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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achsler, Anna(1900-1983, SA)

닉네임
김지윤
등록일
2019-12-13 14:16:03
조회수
91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22_김지윤).hwp (870400 Byte)
내한선교사 / B022 / Hachsler, Anna(스위스, SA)


I. 기본사항

1. 이름: Hachsler, Anna / 하킬러 / 한국명: 하길란(河吉蘭)
2. 생몰연도: 1900-1983.9.30.
3. 출신 및 소속: 스위스, 구세군
4. 한국선교기간: 1926.9-1950
5. 활동지역: 서울, 해주, 영동
6. 연표
1900. 스위스에서 출생
1926.9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
1927- 서울여자실업관장으로 봉직
경북 의성 및 황해도 해주지방관으로 일선 목회에도 임함
1936- 구세군사관학교 여자반 교사
1940.12.4. 일제에 의해 강체 추방
1948.12.1. 재내한, 영동구세군병원 부원장으로 취임
1950.6.25. 6.25 전란으로 일본으로 피난 후 스위스로 귀국
오스트리아 구세군사업책임자로 여자사회사업기관 관할
1960 정년퇴임
1983.9.30. 소천
7. 가족사항: 자료없음
8. 논저: 없음
9. 참고문헌: 기백 15권; 한국구세군사, 1975; 구세신문; 구세여록; 본영저널; 구세군 역군.


II. 선교사 소개: 하킬러(Hachsler, Anna 1900-1983)

구세군 여사관. 한국명 하길란(河吉蘭). 스위스에서 출생.

1926년 9월 구세군 한국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27년부터 서울여자 실업관장으로 일했고 경북 의성 및 황해도 해주지방관으로 일선 목회에도 임했다. 1936년부터 구세군 사관학교 여자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8년 12월 1일 재내한 한 바 당시 직급은 고등참령이었다. 곧 재건된 영동구세군병원 부원장으로 취임하였고 6·25사변 중에는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다시 내한하지 못하고 귀국하였고 그 후 오스트리아의 구세군 사업 책임자(지방장관)로 몇몇 구세군영과 여자사회사업기관을 관할하다가 1960년 정년퇴임하였다. 그 후 1983년 9월 30일 별세하였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Vol.XV. (서울: 기독교문사. 1985), 1539.

한국기독교사연구소와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구세군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 방문하여 하킬러 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조사했지만 많은 양의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료 조사를 통해 하킬러 선교사에 대한 기존의 자료보다는 조금 더 발전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한국기독교사연구소에서 자료를 찾던 중 『한국 구세군 100년사: 1908-2008』 1926년 사관들의 동향과 각종 사업 기록에서 하킬러 선교사가 내한했을 당시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구세군대학원대학교에서 자료를 찾던 중 『사령관 일지』를 통해서도 하킬러 선교사가 내한했을 당시에 대한 동일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8월에는 해외에서 사관의 충원이 있었다 ... 8월 30일에 하길란 정위와 차미령 정위가 도착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조선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9월 2일 이들을 위한 환영회가 열려 경성 제1영문에서 두영서 사령관이 인도하였는데, 하길란 정위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차미령 정위는 프랑스 사관이었다. 둘 다 영어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인귀지 부관이 이들의 말을 조선어로 통역할 수 있었다.

『한국 구세군 100년사』에 기록되어 있는 1926년 당시 기록을 보면 1926년 8월에 해외에서 사관의 충원이 있었고, 그 때 하킬러 선교사가 내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령관 일지』에 있는 1926년 8월에 해외 선교사관 증원(Reinforcements)이라는 기록과 함께 살펴볼 때, 1926년 8월 당시 구세군 사관들의 신임사관 임명과 파송, 충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킬러 선교사가 내한했을 당시 직급이 정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하킬러 선교사는 내한했을 당시 직급이 정위였고, 1948년 재 내한했을 때 당시 직급은 고등참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대백과사전』 16권에 보면 구세군 사관의 계급과 승급에 대한 기준이 정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년간의 훈련을 마치면 부위로 임관되며 임관 후 5년간 봉직해야 정위로 승급한다. 그리고 임관 후 20년간 봉직해야 참령으로 승급한다. 물론 여기에는 사관 자신의 건강과 중책을 감당할 만한 인격, 헌신, 실력 등이 따라야 한다 ... 그리고 이 사관의 계급제도는 국제적으로 어느 지역, 어느 사업에 종사하든지 사관 전원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

하킬러 선교사가 내한했을 당시 정위였는데 1948년 고등참령이 되었음을 구세군의 계급과 승급제도를 근거로 생각해볼 때, 하킬러 선교사는 내한하기 전부터 사관학생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한한 직후 서울여자실업관장, 경기도 의성 및 황해도 해주지방관, 구세군 사관학교 여자반 교사, 영동구세군병원 부원장으로 활동한 기록과 『구세군 역군』에 기록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칭찬받을만한 구세군 선교사였던 것 같다.

에밀 부른너가 4년 전에 내한했을 때 서울 YMCA에서 그녀의 신앙을 칭찬하였다. 강한 신앙 성격이었다.

다음으로 하킬러 선교사와 관련된 구세군의 정신과 사역들을 살펴보았다.

1) 구세군의 정신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적 규모의 교단이다. 이 교단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세 가지 기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또한 한 가지로 간주되기도 한다. 즉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둘째 신앙공동체 형성, 셋째 빈곤과 악을 타파하고 사회개혁을 수행해 나가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이런 구세군의 박애주의적이고 개혁적인 활동은 구세군의 자연스러운 진화적 발전의 결과로서 이러한 발전된 요소들은 구세군의 근본취지인 전투적 복음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구세군의 모든 활동의 밑바닥에 흐르는 목적은 단순한 복음 전도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어떤 장소에서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2) 구세군 사관학교

구세군 교역자 양성기관이다. 구세군사관학교는 교육이념을 혈화사관양성에 두고 이를 위해 1)지적교육 2) 신령상 생활훈련 3) 전장실습훈련 등 세 방면에 걸친 교과과정을 작성하여 교육하고 각 영문사관들은 영문에서의 전장실습을 돕고 있다.
1908년 10월 구세군이 한국에 개전된 지 불과 17개월만인 1910년 2월 15일 사관학교가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서 개교되었다. 18년에는 여자 사관 학생 교육을 실시했으며 28년 정동으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40년 11월 교단이 ‘구세군’에서 ‘구세단’으로, ‘사관학교’가 ‘구세학원’으로 개칭되어 불려졌고 그것마저도 42년 3월에는 허용이 안 되어서 강제 폐원되었다. 여자반 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하킬러 선교사도 40년에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강제 추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킬러 선교사가 부원장으로 있었던 영동구세군병원에 대한 자료는 유난히 찾기 힘들었는데 구세군대학원대학교에서 발견한 『구세전선의 숨은 사실』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3) 영동 구세병원

경부선 영동에 자리잡은 구세군 병원은 1934-1972년까지 38년의 긴 세월에 연유되었으면서도 남은 기록은 1942년 구세군 영동병원 안내서라는 한 조각짜리 문서 1953년에 김혜득씨가 쓴 두 장짜리 약사 그리고 찐 스미드 간호원이 코리아 콜링에 보고한 것, 개원 당시의 기독교신문에 또 동아일보에 일반병원 리스트에 든 기사 구세공보에 얼마간 있을 뿐이다.
위도선 사령관의 영문 비망록에도 별로 자세한 것이 없다. 영동으로 유치했고 한때 원장을 지낸 고 박창래 부령에게서 회고담을 들은 일이 있다. 한국 구세군사에서 필자가 추적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다. 땅 1673평 건평 145평 침대 40개의 종합병원이 개전 25주년 기념으로 만국본영의 20만원 보조와 지방유지의 대지기증으로 1942년 4월 27일 개원 이후 이용점, 윤치왕, 임의선, 고병간 등 거물원장들이 있었고 미국의 이치선 박사 내외, 계부선 박사 내외 또 간호원으로 케지 웰람, 케픽스 스미드 등이 주력했으며 6·25 전 하킬라 참령도 사무장이었다. 미국의 가정단 등 원조도 컸다. 1963-65년간 나는 잉글 사회부 서기관과 함께 자주 방문하였다. 한국사관으로 성낙철, 박창래, 장운복 원장도 있었다.
본영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재정원장 및 보조부 비품 및 원장 약품장부 구입 약품장을 검사하고 물품현황 보고서로 사무실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실험실, 약국, X선과, 간호원실, 지하실, 수술실, 원장실에서 351종 500여점을 점검하고 재고·의약 238종을 따지며 의료서적 30, 의료기구 39점을 다 체크(1961년분)해도 한 달 수지가 11,888,268원이었다.
1951-53년간 입원 11,263명 중 무료 10,566명 외래환자 13,598명 중 무료 9,462명이라 했다. 한때는 인근 부락에 자동차 전도대로 복음전파와 물자구호도 힘썼다. 병원운영이 어려웠던 것은 지역관계와 전문의가 아닌 구세군 당국의 운영방법, 의료진 확보난인데 제자리에서 전업을 하는 개업의가 많았고 외국원장들은 소위 수입위주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수많은 인원(구세군인 포함)이 거쳐 갔고 영동영을 중심하여 구원의 복음의 전파로 뿌린 씨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1972년엔가 서울에서 계속한다는 명목으로 1,528만원에 매도한 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1953, 당시에 허연욱, 권정자 증 의과대학생에게 위도선 사령관이 장학금을 주었는데 권 의사만 병원에 의무적으로 봉사하였다.

하킬러 선교사가 1948년 부원장으로 취임한 영동구세군병원은 38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정보가 별로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구세군 정신에 입각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는 사실을 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작성일:2019-12-13 14:16:03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