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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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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Moore, John Zachariah II(1874-1963, M) / Benedict, Ruth E.(1884-1968, M)

닉네임
김소미
등록일
2019-12-13 17:36:00
조회수
1296
첨부파일
 Moore, John Zachariah II(1874-1963, M) 과 Benedict, Ruth E.(1884-1968, M), 3-5반 2017210277 김소미.pdf (2539929 Byte)
내한선교사 / B063 / Moore, John Zachariah II(1874-1963, M) / 3학년 5반 / 2017210277 / 김소미


자카리아 선교사 / Moore, John Zachariah (1874-1963)

I. 기본사항

1. 이름: Moore, John Zachariah / 자카리아 / 한국명: 문요한(文約翰)
2. 생몰연도: 1874.1.8.-1963.8.6.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3-1940.
5. 연표1874.1.8.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출생 오하이오의 사이오대학 졸업1903 드루신학교 졸업 1903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정동교회에서 목사안수
평양으로 부임, 관서지방의 교회, 교육기관 설립에 헌신
1905-14 미국에서 로니(Alpha Roney)와 결혼,
해외선교 사업을 하다가 부인 사망(1914) 후 재내한
평양을 중심으로 함께 교회와 교육사업
광성학교(1894 설립) 제2대 설립자로 학교 발전
정의여학교(1899 개교)의 고등보통학교 인가에 도움
1915 마운트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
1915.9.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설립
1916 베네딕트와 결혼
1931.11. 평양 요한학교 설립
1940 강제귀국 1941 마운트유니온신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
1963.8.6.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1968 헐리우드에서 84세로 부인 사망
6. 가족사항부인: Moore, Ruth E. Benedict / 생몰연도: 1884-1968
1910-1940년까지 30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한국이름은 변해덕이었다. 결혼 후 한국이름을 문로덕(文路得)으로 바꿨다. 무어선교사와 결혼 후 평양여자성경학교 교수와 지방사업으로 활약했다. 1941년 일제의 추방으로 귀국하였고 1968년 894세에 별세하였다. 외국여자 선교사 명단(1869-1940)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고, 남편인 무어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만난 것으로 짐작된다.

Ⅰ. Moore, John Zachariah II (1874-1963)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문요한(文約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3대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사이오대학을 거쳐 1903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그 해 5월 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되었던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서 무어(D.H. Moore) 감독에게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당시에는 신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안수받는 선교사가 많았다. 무어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평양으로 파송되어 2년 전에 먼저 온 모리스(Charles D. Morris) 선교사의 협조자로서 관서지역 선교사업에 주력하였다. 1905년 귀국하여 로니(Alpha Roney) 양과 결혼하였고, 그 후 계속 미국에 머물면서 선교본부 해외선교사업을 도왔다. 1914년 부인과 사별한 후 다시 내한하여, 먼저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베네딕트(Ruth Benedict) 양과 재혼한 후 평양에서 지내면서 40평생을 관서지역을 위해 일하였다. 1887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다녀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평양의 선교사업이 시작된 것은 1893년 의사 홀(W.J. Hall)에 의해서였다. 홀은 서문통에 한옥을 구입하고 교육사업(광성학교)과 의료사업(평양기독병원)과 복음사업(남산현교회)을 시작했으나 1895년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 그 후 노블(W.A. Noble) 선교사가 평양에 머물면서 평안북도 의주, 영변, 박천 등지와 평양, 진남포, 강서 그리고 황해도 사리원, 신계, 서흥, 곡상 등 넓은 지역을 순회하며 교육과 복음전파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1901년부터는 모리스 선교사가 노블 선교사의 후임으로 북한 선교사업을 담당하다가 1914년 무어 선교사가 다시 평양으로 임명되자 모리스 선교사는 평안북도만 담당한 후 영변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그때부터 1941년 일본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무어 선교사는 일생을 평안남도와 황해도지역을 담당하며 헌신하였다. 무어는 한국 민족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소명감에 시골길을 걸어서 다니기도 했고, 말을 타고 밤낮 없이 순회하기도 했다. 교세가 약한 교회에는 월급을 주어 교역자를 보내주었고, 교회당이 없는 교회에는 보조금을 주어 성전을 건축하게 했으며,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무어 선교사가 있던 지역의 의료기관은 처음부터 의료선교사들이 운영을 맡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육사업은 전문대학이 아니면 교회사업을 맡은 선교사들이 교육까지 담당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무어 선교사는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해주, 연백, 평양, 대동, 중화, 용강, 강서, 순천, 진남포 등지에 많은 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학생들의 수업료 외에 부족한 학교 운영비도 거의 무어 선교사가 충당했다고 한다. 1893년 홀에 의해 설립된 광성학교는 1903년 무어 선교사가 2대 설립자로 취임하여 장소를 경창리로 이전하고 본관, 과학관, 체육관, 무도관, 강당 등을 건축했다. 1918년에는 일본 문부성의 인가를 얻어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시설도 공립학교에 비해 우수하고, 자격도 고등보통학교의 허가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광성고등보통학교는 관서지방에서 유일하게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기독교계 홍현설 박사, 김용옥 박사, 윤성범 박사, 정일형 박사 등 인재를 양성했고 미술계, 정치계, 교육계, 법조계 등에서도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한편 1899년 5월 미감리회 제15회 한국선교회에서 결의를 얻어 노블(W.A. Noble) 부인과 폴웰(E.D. Follwell) 의사가 시작한 평양 정의여학교도 설립자 겸 이사장을 맡은 무어 선교사의 노력으로 1920년 문부성에서 여자고등보통학교 인가를 얻어 평양에 유일한 명문사학이 되었다. 또한 무어 선교사는 1916년 당시 여선교사업으로 평양에 주재해 있는 로빈스(H.B. Robins) 선교사로 하여금 여자성경학교의 교수가 되어 남산현교회 주일학교 교실에서 20여 명의 여학생을 모아 가르치게 했다. 그것이 북한지역 여교역자 양성기관인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의 시작이었고 무어 선교사 자신은 설립자가 되어 수옥리에 독자적인 교사(校舍)와 기숙사를 짓도록 협조해 주었다. 그리하여 설립부터 1945년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북한지역의 유치원 보모, 초등학교 교사와 교회 여전도사로 일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전문학교와 대학으로 진학케 하여 전국 여성계의 지도자도 양성하게 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감리교 교역자의 수가 늘어가는 교회의 수를 따르지 못함을 생각하고, 자신의 한국 선교 35주년 기념사업으로 1938년 3월 평양에 신학교육기관인 요한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44년 폐교를 당했고 졸업생은 1백여 명 정도밖에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리인, 강용직, 김성렬, 강성원 등 여러 사람이 8.15 이후 교역자가 부족한 북한에서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다 순교하기도 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되기까지 근 40년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관서지역에 1백 60여 교회와 30여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많은 이들에게 복음과 지식을 전하였다. 1925년 일본 정부의 표창을 받았고, 그가 이 땅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전도, 교육사업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표창했다. 1963년 8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자 그 해 12월 15일 한국에서는 광성고등학교 동문과 요한학교 동문들이 서울 광림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자녀로는 1남 1녀가 있다. 그의 부인이 1968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그 다음해 1월에 이환신 이윤영 윤창덕 이봉구 윤춘병 등 수십 명의 요한학교와 광성학교 동문들이 시온교회에 모여 애도하는 예배를 가졌다.


II. 선교사 소개: 무어 / Moore, John Zachariah II (1874-1963)

1. 평양대부흥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고 평양대부흥이 가져온 놀라운 한국의 변화를 눈으로 몸소 체험하고 알린 선교사

한국에서 평양대부흥을 경험한 무어 선교사는 한국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한국과 서양의 연결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에서 모든 삶에서 단순하게 순전한 기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서양 사람들도 이러한 점을 배우는 것이 온전한 복음을 나아가는 길임을 이야기했다.

Until this year [1907] I was more or less bound by that contemptible notion that the East is East and West, West, and that there can be no real affinity or common meeting ground between them. With others I had said the Korean would have a religious experience such as the West has. These revivals have taught me two things: First, that though there may be a thousand things, on the surface, that are the direct opposite of the West, the Korean is at heart, and in all fundamental things, at one with his brother of the West…In the second place these revivals have taught me, that in the matter of making all life religious, in prayer, and in a simple, childlike trust, the East not only has many things, but profound things, to teach the West, and until we learn these things we will not know the full-orbed Gospel of Christ.

J. Z. Moore는 한국에 대한 글을 많이 기고했다. 그는 평양대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었던 한 청년은 성령의 불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348명의 부모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고, 그들은 20년 동안 가지고 있던 술집 운영을 포기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무어선교사는 예로 들어 주고 있다. 약 0.5 마일 떨어진 두 개의 큰 도시에는 두 개의 강력한 그룹이 있어 서로 분열하고 대립했지만 부흥으로 인해 고통과 눈물, 자부심, 질투, 증오에 대한 큰 고백이 있었으며, 이제 그들은 큰 기와 지붕이 있는 교회를 짓는 데 연합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무어선교사는 글로 전해주고 있다. 성경 연구 수업 외에, 거의 모든 큰 교회와 작은 교회는 거의 1주에서 3주 동안 부흥 사경회를 했다. 평양대부흥에 참여한 한국인 설교자들이 주도했으며, 그 결과 교회 전체가 교회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집회는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죄를 고백하고 과거를 회복하며, 그 뒤에는 용서받은 진정한 죄의식과 봉사의 깨끗함과 능력으로 성령의 새로운 탄생과 세례를 확신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무어선교사는 전한다.

무어선교사가 생각하기에 한국인은 서양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고, 일어난 부흥은 모든 생명을 종교적으로 만들고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는 것에 있어서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울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평양대부흥으로 인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이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완전하고 완전한 구원이 되었으며 말 그대로 수백 명의 게으르고 변덕스럽고 목적이 없는 한국인들을 복음의 힘의 동력으로 바꾸었다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무어선교사는 기록하고 있다. 무어선교사는 기독교가 사람들의 영적 필요와 굶주림을 만족 시킨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확신했다.

Mr. J. Z. Moore, writing to “The Korea Field,” says, “Many incidents could be told but two must suffice. A young man who had been a Christian for some time received a strange new fire into his life and went to his 348 parents, who were not Christians, pleading with them in tears. They gave up keeping the saloon they had had for twenty years and are now earnest followers of Christ. In two large towns about a half mile apart there were two quite strong groups. Ever since I have had the work I have been trying to get them to unite and build a church, but a church quarrel has always frustrated not only our plans for the church but the Lord’s work in that section as well. The revival came and there was great confession in agony and tears, of pride, jealousy and hatred, and now they are united in the building of a large tile-roofed church. Besides the Bible study classes, nearly every one of the larger churches and some of the small ones have had revival services lasting from one to three weeks. The native preachers having taken part in the Pyeng Yang revival took the lead in this work, which has resulted in transforming churches all over the circuit. These meetings were times of heart-searching prayer, confession of sin and restoration and straightening up of the past in so far as was possible. This was followed by a real sense of sins forgiven, joy in the assurance of the new birth and baptism of the Holy Spirit in cleansing and power for service.”

“These revivals,” he continued, “have taught me two things. First, the Korean is at heart and in all fundamental things at one with his brother of the West. In the second place these revivals have taught me that in the matter of making all life religious, in prayer and in a simple childlike trust the East not only has many things but profound things to teach the West and until we learn those things we will not know the full-orbed Gospel of Christ. Best of all,” he adds, “this revival has written another unanswerable chapter of Christian 349 evidences. The old gospel of the cross and the blood and the resurrection now has become a free, full and perfect salvation to multitudes and has taken literally hundreds of lazy, shiftless and purposeless Koreans and turned them into very dynamos of evangelistic power. Not only this, but it is proven that Christianity does satisfy the spiritual needs and hunger of the people.”




2. 한국의 여성들에 관심을 가졌던 선교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햇다. 특히, 복음을 통해 자유함과 해방감을 느낀 여성들 사이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강하게 일어났다. 무어는 복음의 확장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잘 말해줬다. 펑양에서 여성들의 수업 시간에 죄의 용서와 중생에서 평화와 기쁨의 충만함을 받은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어 선교사에게 누군가를 보내거나 교회에 보낼 수 있다고 간청했다고 무어선교사는 회고한다. 이 여성들이 지역 교회에 부흥을 가져 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는 보고를 무어선교사는 이야기 한다.

At the time of the women’s class in Pyeng Yang women who had received new experience of sins pardoned and fullness of peace and joy in the new birth, came to me with tears, pleading that I might go or send someone to their church, that all might have this new experience and live. In some cases these women themselves were the means of bringing the revival to their local church.
4.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돕는 역할을 한 선교사



1950년 12월 18일자 LIFE라는 잡지에는 무어 선교사가 쓴 기사가 실려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12월에 쓴 이 기사는 무어선교사가 평양에서 있을 때, 만난 이영하라는 인물의 사진 속 주인공이 공산당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무사하기를 소망하고 그의 납치소식을 알리는 글이다. 이영하는 평양의 크리스찬 리더 중 한 사람으로 당시의 평양의 교세는 30만의 기독교인들과 약 70개의 자립교회가 있었고, 큰 규모의 기독교 학교들과 병원들이 있었던 것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영하와 함께 사역을 했던 장로교의 장로였던 김통원은 평양에서 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러시아 군대가 평양에 들어와서 공장의 모든 기계들을 모조리 가져가고, 소 50마리를 도살해서 줄 것을 강제로 요구하자 그날밤 김통원을 평양을 몰래 빠져나와 160마일의 거리를 걸어 서울로 도망오게 되었다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그후 그는 서울에서 그의 가족들을 만났고, 한국의 첫 대통령인 이승만을 크게 돕는 조력자가 되었다.

무어선교사는 그의 기사에서 많은 한국의 리더들이 북으로 강제로 압송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영하는 평양에서 머물며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리더로 있던 서울의 남산교회가 불에 타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그를 납치해 간 상황을 기사를 통해 무어선교사는 전하고 있다.

4. 한국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의 주역을 키운 선교사

평양의 요한학교는 1938년, 평양에서 활동한 감리교 문요한 선교사가 한반도 북쪽지역의 교역자 부족 현상을 해소하려고 이환신 목사를 학감으로 초빙하여 개교한 교역자 양성기관이다. 처음에는 교명을 ‘요한신학교’로 하려고 하였으나, 감리교회에 신학교가 둘이 있으면 교단이 분열된다 하여 ‘신’(神)자를 떼고 개교하였다. 교수로는 이환신 홍현설 전영택 서남동 변종호 목사와 시카고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온 이유선 등이 활약했다. 감리교신학교인 이 학교는 모두 100여 명의 학생을 졸업시킨 후, 일제 통치 말기인 1944년 총독부의 탄압으로 7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7년으로 단명한 이 요한학교는 한국의 사회와 교계에 교회음악과 어린이 동요 방면에서 출중한 대가들을 배출하였다. 이유선은 이 학교에서 음악을 교수했고, 구두회와 박재훈은 동기로 장수철이 2년 선배였으며, 작사자 윤춘병과 이태선도 요한학교 동창들이다. 윤춘병은 ‘높고 높은 하늘이라’(어버이 은혜)를 작사했고, 이태선은 ‘꽃가지에 내리는’ ‘시냇물은 졸졸졸졸’ 등 1천 여 편의 동요와 어린이 찬송가를 지었다. 이들이 지은 찬송이 지금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새 찬송가’에 여러 편 수록되어 애창되고 있다. 이유선 작곡의 찬송가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23장)과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597장)가 있고, 장수철 작곡 찬송가는 ‘고요하고 거룩한 밤 구주 예수 나셨다’(110장), ‘주는 나를 기를 시는 목자요’(570장)가 있고, 구두회 작 찬송가은 ‘나와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271장),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있고’(55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579장)가 실려 있으며, 박재훈 작곡 찬송가도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이들 이유선, 장수철, 구두회, 박재훈, 윤춘병 이태선 이들은 목사와 장로로 봉직하였으며, 모두 평양요한학교 출신들로서 한국의 찬송가 작곡과 동요 부분에서 우뚝한 태두다. 그 중에서도 박재훈은 300곡의 동요와 500곡이 넘는 찬송가를 창작했다. 박재훈 곡 찬송가는 현행 ‘새 찬송가’에는 ‘어서 돌아오오’(527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301장) ‘주여 어린 사슴이’(392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515장),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592장) 등 9곡이 수록 되어 있다. 한편 박재훈은 또한 ‘높고 높은 하늘이라’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산골짝의 다람쥐’ ‘시냇물은 졸졸졸졸’ ‘송이송이 눈꽃송이’ ‘매미 동무는’ ‘펄펄 눈이 옵니다’ 등 동요 160여 곡과 ‘꽃가지에 내리는’ ‘흰 구름 뭉개 뭉개 피는 하늘에’ 등 130곡을 창작했다.
장수철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여’(570장)을 작곡했다. 그가 요한학교에서 공부할 때, 당시 부흥계의 거장 심언(心言) 박재봉 목사가 만주 일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동족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저 목자여’ 찬송시를 지어서 장수철이 그 가사에 곡을 붙였다. 그 때가 1939년으로, 이때까지 한국교회는 서양인 작곡의 찬송만을 불러왔었다. 장수철 곡의 ‘저 목자여’ 이 찬송가는 한국인이 작곡한 최초의 찬송가로 찬송가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 작사자 박재봉 목사가 남긴 친필 족자 서예 글씨 한 점이 남아 있다. ‘愛大積少’(애대적소). ‘사랑은 한 없이 크게 하고, 쌓아 놓기는 적게 하라.’는 말이다. ‘저 목자여, 깊은 잠을 깨어 이러라/ 비탈길을 싸고 돌 제 다리 아프고/ 산마루를 올라갈 때 숨이 막혀도/ 주린 양떼 생각하며 참고 갈지니/ 몸에 걸친 단벌옷이 내게 족하고/ 짚고 나선 지팡이가 넉넉하여라/ 심언 목사는 ‘전도자는 우선 가난하기부터 배우라’고 외쳤다.

독립운동 목회자 손정도 목사의 자는 호건(浩乾)이며 호는 해석(海石)이다.1882년 7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토착 유학자이며 부농인 가정에서 출생하셨다.6세 때 사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셨다(신학세계3호)23세 청년시절인 손정도는 1902년 겨울에 관리가 되기위한 시험을 치르러 평양으로 길을 떠나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조목사가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교리를 손정도에게 설명하는 동안 손정도는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다. 이러한 신비체험이 있은 후 다음날 아침 조목사는 손정도의 상투를 짤랐고 손정도는 평양을 포기하고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Moor 1874-1963)목사와 함께 고향으로 가 사당을 부두는 활동등의 신앙적 결단을 보이고 증거하였다. 어느날 밤 집안 어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손정도는 눈덮힌 들판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신앙 메모에 의하면 그날밤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날밤 청년 손정도는 속옷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덮힌 산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다 실신하였고 인근 주민들에 의해 구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과 결단을 가진 손정도는 단신으로 평양으로 가 문요한 선교사 집에 머물면서 일하였고 문 선교사는 손정도를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으며,고학하면서 1908년에 숭실중학을 졸업하였다. 손정도는 13세때 2살 위인 박신잉과 결혼하였고 시집에서 견디지 못한 부인은 평양으로 남편을 찾아 왔으며 평양 기독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남편의 학비를 도우며 자녀를 양육 지도하였다. (당시 자녀는 진실,성실,두 딸이 있었음).손정도는 숭실 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서울로 단신 유학길을 떠나 협성신학당(현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로 훈련 받았으며 또한 서울지역 교회를 출입하면서 전덕기 목사 뿐 아니라 이승만,이동령,이시영,장지영,이준,노백린,조승한,이갑,최남선,이필주 등과 어울려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손정도는 1910년 협성신학당을 졸업하고 진남포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그의 목회는 곧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5. 평양지방에서 3.1.독립운동을 바라본 선교사

평양지방 감리사 문요한(文約翰) 선교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교회형편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즉, “본 지방회를 개(開)하려 할 때에 조선 목사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최하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이는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교사, 주일학교 교사의 합계가 160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3월 1일에 이 운동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그 영향이 있다’”(조선연회록,1919. P81.)

문요한 선교사는 평양지방의 목사가 28명인데, 그 중 14명이 금고 되고 4명은 사직하였다고 보고했다. 집사목사 안수 받은 10명도 금고 되고 1명이 신병으로 휴직해 연회 때에는 2명만 남았다고 했다. 평양성내 5개처 회당에서 담임목사 6명이 금고 되어 여러 회당에서 본처 전도사인 1명과 교회임원이 합력하여 교회 사무를 처리해 나가는 형편이라 하였다. 평양 1구역만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데, 전도사를 파송하면 1주간도 못되어 또 금고 되므로 예배를 정지하는 지경에 이른 곳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일은 실패되지 아니 하였나이다”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82.)






내한선교사 pdf파일입니다.

한학기동안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작성일:2019-12-13 17:36:00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