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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한국기도교회사 내한선교사 2017210345 3-6 김예슬

닉네임
김예슬
등록일
2019-12-18 00:00:48
조회수
79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김예슬.hwp (100864 Byte)
2019 2학기
한국기독교회사 과제물








[Stevens William H]
(1856~1931 SA)





과 목
한국기독교회사
교 수 명
박용규 교수님
학년 반 / 학번
3 학년 6반 / 2017210345
제 출 자
김 예 슬


























1. 들어가는 말
내한선교사 조사를 통해 우리는 한국기독교회사의 중요한 시작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시작에는 선교사로 헌신했던, 우리 보다 어린? 혹은 우리 또래이거나 막 결혼한 그들의 헌신을 알 수 있게 되어진다. 언더우드나 토마스 선교사 처럼 대표적인 선교사 외에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 과제를 통해서 알게 되어졌다. 선교학을 전공해서 선교사들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조국 교회를 향한 그 사랑의 시작을 다시 한번 점검하며 이 과제를 하게 되었다.

2. 내한 선교사 조사
Steaves, William (스티븐스/신태빈/영국/SA) 박종덕, 『구세군의 기원과 발전』, (서울; 구세군출판부 2005), 38.

1. 생물연도: 1856-1931 영국 워딩 출생
2. 학력: 구세군 만국사관학교 졸업
3. 경력: 1885 구세군 인도선교사로 파송되어 34년간 구령사업
1920.5.10.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내한
영문개척, 구세군 육아원 증축, 학교 신설 등 이룩
1921 금주신문 특집판 발간하여 절제운동에 기여
충남 홍성에 간이 진료소 신설, 러시아 난민구제, 조선 주일학교 대회 참여
1923.4.3. 사령관직 사임하고 귀국, 만국본영 의무부서기관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
1928 정년퇴직
4. 가족사항: Steavens, W.(부인)
5. 논저: 군제석의
6. 참고문헌: 기백 9권; 한국구세군사, 1975; 스티븐즈 소전; 참모사관잡지 1923, 1928; 구세군역군 한국기독교회사연구소, 김홍수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 자료총서 제18집 한국기독교회사연구소, 2007), 480-481.


신태빈 참장(Lt,-Commissioner William Stevens)은 인도에서 34년 동안 근무한 후에 1919년 조선에 3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군국의 지도자였다. 스티븐스는 영국 월싱(Worthing)에서 번영하는 젊은 보석 상인이었다. 그는 재산을 팔고 사관이 되기로 헌신한 후 자신의 수입과 자신의 생애를 구세군에 바쳤다. 그가 인도에서 봉직하고 있었을 때 그의 인도동료가 그에게 예수 라트남(Yesu Ratnam)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은 ‘예수의 보석’이라는 뜻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가 인도에서 오랜 세월동안 보낸 사역 경험은 조선인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신태빈 참장이 부임하였을 때 조선인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수세기 동안 영국인이 식민지인 인도인에게 대하는 태도 그대로였다. 권경찬 부정령에 의하면 신태빈 참장은 “후생학원 원사를 신축하고 변소를 짓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인도에서는 변소가 없고, 대변을 까마귀들이 다 치운다는 것이었다.” 권경찬, “한국구세군사”(10), 『사관』, 1966, 제26권 3호, 4


그는 퀘어커교도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엄격하고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믿음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조선인을 향한 그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건방지고 매우 냉담해 보였다. 실제로 그의 기여도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다면 신태빈 참장은 예리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에서 ‘조건과 기회’에 대하여 포용력과 통찰력이 있는 태도로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1908~2008』, (구세군 출판부), 124-125


1916~1924년 제 3대 사령관의 임명이 있었다. 이 시기는 선교 정착과 사회선교 시대였다. 제 2대 사령관과 제 3대 사령관 참장 신태빈은 사회사업 활동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군국사령관 정령 신태빈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구세군은 1908년 사역을 시작하여 1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노력의 결과로 얻은 명백한 성공에 조선 구세군 조직자테도 매우 놀라워했다. 각 지방은 많은 조선인 사관들로 구성되어 각 지방관의 감독아래 영문과 분영이 배치되어 훌륭히 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lbid, 146.

매년 경성에 소재한 사고나학교에서 훈련을 받기 위한 사관학생들의 수가 증가추세에 있었다. 사실 그동안 조선인 여성들이 일체의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구세군 캠패인에 참석하는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며 놀라운 성장이었다. 이 사역의 특징은 조선인 여성 전도부인단을 결성하여 마을에서 마을로, ㅈ닙에서 집으로 찾아다니며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껏 남자들의 그늘에 가려져 생활하던 여성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파하여 어두운 영혼들에게 밝은 빛을 전해주었다.
여성 전도부인단에 의해 몇 장소에서 매주마다 예배가 개최되고 있었고, 지난해 10주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쵳토로 여성사관학생들이 사관학교 전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중 6명은 남자사관학생들의 부인들이었고 5명은 독신으로서 그들은 후에 사관으로 임명르 받은 조선인 최초의 독신 여사관이었다.
청년병 출신의 사관학교 학생들이 졸업한 이후로 청소년 사역이 가장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구세군의 첫 번째 사회사업시설은 소녀들을 헤천원으로 이미 최대 수용인원수를 초과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사회사업이 점차 발전하였다. 경성의 거리에서 구걸하던 소년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고 현재는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정직하게 돈을 벌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lbid, 148.

구세군의 신학적 입장은 하나의 실천신학이었다. 이것은 사랑을 기조로 하는 전도와 봉사의 구령신학(Hot theology) 사령관 로시화 부장(Commissioner Leslie C, Rusher, 1965~1971)은 제 47기 승리자학기(1969~1971 행정강연 시간에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구령의 열정에 관해 강의하면서 “창립자는 뜨거운 차와 뜨거운 신앙을 좋아했다. 구세군의 신학은 오직 구령의 신학만 있을 뿐이다. 전장사업도, 사회사업도 모두 구령의 신학에 귀착한다.”고 말했다.(1971년 5월 마지막학기 행정강연 중, 통역 정위 도진수)
이다. 구세군의 신학은 책상 위에서 수립된 이론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 삶의 현장인 세상 속에서 태어난 실천적인 신학의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보다 영적이면서 세상적이고 구속적 신학이었다.

조선 구세군 제3대 사령관으로 신태빈 정령 동부인이 취임하게 되었다. 5월 10일 신태빈 정령 동부인이 조선 구세군의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아 조선에 도착하였다. 5월 28일 금요일에 YMCA 강당에서 첫 번째 환영 집회가 성대히 열렸다. 지역관들과 전장 사관들이 경성으로 모여 환영집회를 열었다. 환영집회 순서는, 개회찬송(‘믿는 사람들은’), 기도(부관 설보덕, 기관 이시지마), 환영사(목사 앤더슨 E. W. Anderson, M. D), 후생학원소년들 특별찬양, 환영메시지(미주노 박사), 환영사(와타나베 판사, 기관 허곤, 목사 김필수), 혜천원 소녀들 특별찬양, 극기모금결과 광고 헌금(유럽인 사관들이 헌금 동안 찬양), 신태빈 정령부인 말씀, 사령관 신태빈 정령 말씀,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
5월 29일 토요일 오전에는 모든 사관들과 사관학생들을 위한 사관 집회가 경성 제2영문에서 열렸고, 오후에는 혜천원에서 외국인 사관들 및 중진 사관들과 다과회 모임이 있었으며, 저녁에는 경성 제1영문에서 대중집회가 있었다. 5월 30일 주일 오전 11시에는 경성 제1영문 성결회를 인도하였고, 오후 4시 가로전도, 그리고 저녁 8시에는 일본인 영문에서 사령관 동부인 환영회가 있었다. 이후 6월 초에 각 지방으로 환영여행 겸 순회를 떠났는데 각각의 집회는 관심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구세군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도식 서기관장의 사망 후 조선 구세군에는 지도자들이 부재중이었다가 5월에 신태빈 사령관이 부임하였고, 계속해서 7월에 서기장관 도원의 참령 동부인 임명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다. 7월 7일에는 이전에 조선에서 사관학교 교장으로 6년간 사역한 바 있는 도원의 참령 동부인이 휴가 중에 영국에서 임명을 받아 조선에 다시 돌아와 서기장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야마무로 정령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던 중 콜레라 발생으로 인해 부산에서 약간 지연되었으나 경성에 무사히 도착하여, 주말에 열린 환영집회는 사령관 신태빈 정령 동부인이 인도하였으며, 이어 여러 지역 센터에서 환영집회들이 열렸다. 신임 서기장관 동부인은 이미 조선에서의 사역 경험이 있어서 전에 알고 있던 사관과 병사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lbid, 156.


1921년 구세군의 절제운동이 시작되었다. 구세군 개척사관 일행은 1908년 조선에 도착하였다. 일본 국적을 가진 사관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몇 개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문을 조선 사관들이 담임하고 있었다. 구세군은 창립 초기부터 사회를 정화하려는 의도에서 철저한 금주와 절제를 강조하였고, 금주를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조선 구세군도 금주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금주운동의 일환으로 1921년 3월 구세신문 금주호 제1호가 발행되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조선 사람들에게 매우 해악이 되는 것을 보고, 당시 신태빈 사령관은 서기장관 도원의 참령과 의논하고 협의한 결과, 술을 반대하는 특별 구세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금주호는 일반 구세신문보다 크기를 두 배로 하였으며 몇몇 외부인들의 원고를 추가하고 군국사령관, 서기장관 그리고 다른 사관들의 원고를 특별히 실었다. 이 특별 금주호는 대체로 잘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곳에서 상당한 자극을 준 계기가 되었고, 구세군사관들과 군우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구세신문의 보통 때 주문은 5,300부였지만 이번에는 20,000부 이상을 인쇄하였다. 금주운동의 방향성을 가지고 처음 시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만족한 결과를 가져왔다. 허일 참모정위는 철도당국을 찾아가서 그 목적을 설명한 결과, 5,000부를 판매할 수 있었고, 여러 지방에 있는 철도국 내의 조선인 직원들에게도 배부해 주었다. 설보덕 부관은 그의 지역에서 두 배 이상 받았으며, 개성의 어륵손 기관도 두 배 이상 주문하였다. 여사관 학생 한명은 경성거리에서 한 주 동안에 월요일 200부, 화요일 145부, 수요일 200부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libd. 159.

구세군은 초기부터 오늘까지 알코올과 흡연, 마약으로 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향락과 과소비 풍조를 추방하여 무절제한 경제생활과 타락된 도덕생활을 회복하는 절제운동을 펼쳐 왔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폭력으로 부터 구조하고 문란한 성생활에 기인되는 에이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에이즈 예방 및 교육 등 다각적인 방면으로 국민 생활 전반에 걸쳐 절제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libd. 160.

구세군은 1922년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은둔의 왕국’ 혹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나라였다. 기원전 5세기로 되돌아가보면 조선은 당시 유럽의 그 어떤 나라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발달된 문명을 가진 나라였다. 불교와 유교 외에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강하게 사로잡는 다른 종교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통치자들과 일반 사람들은 서양과의 무역이나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종교를 수용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대 초반 서양과의 무역협상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는데, 그 첫번째 변화가 바로 기독교선교사의 입국이었다.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지적이며 일반적인 무지와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는데 이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부족한 결과였다.
1980년 사역을 시작한 구세군은 인상적인 캠패인을 통해 기독교적인 사랑을 베풀어 조선 전역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 캠패인이 잠시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난 2년 동안 다시 흥미 있는 부흥을 일으켜 수 천 명이 그리스도를 위해 싸워 승리하였다. 구세군은 이러한 장점을 가지고 새로운 마을들로 나아가 많은 회개인들을 회득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교육이었는데, 구세군은 관인 사립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야간 학교를 운영하였다. 구세군의 교육적 영향에 힘입어 관인 사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조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흡연이 만연해 있었으며, 남학생들의 주머니를 불시에 검사를 해보면 10명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에게 담배를 찾을 수 있었다. 흡연을 하지 않는 10명이 구세군 소속이며 그 중 2명은 영문학생이었다. libd. 167.

조선 구세군은 조선 땅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한 선교도 힘을 썼는데, 쉬운 선교는 아니었다. 신태빈 사령관은 네노 정위 동부인을 이 영문에 임명하고, 니시모토 정위는 광주로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전주영문은 하사관들에게 맡겨놓아야 했다. 또한 구세군은 12월 원산에서 러시아 난민을 구호하는 사업을 펼쳐, 난민 공동체를 도왔다. 북쪽에 8천명에서 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더 있으며 이들의 상황은 원산보다 더 열왁하다는 것을 알아 도시에서는 난민의 의복을 만드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태빈 사령관 부인과 도원의 부인이 이 일을 도왔고, 새로 세운 상업부를 며칠 동안 빌려서 만든 물품을 판매하여 기금을 마련했으며 이를 위해 여사관 두 명이 같이 도왔다. 홍성지역에는 작은 규모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료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5월에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지식도 있고 조산원으로서 자격도 갖추고 있었던 배덕신 부관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 사업이 앞으로 더욱 성장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제공하고 지역 내의 영적인 사업을 더욱 고무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세 달 후인 8월에 결실로 나타났다. 8월에 로오도 부관은 홍성에 새로운 영문을 개영하고 의미있는 보고를 하였다.
이런 선교 방법은 구세군의 전형적인 선교 방법으로 초창기부터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의 손길을 베풀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libd. 170.

1923년엔 국군사령관 참장 신태빈이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 활동이 활발했는데 구세군은 1908년 조선에서 개영하여 역사적으로는 일본에 합병이 되어 정치적으로 일본에 합병이 되어 정치적으로 변화의 과도기에 있던 시기였다.
5월에 고 부래지 사령관의 아들이었던 링컨 프렌치가 조선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 땅에 살면서 그의 부인과 매우 훌륭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다. 신태빈 사령관은 정동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을 인도하였는데, 경성에서 가진 집회중 가장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사업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여러 종교단체들과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예배는 전체적으로 구세군인들이 순서를 진행하였으나 단 링컨이 그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하디 박사만이 외부인으로서 기도를 하였다. libd. 179.

5월에 신태빈 사령관은 사리영 기관을 부관의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그녀는 휴가중이었는데 건강이 매우 호전되어 매우 기뻤고, 앞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사명 감당해 줄 것을 기대해했다. 또한 혜천원에 보조자로 근무하는 박난의 부위가 정위로 승진되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정위 계급을 얻은 유일한 조선인 여사관 이었다. libd. 182.
또한 신태빈 사령관은 ‘후생학원’을 개원하였다.

1924년 신태빈 사령관은 이임하게 된다. 1908년 개척 구세군인들이 구세군 집회를 시작하기 위해 조선 땅에 도착했을 당시는 통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준비도 없었다. 개척 초창기에는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세군을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단체로 간주했다. 구세군을 도와주어야 할 통역자들도 구세군 조직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였고, 그러기에 자신들이 번역해야만 하는 메시지가 당시에는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고 인정했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의 새로운 사역들은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었으며 하나님게서 놀라우신 능력으로 인도해주심으로 조선에서의 사역에 발판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libd. 186-187.

그동안 조선 구세군응 맡아 이끌었던 신태빈 사령관이 전근 명령을 받았다. 4월 27일 주일 오전에 신태빈 사령관이 전근 명령을 받았다. 4월 27일 주일 오전에 신태빈 사령관은 경성 제 1영문에서 성결회를 인도하고 2명의 새로운 병사 입대식과 3명의 어린이 헌아식을 가졌다. 헌아식 아이들은 이건영 부관 동부인이 후생학원의 소년들과 송별회를 가졌다. 30일 수요일 저녁에는 사관들이 두 분의 사택에 모여 함께 송별 다과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여러명의 군우들이 떠나는 사령관에게 각각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기회를 가졌다. 사령관 동부인이 각자에게 적당한 조언을 한 후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라는 찬송을 부르며 송별회를 마쳤다.
경성역에서의 마지막 송별 시간에는 사관학생들, 후생학원 악대, 혜천원 소녀들, 일본인 병사들, 조선인 병사들이 다수 참석하였으며 이곳에서 사령관이 말씀을 하자 사람들은 만세삼창으로 화답하였다. 승강장에는 많은 외국인 친구들이 구세군인들과 함께 모였으며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별의 찬양과 승리의 노래를 다함께 불렀고 악대가 연주를 하였다. 곧 터널 반대쪽으로 후생학원 악대를 뒤로 한 채 기차는 증기를 뿜으며 떠나갔다. 사령관 동부인은 창문을 열고 모자를 흔들었고 조선인 구세군인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임지를 향해 떠났다. 한영제,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 보고서 2008』, (구세군한국선교백주년본부, 1983), 61.
작성일:2019-12-18 00:00:48 112.187.13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