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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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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Toft, James(1865-1928, SA) / Toft, Hildaralson(미상, SA)

닉네임
박진선
등록일
2019-12-13 18:23:18
조회수
106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6반_B130_박진선_.hwp (29184 Byte)
내한선교사/B130/Toft James (SA)/3학년6반/2017210359/박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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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영서 선교사 / Toft James, 杜永瑞, 1865.7.4.-1928.6.12

Ⅰ. 기본사항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수정 증보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년, p.499


1. 이름: Toft, James / 토프트 / 한국명: 두영서(杜永瑞)
2. 생물연도: 1865.7.4 – 1928.6.12
3. 출신 및 소속: 영국에서 출생, 구세군
4. 한국선교기간: 1926.8.16 – 1928.6.12
5. 연표
1884. 사관에 임명, 1890 힐다랄손과 결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미국, 인도 등에서 봉직
1926.6.1. 국제본영 조선사령관 인사발령
- 사령관 배일수 참장의 국제본영 인사발령으로 후임에 참장 터푸(한국명: 두영서)가 조선 구세군 제 5대 사령관으로 인사 발령되었다. 이상정, 『구세군사관학교 100주년 기념논문집 2』, 구세군사관학교, 2010년, p.197

1926.8.16. 한국구세군 제5대 사령관으로 부임
1926.11 부우드의 방한시 한국인 사관의 동맹파업으로 교세감소, 사회적 영향력 감소
정동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 신축 등의 많은 사업확장
1927.09.23. 사관학고 성별일 – 사령관 두영서 참장이 사관학교에서 성별일을 인도하였다. 이상정, 『구세군사관학교 100주년 기념논문집 2』, 구세군사관학교, 2010년,p.198

1928.6.12. 신병으로 소천, 양화진에 안장
6. 가족사항: Toft, Hildaralson(부인)
7. 논저:
8. 참고문헌: 기백 15년; 한국구세군사, 1975; 구세신문; 구세군 본영저널; 선교연감; 동아일보, 1926.


Ⅱ. 선교사 소개: 토프트(Toft James, 1865-1928)

1. 두영서 사령관 신임

1926년 8월 16일 월요일, 토푸트 참장 내외는 서울역에 도착 육아원 악대등 다수 출영하다. 8월 19일 이규연 사관이 하와이서 전근 세 자녀와 함께 오다. 30일 하길란, 차미령 두 사관이 나오다 나까이 사관이 일본인 영을 순회하다. 8월 23일 2영에서 25일 일본영문에서 신임 두영서 사령관 환영회, 그는 1884년 영국서 사관이 된 후 서전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미국 및 인도북군국에서 40년간 일했고 서전 국적의 그의 부인은 농아사업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하나님의 지혜로 유익을 기원하며 기회를 이용, 기도로 승리코저 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사업에 전력하는 자에 하나님께서 복주 신다는 취임 메시지가 전해졌다.
신임 사령관의 환영회는 8월 23일은 서울, 9월 4일 고산, 10일 영동 심천 주곡, 11일부터 대구 영덕,13일 의성(임시 사관회), 26일 홍성(감리교 사경회중인데 그 예배당에서 환영회, 홍성 감리교회), 29일 개성, 10월 7일 전주, 14일 해주서 각기 환영회 및 사관회를 보다. 9월 2일 희성지방을 대구지방서 분리 황종률 부관이 지방관으로 임명됐다. 9월 말에 육아원 악대가 해주지방과 평양 등 수 개 처를 순회했다. 해주지방서 전도마차로 전도 24명이 구원되다. 채 성신 전도부인이 칠곡서 승천하다(10월). 그는 초창기의 유능한 일꾼으로 서울 경상도에서 많은 봉사를 했다. 9월 17일 제18기 34명의 사관학교가 개교되고 9월 21일 천연동 117에 여자 부양소(여자관) 신축낙성되다. 장로교 감리교의 선교사 협의회서 모은 돈으로 세운 것, 장 감 총회로 상경중인 인사다수가 내참 감리교 히취 목사가 재정보고 호주장로교 맥킨씨축사 웰치감독이 축도하다. 육아원악대도 나왔다. 10월 12일 서울서 연합병사회가 있었다. 10월에 전 황태자 쿠스타푸공이 내한 조선호텔에서 옥거흠부인 변세돈 인귀지등 서전사관들이 예방환담했다. 우일 그는 경주의 서봉총 발굴과 최씨와 일생 인연이 깊었다. 11월에 인천에 토지를 매입하다. 11월 위도슨 그리고 나중 콜라(그의 부인)가 남아프리카서 나왔고 해리스 사관이 캐나다서 나왔다. 10월에 두영서는 사이또 총독을 예방하였다. 그가 부임한지 석달도 못되어서 맞이한 큰 일은 뿌람웰 뿌드 대장의 내방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장형일, 『구세군 한국사』, 구세군대한본영, 2004년, pp.91-92


2. 분규사건

2.1 원인 ‘삶터 속 근현대 역사순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3년, pp.108-109

1913년 1월 11일 구세군 사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평동에 새로 건축되어 ‘윌리엄 부스 대장 기념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5년 1월 15일에는 경성 제1영의 낙성식이 있었으며 1916년 6월 1일에는 열흘 간 한국 구세군 최초의 군국총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허가두를 대신하여 제2대 사령관으로 정령 부래지(George French)와 3대 사령관 참장 신태빈(William Steven)이 내한하였다.
1919년 조선의 3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신태빈 참장은 인도에서 34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영국인들이 인도인 대하듯 조선인을 대했다. 식민지 사람 취급을 한 것이었다. 가령 그는 후생학원을 신축하고 변소를 짓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인도에는 변소가 없고 대변은 까마귀가 다 먹어 치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문화 전반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채 인도에서의 경험을 강조함으로서 조선인 사관들의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뒤이어 부임한 배일수(Wiebe Palstra) 참장은 매우 서민적이고 조선인들에게 ‘사랑의 인도자’라고 불릴 만큼 조선인들과 매우 친숙하고 융화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조선인 사관들의 입장에서 많은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다 1926년 8월 갑자기 제5대 사령관으로 두영서(Toft James) 정령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신태빈 참장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근무했던 선교사관이었다. 특히 그가 인도군국에서 행한 거만한 태도를 조선인들에게 보이는 것은 분노를 일으킬만 했다. 일제하라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특히 한국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한 사령관 밑에서 한국인 구세군 사관들은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두영서 정령은 조선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조선인들 또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10월 유구영문의 김덕준 부위가 진정서를 작성하여 조선인 사관들의 처우를 개선하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면직 당하자 조선인 사관들은 외국에서 온 사관들이 자신들을 식민지인으로 취급한다고 느끼게 되면서 더욱 큰 불만이 증폭되고 있었다.

2.2. 분규사건 전개
이때 계획된 11월 2대 사령관 브람웰 부스 대장의 조선 방문은 조선인 구세군 사관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였다. 이들은 진정서를 작성하여 마침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대장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 진정서의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해서 살필 수 있다.
첫째,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자는 요구였다. 조선인 사관들은 선교사들이 재정 내용을 공포하도록 요구하였고 선교자금 등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밝히기를 요구하였다.
둘째는 차별대우의 폐지였다. 조선인 사관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폐지하고 온정주의적인 취급을 중지하도록 요구하였다. 조선인 사관의 부당 파면, 조선인 사관 구타, 선교사의 한국인 구타 등에 시정을 요구하였다.
셋째,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조선인 사관들에게 행정적 직위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구세군의 조선 개전이 18년이 지났음에도 조선인 사관들이 무시당하고 있었다. 지방관은 물론이고 큰 영문까지 서양 사관들이 담임하였다. 30여명의 선교사들이 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격 미달자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일본인의 억압을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종교적으로까지 억압을 받고 종교 사업에 대한 참정권까지 박탈당해야 하는 사실에 분노하였던 것이다.
넷째, 정화에 대한 요구였다. 선교사들의 성폭행 같은 부정행위에 대해서 특별하게 처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섯째는 생활개선의 대한 요구였다. 조선인 사관의 기본 생활수준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인 사관들은 인간이하의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진정서가 대장에게 보내지기까지 진통이 극심하였다. 선교사관들은 진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조선인사관들이 대장과 접촉할 수 없도록 했고, 11월 7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대장 전도집회 때 강대상에 올려놓은 진정서는 두영서 정령에 의해 압수되었다. 이에 기도를 맡은 권용준 사관이 영어로 기도하자 선교사관들이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 등 집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 70여명의 한국인 사관들과 병사들은 서대문과 아현의 영에서 대장 면담을 요구하는 농성에 돌입했다. ‘삶터 속 근현대 역사순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3년, p.109

진정서의 전문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밑 사진자료 참고

그들은 즉시 경성 제1영문의 억센 두 명에 의해서 제지당했다. 사람들이 구원과 성결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1시간 동안 투쟁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사건이 끝나기 전에 사관학교는 문을 닫았고 사관학생들은 해산 시켰다. 조선 사관들의 반 이상이 무더기로 면직되었다. 그들 중 몇 명은 ‘구세군 개혁연대를 결성하여’ 대치하기도 하였다. 70명의 사관들이 단식투쟁을 통해 구세군의 처리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15명의 사관들은 결사적인 집단을 만들어 3일 밤과 낮 동안 구세군 본영 빌딩을 점거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경찰 중재에 의해 그 ‘연좌 항의’를 단념하는데 동의하였다. 물론 그들 중의 모두는 사직하였고 단지 한 사람만 복직되었다. 그는 후에 지방장관이 되었다.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구세군 출판부, 2008년, pp.194-195


2.3. 분규사건 결과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구세군 출판부, 2008년, pp.260-262

1926년 10월부터 11월까지 두 달여에 걸친 분규사건은 구세군 원리에 의하여 본영 방침대로 해결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조선 구세군에 미친 영향은 구세군 성장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⑴ 겨울 구호를 위한 기부금이 결손되어 낙담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업을 위한 기부금이 그리 많지 않아 상당히 큰 결손이 있었다. 아마도 최근 조선인 사관과 또 사관이 아닌 이들이 대체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행한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연민을 많이 읽어버린 탓으로 보인다. 『사령관일지』, 1926~1927년 ; 겨울 구호, p.129
경성의 빈민들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구호사업을 전망해 볼 때 낙담이 되었다. 기금 모금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령관일지』, 1926~1927년 ; 겨울 구호, p.136

⑵ 극기모금이 많이 감소되었다.
1927년 3월 15일부터 4월말까지 극기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적당한 판단이 아니었다. 지난 총회에서 일어난 사건 결과 신문에 인쇄된 기사들로 인해 우리에게 손해가 되었으며, 많은 사관들이 큰 효과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또 사관들이 면직되었고 사관학교에는 사관학생들이 아무도 없었기에 모금이 많이 감소되었다. 『사령관일지』, 1927년 4월 ; 극기모금, p.130

⑶ 『구세공보』 금주호 판매가 저조했다.
6만부를 인쇄하였지만 각 지역관들의 주문과 판매가 지난 몇 해 동안의 노력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 또한 몇몇 사관들이 대중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부끄러움은 분명히 26사건의 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었다.
⑷ 사관들이 면직되고 사관학생들이 해산되었다.
지난 총회에서 일어난 사건과 신문에 인쇄된 기사들로 인해 사관들이 면직되었고 사관학교에는 사관학생들이 아무도 없었다. 1926년에 있었던 총회에서의 문제 이후에 사관학생이 없었다가 처음으로 사관학생들이 입교하였다. 1926년 총회에서의 분규 문제로 지난 학기생들이 해산되었기에 이번 학기에 많은 관심과 희망이 집중되었다.
⑸ 두 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떠났다.
조선에서 서기장관으로 7년이 넘게 일한 후 도원의(트윌리) 부정령 동부인은 전근발령을 받게 되었다. 여러 번의 송별 모임을 가진 후 6월 27일 아침에 힐 참령 동부인과 딸 에반젤린이 조선에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사관도 소환되었다. 권경찬 정령보에 의하면 그 결과로 참모정위 나가이는 일본으로 소환되어서 서기관에서 연대장(지방장관)이 되었고 우에노 기관도 소환되었다. 소서별(솔즈베리)은 참모정위에서 부관으로 강등되었다가 본국에 소환되었다.
⑹ 사관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대장이 방문한 기간 중에 가졌던 전장사관 모임이 아직도 마음속에 생생한 가운데, 사관들 가운데 사기가 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보였으며 개개인이 지난 실수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따.
⑺ 영문이 폐쇄되었다.
1926년 총회에서 일어난 문제 이후에 5개의 영문과 13개의 분영이 폐쇄되었다.
⑻ 두영서(토프트) 사령관이 승천하였다.
1928년 봄에 여러 달 동안 사령관 두영서 참장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4월 한 달 동안은 본영에서 전적으로 일할 수가 없었다. 5월 중순쯤 참장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6월 13일에 발작이 일어났으며, 6월 15일 오전 3시에 참장은 승천하였다.
두영서 참장 동부인은 1926년 8월 16일 신임 사령관으로 조선에 도착하였고, 사관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2개월 후인 10월에서 11월에 분규사건을 맞게 되었다. 더욱이 부람웰 부스 대장 내한 시 준비를 위한 긴장감과 ‘26사건’의 책임을 느끼면서 내심 고민하였을 것이다. 급기야 심장 발작으로 이어지게 되어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후유증으로 조선 구세군은 힘을 잃게 되었으나 결코 하나님의 사역은 중지되거나 실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에 새로운 재기를 위해 힘써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2.4. 분규사건 회복
1927년 두영서 사령관과 구세군은 여러 사업들을 통해 분규사건의 회복을 위해 힘썼다.
⑴ 구세군 분규 사건에 대한 성명서 발표
사령관 두영서 첨장은 1926년에 있었던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27년 『구셰신문』 1월호에 사령관 참장 두영서 이름으로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한 그 진상을 말함”으로 발표되었으며, 이에 서기장관 도원의 정령보는 “서기장관 통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성명서에 따를 것을 종용하였다. 밑 사진자료 참고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구세군 출판부, 2008년, p.223

⑵ 영문, 사관학교 건립 및 문서사업
금년에는 많은 회관들이 건립되었거나 건립을 준비하였으며, 특별히 사관학교를 새롭게 건축하기 시작했다. 각 건물들은 적절한 구조로 잘 건축되었는데, 대구 영문회관, 개성지역 곤동리영문회관, 전라지역 독암리영문회관, 오리동영문회관, 영동지역 광평리영문회관, 개성지역 남촌영문회관, 영동지역 본영이 건립되었으며, 사관학교도 신축이 시작되었다. 또한 경성의 군국본영 근처의 부지를 중앙회관 신축을 위하여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경성 제1영문을 위하여 중앙회관(Center Hall) 건물을 세우고자 하였고, 또한 같은 도로상에 850명의 새로운 대지를 마련하여 그곳에 사관학교를 짓고자 하였다. 이 사관학교 건립은 여러 해 동안 소망해온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대지는 부람웰 부스 대장의 70회 생일사업으로 인해 주어진 것으로 미 남군국과 함께 노력한 결과였다. 이 건물은 1928년 봄에 완공을 목표로 시작되었고, 적어도 50명의 사관학생과 사관학교 교관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러 영문회관의 건립과 함께 번역 및 문서사업의 진전도 있었다. 번역서 및 구세군 서적의 보급을 통하여 구세군 교리와 방법에 대해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 여겨졌으며 조선 구세군이 질적인 성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1927년 1월에는 최초로 조선어로 된 「사관」지가 발행되었다. 창간호와 그 이후 2개월 마다 발행된 사관지를 조선 사관들에게 보급함으로 영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며 또 매 체이지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간증들을 하였고 구세군 사관들의 질적 수준을 향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잡지의 제작 및 편집은 사관학교 교장 로오도 참령이 하였다. 그리고 번역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헌들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전장사관 군령군율」, 「성서연구」, 「구세군용어사전」, 「성결에 이르는 단계」, 「조선어 군가」였다. 이중 「조선어군가」는 영문 선교 사업에 매우 큰 성과를 거두는 찬송가였는데, 261장의 구세군 찬송이 실려 있으며, 비슷한 장의 후렴이 실려 있어서 집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많은 은혜를 얻게 하였다.

2.5. 분규사건 교훈 김준철 사관, “한국 구세군의 역사적 조명”,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보고서 2008」,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본부, 2008년, p.61

이 분규사건으로 인하여 20년간 알차게 쌓아놓은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결과가 되었고 마치 곱게 자라던 어린 나무에 된서리가 내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 분규사건 중심에는 당시 선교사들의 종교 식민주의적 통치근성, 저개발국에 대한 서구적 선진국의 우월성, 문화적응에 대한 비도덕성과 몰이해에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건은 선교사들의 행정운영의 지혜와 영적인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일련의 문제해결은 당시 구세군 관점에서 보면 행정질서 유지를 위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한국인 사관들의 인격과 권익을 차별화 내지는 도외시한 행정적 조치는 한국 구세군 역사에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교훈을 찾는다면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정죄보다는 단련의 기회로 삼고 적극적인 자세에서 새로운 미래선교를 지향해나가야 한다.

3. 양화진 D-17

1928년 7월호 구세신문에는 “구세군 조선사령관 참장 두영서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Robert Chard(차우도) 서기장관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참장께서 조선에서 일하신 것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형편 아래에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조선 임명 첫해에 당하신 그 고난과 낙망은 육체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그것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여 건강이 악하되어 별세 2주일 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종말에는 이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영원한 나라로 가서 만왕의 앞에 계시게 되었도다. …
참장은 일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셨고 이 세상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신이가 되었도다.“ 구세신문, 구세군 조서사령관 두영서별세, Vol. 14 No. 7, 1928.7.


그는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사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Robert Chard(차우도) 서기관장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 제2묘역 D-17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어 있다. 신호철, 『양화진 선교사의 삶』, 양화진선교회, 2007년, pp.254-255


Ⅲ. 사진 및 기타자료


▲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에 기록된 진정서

필자 촬영. 2019.11.19.

▲양화진 D-17의 두영서 사령관 묘비(1)


필자 촬영. 2019.11.19

▲양화진 D-17의 두영서 사령관 묘비(2)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Course.
I have kept the Faith.
He is with Christ.
Jesus is Mighty to save.
Longing for the Morning are
His and His Children Esther.
(딤후4:7,8)


▲ 1926년 9월 구세공보. 두영서 사령관 소개.


▲ 1927년 8월 구세공보. 분규사건 후 두영서 사령관은 소망 중에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면서 “자비”란 시를 써서 신문에 게재하였다.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1』,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4년, p.551



▲ 1928년 7월 구세공보. 두영서 사령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참고문헌]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수정 증보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년

이상정, 『구세군사관학교 100주년 기념논문집 2』, 구세군사관학교, 2010년

장형일, 『구세군 한국사』, 구세군대한본영, 2004년

‘삶터 속 근현대 역사순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3년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구세군 출판부, 2008년

『사령관일지』, 1926~1927년 ; 겨울 구호

『사령관일지』, 1927년 4월 ; 극기모금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구세군 출판부, 2008년

김준철 사관, “한국 구세군의 역사적 조명”,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보고서 2008」,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본부, 2008년

신호철, 『양화진 선교사의 삶』, 양화진선교회, 2007년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1』,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4년

구세공보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
작성일:2019-12-13 18:23:18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