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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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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B085 / Pierson, Arthur Tap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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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5반박지훈
등록일
2019-12-13 18:37:35
조회수
820
피어슨 선교사 / Pierson, Arthur Tappan (1837-1911)

I. 기본사항

1. 이름: Pierson, Arthur Tappan / 피어슨 / 한국명: 피어선(皮漁鮮)
1. 생몰연도: 1837.3.6-1911.6.3
1.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1. 한국선교기간: 1910.12.-1911.1.
1. 연표1837.3.6. 미국 뉴욕주 뉴욕시티에서 출생1848.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Mount Washington Collegiate Institute) 등록 / 헬라어, 라틴어 배워 12살 때부터 헬라어 신약 성경 읽기 시작1850. 13세에 뉴욕시 테리타운 언더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 입학1852. 15세에 고등학원 졸업1852.5.28. 멀서가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 모임. YMCA 뉴욕 창립회원 100인 중 한명이 됨1853. 뉴욕주 클린턴(Clinton)에 위치한 해밀턴(Hamilton) 대학 입학 / 재학 중 그는 시학, 수사학, 어학에 몰두1857.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입학1860.7.12. 사라 프랜시스 베네딕트(Sarah Frances Benedict)와 결혼.1860. 유니온 신학교 졸업1860.4.3. 설교자로 인허 받음1860.5. 뉴욕시 제 3노회에서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음1860.8. 뉴욕주 빙햄턴(Binghamton)에 있는 제일회중교회 청빙 수락1863.8.-1869. 뉴욕주 워터포드(Waterford)시에 있는 장로교회 부임1869.2.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시에 있는 영향력 있는 포트 스트릿 장로교회 부임1872.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 조직하는 일에 앞장 섬1875. 38세의 나이로 미시건 대회의 회장 역임1870.-1882. 디트로이트 노회 총대로 미시건 대회 연차회의 참석(1876년만 제외)1873.-1883. 미시건 여자 신학교 이사 역임1871.-1885. 노스트웨스트신학교 이사 역임1883.10. 남부 필라델피아 장로교회 청빙1886.7. 헐몬산 100명 선교사 지원자 대회 때에 외지선교를 위해 설교한 장문의 호소문인 「선교의 위기」가 책으로 출판. 미국, 인도, 중국, 일본, 한국, 터키, 멕시코,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남해군도, 그리고 유럽에까지 영향
1894. A.J. 고든과 같이 복음찬송가인 「대관식 찬송가」(The Coronation Hymnal)를 공동
편찬 1889. 침례를 다시 받은 문제로 베다니 장로교회 사임 1891.10. 찰스 스펄천이 시무하던 런던의 메트로 폴리탄 터버너클 교회에 청빙 1893.6. 메트로 폴리탄 터버너클 교회에서 6천명의 청중에게 고별 설교 뒤 미국의 집으로 돌아옴 1895.2.2.-1901. 고든 선교훈련원 교장 역임 1910.10.19. 목회 50주년이 되는 해, 극동선교(일본, 한국, 중국, 시암, 인도, 미안마, 실론 및 이집트) 출발.
1910.12.-1911.1. 한국에서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 강해
1911.6.3. 오전 8시 향년 74세로 미국 뉴욕주 뉴욕시티에서 사망
1. 가족사항부인: Pierson, Sarah Frances Benedict (1836-1917)2남 5녀
-헬렌(Helen)
장녀인 헬렌은 프레데릭 커티스(Frederick S. Curtis)와 결혼 후 일본과 조선에서 40년간 선교 활동을 하였다.
-로라(Laura)
차녀인 로라는 미국 인디언들과 아파라치아 산악 거주민들을 위한 국내 선교사로 전 생애 를 바쳤다.
-루이스(Louse)
삼녀인 루이스는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장티프스에 걸려 사망했다.
-에딧(Edith)
사녀인 에딧은 오녀인 안나와 함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의 여성정착 사역을 위해 헌신하 였다.
-안나(Anna)
오녀인 안나는 파푸아뉴기니아에서 단기선교를 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델러반(Delavan)
장남인 델러반은 아더 피어선의 뒤를 이어 세계선교평론의 편집인으로 사역했고 피어선기 념위원회를 통해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을 세웠다.
-페런드(Farrand)
차남인 페런드는 코스타리카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했다.
II. 선교사 소개: 피어슨(Pierson, Arthur Tappan, 1837-1911)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조상열, 대한기독교서회(서울,2011), 25-59.


1. 아더 T. 피어선: 설교가, 초교파적 선교운동가, 성경학자, 교육행정가
피어선(Pierson, Arthur Tappan, 1837-1911) 박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과 영국등지에 널리 알려진 설교가이자,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초교파적 선교운동 지도자인 미국 북장로교 목사였다. 그는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1836-1895)과 드와이트 무디(Dwight L.Moody, 1837-1899)와 조지 뮬러(Geroge Muller, 1805-1898)와 찰스 스펀전(Charles H. Spurgeon, 1834-18932)과 존 와나메이커(John Wanamaker, 1938-1922)와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1832-1905)등과 같은 당대의 복음전도자들과 친분을 나누며 유명한 초교파적 선교 저널이었던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장으로 1888년부터 1911년까지 23년간 활동하였다. 또 뉴욕 YMCA를 창설한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YMCA에 열정을 바쳤다.
그는 평생 장로교 목사였지만, 선구적으로 교파를 초월한 연합선교운동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아 이를 설파하고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피어선의 성경에 근거한 초교파적 연합선교사상은 그가 소천한 후 그를 기념하는 성경학교를 서울에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설립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경학자며 성경교사였다. 전천년왕국설 지지자이기도 한 그의 모든 신학의 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그의 청교도적 집안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청교도적 전통을 간직한 집안에서 이럴 적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란 피어선은 12살 때부터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해 그 후로 62년 동안 성경을 공부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피어선을 성경학자이면서도 성경 앞에서 늘 배우려는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1874년에 일리노이 주 게일스버그에 있는 낙스대학(Knox College in Galesburg, Illinois)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 피어선은 주일학교교사 훈련교사로도 유명해서 1883년에 주일학교를 중요하게 여기던 존 와나 메이커(John Wanamaker)의 추천으로 필라델피아의 초교파적인 베다니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피어선을 평가할 수 있는 또 다른 단면은 그가 교육행정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카고의 노스웨스트신학교(1886년에 메코믹신학교로 개명함)의 이사로 봉직하였고(1871-1885) 1873년 미시간여성신학교의 이사로 임명되어 그 후로 10년간 봉사했는데 1880년에 이 학교가 18,000달러의 빚을 져 경영상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신학교는 빛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곳임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디트로이트 노회는 그를 빚 청산을 위한 예산확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혔고 그는 2년 만에 빚을 청산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절친한 친구인 A.J. 고든이 고든-콘웰 신학교(Gorde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의 전신인 보스턴선교사양성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직을 수행하다 1895년 소천했을 때 그의 뒤를 이어 고든선교사훈련원(Gordon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로 개명한 이 학교의 2대 교장으로서 그해 5월부터 학교경영에 참여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성경학교운동에 힘입어 많은 성경학교들이 세워졌는데 이들의 주요 목적은 사변적인 이론신학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또한 성경학교는 선교현장에서 사역할 수 있는 선교사 지망생을 훈련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학원은 훈련원으로도 불렸다. 피어선은 고든이 이 학교를 창립할 때부터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으며, 경영참여를 통해 초창기 발전을 이끌었는데 설립자가 소천한 직후 사라질 수도 있었던 이 학교를 피어선이 이끌어가며 살려낸 것이었다. 피어선은 1901년까지 이 학교의 총장직을 수행하며 이사회에 참석하고 학교를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광고하며 졸업식에서 설교하고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은퇴 이후에도 그는 고든선교사훈련원의 고문이자 특별강사로 학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피어선이 남긴 저서만 해도 50권 이상이고 그가 기록한 설교문과 연설문이 1만 3,000종이 넘으며 그가 영향을 끼친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것을 다 말할 수 없다.

2. 호레이스 G. 언더우드: 피어선과의 만남과 협력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가 아더 피어선을 처음 보게 된 것은 그가 미국 뉴저지 주의 뉴브런즈웍에 있는 화란개혁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일 때였다. 당시 아더 피어선은 이 신학교에서 설교와 강연을 자주 하였는데, 언더우드는 1883-1884 학년도 사이에 있었던 “앞으로 나아가라”(‘Go Forward’)라는 제목의 피어선의 한 연설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후 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된 언더우드는 1887년 11월 그의 스승인 피어선에게 처음 편지를 보내면서 신학교 시절 선교를 강조한 피어선의 연설이 과거 자신에게 많이 유익했다고 전하며 피어선의 연설 내용을 언급하였다. 당시 피어선은, “교회는 완전히 열려져 있는 길을 기대할 수 는 없으며, 교회가 길이 열리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 장애물에 직면했을 때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도전하였는데 언더우드는 이 부분을 기억하면서 지금 조선은 문이 열려 있는데 미국 교회는 왜 그것을 모르고 선교 지원을 하지 않느냐고 피어선에게 반문하면서 선교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의 길을 여셨는데 정작 교회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선교의 문이 열린 조선의 현황과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한 현지의 상황을 당시 저명한 선교운동가였던 피어선이 미국 교회에 호소하며 홍보해주기를 원했다. 언더우드는 피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정세가 불안정하지 않고 조선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조선의 임금이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조선 선교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조선에서의 선교사역 3년 동안 20명 이상이 결신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성장이라는 사실과 북장로교 선교부가 펼치는 병원과 고아원 사역이 번창하여 인력이 필요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또 당시 언더우드는 정동의 자택 부근의 부지를 사들이며 기독교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피어선에게 먼저 알리지만 학원사역에 헌신할 교수진이 없는 현실을 한탄하였다.
조선선교를 위한 교육사업은 언더우드와 피어선이 서신으로 교제를 나누기 시작한 초기부터 함께 관심을 가지게 된 선교과제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사실 피어선에게 있어서 선교는 전 사회의 변화추구를 위한 복음전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현장에서의 토착인의 교육은 그의 선교 원리를 전개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1910년 6월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열렸을 때 피어선은 이 대회에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언더우드도 게일과 사무엘 포펫과 윤치호 등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주제 중의 하나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교단을 초월한 선교사들의 협력과 일치였다. 이것은 피어선과 언더우드가 추구하는 선교적 원리와 실천에 부합하는 주제였다.

3. 피어선의 조선 방문
피어선은 조선에서의 기독교선교의 놀라운 발전상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었고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했다. 또 당시 서울에는 조선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위해 그의 장녀 헬렌 커티스(Helen Curtis)가 그의 사위 프레더릭 커티스(Frederick S. Curtis)와 함께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딸을 그리워하던 피어선이 그의 생애 마지막 여행이자 첫 번째 해외선교현장 방문지로 일본과 조선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헬렌과 프레더릭 커티스는 40년간 일본과 조선에서 일본인 선교사역에 헌신하였다. 피어선이 1910년 11월에 약 2주 동안 조선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편집장으로 있던 「조선선교현장」(The Korea Mission Field)의 그해 10월호 명사동정 기사를 통해 조선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은 학생자원운동(SVM)과 같은 선교운동이나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등을 통해서 피어선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피어선은 당초 예정된 일정보다 한 달 뒤인 1910년 12월 초에 일본을 거쳐 조선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는 조선이 당대 선교의 폭풍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를 통해서였다. 피어선은 언더우드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보내온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보면서 조선 선교 현황을 가름하였는데, 그중에는 존 로스의 선교보고와 이사벨라 버드(Isabella Bird, Mrs. Bishop)의 책도 있었다.
1910년 12월 초 막내 딸 안나와 함께 서울에 온 피어선 부부는 한 부인 선교의 안내를 받아 12월 4일(주일)에 1,000명의 회중이 모인 가운데 행해진 남대문교회의 새 예배당 헌당식에 참석하였고, 숭동중앙교회를 방문하였으며, 또한 서울의 여러 교회에 초청되어 설교하기도 하였고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게일,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등과 같은 선교사들을 만났다. 피어선은 매일 선교사들과 성경 읽기 모임을 가졌고 일주일에 두 번씩 강연을 하였다. 또 뉴욕 YMCA 창립을 주도한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울 YMCA에 489엔을 기부하였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피어선은 게일을 통해 조선인들이 오륜, 오항, 오상과 같은 유교적 가르침과 덕목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교적 철학이 가져다 주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는 유교적 관점은 관습을 고정화하며 대부분의 불합리하고 건강하지 않은 관행과 미신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비판하였다.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 교회의 사도적 특성을 직접 목격한 피어선은 성경을 통한 교육이 바로 조선을 변화시키는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피어선은 미국의 그의 친구들이 조선에 성경학교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을 전하면서 그의 모든 능력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조신의 수도인 서울에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Institute)을 세우고자 한 것은 애초부터 피어선의 생각이었고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나 심한 병중에 있던 피어선은 이러한 그의 개인적인 희망을 생전에 성취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 74세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피어선은 항해 중 추운 날씨로 건강을 해쳤던 데에다, 조선에서 6주 정도 머물면서 건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조선을 떠나기 직전인 1911년 1월 8일(토)에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을 개인적으로 더 만나길 원했지만, 개인 면담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선교사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당부를 대신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초에 피어선과 그 일행은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1월 말에서 2월 초순경에 미국행 증기선을 탔으나 건강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다. 그리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 피어선은 실실한 평신도였으나 피어선의 요청으로 목사안수를 받고 베다니장로교회의 부목사로 피어선의 도시선교를 도우며 함께 동역한 토마스 호튼의 집에서 두 달간 쉬었다. 호튼은 1908년 로스엔젤레스성경학교(현 바이올라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의 고향인 뉴욕의 브루클린에 있는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11년 6월3일이었다. 피어선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이 땅에 성경학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감하며 성경학원들을 건설하고 설비를 갖추는 일을 돕기를 원했으나 결국 그의 뜻은 생전에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임종 시 남긴 그의 유언은 그의 장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작성일:2019-12-13 18:37:35 39.120.10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