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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A031/Rhodes Harry Andrew/노해리/3-6/2017210362서능력/2017210403장건진

닉네임
서능력
등록일
2019-12-13 23:08:49
조회수
86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A031:Rhodes Harry Andrew:2017210362서능력:2017210403장건진.pdf (666928 Byte)
로드(한국명 노해리) 선교사 / Rhodes, Harry Andrew(1875-1965)



Ⅰ. 기본사항

1. 생몰연도: 1875.9.11-1965.6.16
2. 학력: 그로브시티 대학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프린스턴 신학교(1903-1906)
3. 소속: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
4. 한국선교기간: 1908.8.18-1945
5. 연표
1908.8.18.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1909.3. 평북 강계지방 선교사로 임명, 압록강 유역 선교
1913.11. 클라크, 호프만과 만주지방 전도여행
1914.11. 비거와 만주의 성경반 지도, 선천에서 활동
1918-33.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성서와 영어 등 강의,
미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 위원
1922-45. 조선예수교서회 편집위원,
해방 후 기독교서회 평생회원으로 문서운동 지도 및 후원
1945. 귀국
1965.6.16. 소천6. 가족사항: Rhodes, Edith Brown(부인)과 2남
7. 논저
저서: 조선긔독교회략사, 조선예수교서회, 1933; 오백문답, 조선예수교서회.
1923;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an church U.S.A
1884-193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erain Church in the U.S.A
역서: 성경요람, 조선기독교서회
논문: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특성, 신학지남 13.3-4(1931.5-7); 성경론,
신학세계 18.1(1933.1); 성만찬의 배경, 신학지남 14.1(1932.1);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약의 증거, 신학지남 3.1(1936.1); 하나님의 말씀,
신학세계 14.6(1929.12)








Ⅱ. 선교사 소개

성장 배경
미북장로교 한국선교사이자 교회사가였던 노해리 선교사(Rhodes, Harry Andrew)는 1875년 9월 11일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이스트 부룩(East Brook)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깊은 신앙교육을 받았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해리 선교사는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그로브시티 대학을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을 석사로 졸업했다. 1903년 노해리 선교사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의 과정을 이수했다. 신학교를 마친 노해리 선교사는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크로스크릭(Cross Creek) 장로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섬겼다. 당시 그는 YMCA 운동과 학생선교자원운동(SVM)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원두우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의 한국 선교사 모집 활동을 통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08년 부인(Rhodes, Edith Brown)과 함께 내한하였다.

노해리 선교사의 한국 사역
1908년 부인과 내한한 노해리 선교사는 평안북도 강계지방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강계와 선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뗏목을 타고 압록강 유역을 순회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1913년 11월에는 클라크(C.A.Clark), 호프만(C.S.Hoffman)등과 함께 만주지역을 전도여행하며, 만주에 이주한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별히 그는 만주에서 성경반을 조직하고, 중국 예배당의 건물을 빌어 144명의 희망자에게 성경교습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인 1914년 11월에는 비거(John D.Bigger)와 더불어 다시 만주로 가서 연례적인 성경반을 지도하였다. 이후 노해리 선교사는 선천지방에서도 한동한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8년 미국 선교부는 원두우 선교사가 서거한 후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노해리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의 종교 교육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개교와 노해리 선교사의 교수 차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해리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의 중책들을 맡으며, 14년간 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그는 당시 전교생이 성경 과목을 일주일에 2시간씩 4년간 필수적으로 이수하도록 하는 학칙을 만들었고, 매일 30분 가량 진행하는 기도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그는 주일 사역과 봉사 활동도 강조하였기에 학생들의 주일 예배 참석 여부도 꼼꼼히 확인하였다. 노해리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의 성경 과목 교육과 채플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래서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초대 교목실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노해리 선교사는 1933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성서와 영어 등 교수의 재직을 하였고, 그의 부인은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노해리 선교사가 퇴임한 후 그가 했던 모든 사역들은 나뉘어져서 후임 교수들이 그 직무를 이어갔다. 성경 교수 사역은 케이블과 고언 등이, 종교부는 백낙준이, 교목 사역은 류백희, 장석영 등이 대학교회 목회는 백낙준, 장석영이 뒤를 이었다.
노해리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재직하면서 서울의 서부지역 15개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발전에도 필요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노해리 선교사는 원두우 선교사의 영향으로 문서 선교에도 힘을 썼다. 그는 특히 1922년부터 조선예수교서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북장로교의 한국 선교회 역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한국에 재입국하여 은퇴할 때까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문서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는 기독교서회 평생회원으로서 후배들의 문서운동을 지도 및 후원하였다. 그는 1933년 조선기독교회략사를 저술하였고, 이후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an church U.S.A 1884-1934와 캠벨과 공동편집한 하편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an church U.S.A(Volum2 1935-1959)(1965)를 저술하여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는 은퇴 후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고, 미북장로교 한국선교사 2권을 완성하던 같은 해인, 1965년 6월 16일 별세하였다.
작성일:2019-12-13 23:08:49 106.246.166.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