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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13 / 1. De Camp, E, Otto / 2017210203 / 3학년 4반 / 강승구

닉네임
강승구
등록일
2019-12-13 11:53:50
조회수
813
첨부파일
 한국교회사(3학년4반)강승구.hwp (18944 Byte)
애드워드 오토 디캠프 Edward Otto Decamp

Ⅰ. 기본사항

1. 이름: De Camp, E, Otto / 디캠프 / 한국명: 감의도(甘羛道)
2. 생물연도 : 1911.7.19- 서울에서 출생
3. 학력 : 서울에서 외국인학교 졸업, 1942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 취득
4. 경력: 필라시에서 부목사로 활동
5. 한국 선교기간 : 1937.7.19. - 1941.8, 1976.7
6. 연표
1937. 9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전주에서 어학 공부
설교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5개월간 감옥생활
1940. 12 엘리자베드와 결혼
1941. 2.25. - 7.21 적성국민으로 구금생활
1941. 8 강제추방
1943 – 46 미 육군 군목으로 종군
1946. 9 재내한하여 방송선교에 종사
1949 – 50 연세대학교 이사
1949 – 54 NCC 매스콤위원회 위원, 위원장 역임
1952 – 54 3년간 기독교서회 실행위원 및 편집위원
1976. 7 귀국
7. 가족사항: 아버지 – DeCamp, Allen Ford / 어머니 – DeCamp, Alice Giles / 부인 – DeCamp, Elizabeth Brown Woods


Ⅱ. 선교사 소개.
서울에서 출생한 알렌 포드의 아들 디 캠프는 1937년부터 1976년 까지 40년 동안 한국선교사로 활약했다. 디 캠프(E. Otto De Camp)는 2대째 선교사로 서울에서 태어나 1937-1938년 도쿄에서 일본어를 익히고 1939년 충북 청주에 부임하였다. 1940년 12월 디 캠프는 엘리자베드 브라운 우즈양과 결혼하였고 그는 서울에서 외국인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 휘튼 고등학교와 휘튼대학을 마쳤으며, 1942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 때 필라시에서 부목(副牧)으로 일한 일이 있고,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것은 1937년 봄이었다. 2001년 10월 기독교방송 초대사장이었던 디캠프 선교사(Decamp, Edward Otto, 한국명 감의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
디 캠프는 1937년 한국선교사로 임명 된 그해 9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전주(全洲)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설교를 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5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일도 있었다. 그는 일제 말기, 곧 1941년 2월 25일부터 7월 21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들의 혐의는 1941년 1월 15일에 청주 선교사관 구내에 사는 한국인 신자의 집에 가미다나를 철거하여 경찰에 돌려준 것이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4월 9일 재판에서 징역 10개월선고 받고 풀려나 즉시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가다마 사건: 1941년 1월 15일 디 캠프와 로메(Dewitt Lome) 두 사람은 청주 선교사관 구내에 사는 신자의 집에 가미다나가 있는 것에 놀라 그것을 철거하고 일주일 후에 그것을 경찰에게 돌려줬다. 그것은 전날 경찰이 각 가정에 돌아다니며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고 쓰인 부적을 나누어 주고 가미다나를 만들어 그것을 향하여 매일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디 캠프는 8월에 강제추방을 당하여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미 육군 군목으로 종군했다. 해방 후 1946년 9월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일할 수가 있었다.

2. 한국에서의 사역내용.
그는 1949년 KBS에서 시청각 사업을 시작하였고, NCC방송국을 설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독교방송 설립자 이자 초대 사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1948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기독교방송 개국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입국하였다. 6. 25사변 이후에는 교회의 복구사업을 위해 진력하되 그 위원회의 회계로 힘썼으며 방송국의 건설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49-50년에 NCC매스콤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고, 1951-54년에는 위원장으로 1954년 체신부로부터 호출부호HLKY, 주파수 700kHz, 출력 5kw의 기독교 방송 설립허가를 이끌어냈다.
1952년부터 3년간은 기독교서회 실행위원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연세대학교 이사(1949-50)일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디 캠프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 13일, 북한군 포로들 1000여 명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일제하에서 고난을 겪었던 전형적인 전시하의 미국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여러번 구금생활도 겪었고, 강제출국을 당하면서도 다시 한국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우리나라 기독교 방송이나 언론에 끼친 공헌은 지대한 것이다.


Ⅲ.참고문헌.
기백 4권; 구미인조사록.
Biographical Data, U.P. Mission, Seoul.
사와마사히코, “일제하 ‘신사문제’와 기독교주의 학교,”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한국기독공보, 《노년 선교사들 연이어 별세, 안타까움》 2002,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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