복용동 교회에 래왕하면서 본리에 전도하야 신자가 초진함으로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가 분립하니 설립자난 선교사 안의와오 조사난 서자명, 박덕일이 상계시무 하니라.
청도군 서상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김덕준과 기가족이 일제히 밋고 최한창 가에 임시회집하더니 열심출연하야 합천동에 예배당을 신건하고 교회가 분립되니 선교사 안의와 조사 김만성, 박덕일 등이 상계시무하니라
경산군 북사교회가 성립하다. 선교사 안의와의 전도로 신종자다 하더니 지시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내반교회로부터 분립하니 영수 한기원 집사 백남채가 인도 하니라
안동군 법상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강복영, 권중락, 부인 원회순 정선이 등이 신종하고 영주 지곡교회에 래왕예배 하더니 선교사 안의와가 매서 김병우를 파송하야 본읍 서문외에 초옥 5간의 서원을 창립하고 전도하며 교회를 인도하니라.

5. 아담스 복음 전도 기금
안의와 선교사의 사재를 바탕으로 마련된 경북지역 선교 보조 기금이다.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대구선교부를 관할하고 있던 아담스 선교사는 선교비의 부족으로 선교요원이 적소에 충당되지 못하는 등 많은 선교대상 지역이 방치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본국에 있던 자신의 개인 재산을 기초로 선교기금을 조성할 결심을 하였다.
<아담스기금>의 후원으로 두 사람의 별도 선교사가 미국으로부터 도착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그 가운데 한사람은 신병으로 사임했으며 나머지 한사람도 황해도 재령으로 옮겨 북장로회 선교회에 소속되므로 일단 이 기금에 의한 선교사증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더구나 이 기금의 창설 이후 곧 아담스 선교사도 신병이 악하되어 선교사직을 사임함으로 그 관리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후 아담스목사가 별세하고 그의 두 아들(Edward Adams; B. N. Adams)이 이 기금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이 기금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대신에 대개는 한국인 목사들을 2년까지를 기한으로 해서 보조하며 대구의 학생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던 소년학원의 전도 악대를 후원하는데 사용되었다. 이후 이 기금은 외국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 보다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 바 1930년까지 10년도 안된 기간 내에 이 기금에 의해 72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경북내 전체교회의 15%에 해당되며 대구를 포함한 경북노회의 교회총수에 대해서는 25%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수이다. 이에 대한 1928년의 외지 선교부 대구지부의 보고서를 보면 “이 도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복음 전도 활동은 아담스 복음전도 기금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금년에는 약 10개의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사실 한국선교사들의 주된 선교방책이었던 네비우스 선교원리 중의 교회 자립성장원칙에는 위배되는 형태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심한 경제적 피폐에 시달렸고 특히 일제의 독선적 농촌 경제정책에 의해 한국의 농촌교회가 겪는 경제적 곤궁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 여파로 타지역에서는 1920년대부터 1935년 사이의 농촌교회 성장률은 미미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경북지역 즉 4분의 1에 해당하는 교회가 아담스복음전도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 지겨의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계속한 것이다. 이 교회들은 점차 자립의 단계롤 전환되었고 경북노회의 중심교회들로 발전하였다.
작성일:2019-12-13 04:57:41 112.186.111.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