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 선교사/47 / Chamness, O. Vaughan(1898–1987, NP) / Chamness, Helen Mitchell (1893–1952, NP)

닉네임
윤한수1
등록일
2020-07-01 10:56:15
조회수
598
첨부파일
 내한 선교사_3-1반_47_윤한수.hwp (5923328 Byte)
Ⅰ. 기본사항

Chamness, O, Vaughan (체임니스 올리버 / 車米秀 / 미국 / NP)
Chamness, Helen Mitchell(체임니스 헬렌 미첼)
1. 생물연도: 1898년 5월 26일 생 –1987년 1월 11일 사망
1893년 7월 21일- 1952년 8월 1일사망
2. 학력:
3. 경력:
1922년 Chamness, O, Vaughan와 결혼
1925.9.22.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대구선교부에 부임하여 경주 중심의 경북동부지방 교역
대구 애락원 부원장 역임
애락원에서 나병원환자들의 재활사업으로 농지조성, 목축업 성과.
Helen은 영유아 보건소에서 근무
1927 딸 Chamness. barbara 사망
1931 central service building 완성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해방 후 재 내한하여 대구에서 선교활동
1949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
1952 부인 사망, 1953.9 핸더슨 부인과 재혼
1950년경 샌프란시스코 산 앤넬모 대학 신학과 교수
1959 미국 샌 라파엘에 거주
1987 미국 워싱턴 킹 카운티에서 사망

4. 가족사항: Chamness, Helen Mitchell (부인)
Henderson, Helen McQuilkin (부인)
Chamness. barbara (딸)
Chamness, Leland (아들)
Chamness, Robert (아들)
Chamness, O, V jr (아들)

Ⅱ.선교사 소개

Chamness, O, Vaughan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목사. 한국명 차미수(車米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파송을 받아 1925년 9월 22일 부인 (Helen Mitchell)과 함께 내한하여 대구 선교부에 부임,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 동부지방 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였다. 또한 아이들을 돌보는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그는 또 대구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진찰하기 위해 왕진을 할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또한 나병환자들의 자활 사업으로 농지조성(農地造成) 및 목축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별히 목축업에 큰 성과가 나타났고 덕분에 신선한 고기와 우유, 계란들을 공급해서 싼 값에 유통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건물을 지어주고, 그들을 치료하고, 요리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옷도 수선해주는 등 Helen과 함께 약자들을 섬기는 일들을 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귀환하여 대구에서 계속 선교활동을 벌였고, 1949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1952년 부인이 사망하였고 이듬해 9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핸더슨(Helen McQuilkin Henderson; 만주에서 선교하다 공산당에 순교당한 헨더슨의 미망인)부인과 재혼했으며, 1959년 당시 미국 샌 라파엘 거주하고 있었다.

Chamness, Helen Mitchell

Chamness, O, Vaughan와 함께 내한하여 애락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주일학교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서 했다. 1949년 귀국하였다가 1952년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아들 3명이 있었고, 딸은 한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1. 초기 대구 선교사역
대구의 첫 번째 자산은 1895년에 베어드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것으로, 선교부가 나중에 이를 승인하였다. 베어드가 매입한 큰 기와집이 대구의 첫 번째 장로교회의 부지가 되었으며, 그 교회는 오늘날 남성정 교회이다.
베어드가 1896년에 쓴 「대구 선교기지의 개설」이라는 보고서에서 대구를 사역의 중심지로 선교기지를 세울 장소로 선정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도청 소재지이고, 주민이 많고, 접근성이 좋으며, 커다란 농업지역 안에 있고, 이미 사역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후 아담스 부부를 비롯해 존슨 의사 부부도 대구 선교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대구는 1899년 5월 1일에 선교회의 한 선교기지가 되었다.
1교회 남성정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중 제 6교회인 동웅정(Tong Ung Chung)교회에 체임니스(Chamness, O, Vaughan) 목사가 협력선교사로 활동 하였다.

2.대구지역에서 신앙지도와 자활사업을 전개하다.
체임니스 선교사는 대구를 무대로 활동한 선교사 이다. 그가 일했던 애락원은 1913년 대구에 설립된 나병원, 「대구 나병원」으로 불리다가 1963년부터 「애락보건병원」 혹은 「애락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부산, 광주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 설립된 나병원으로 1913년 3월 1일 당시 대구동산병원 원장이던 플레처(A. G. Fletcher;별리추)에 의해 삼성정에서 시작되었다. 플레처는 거리를 방황하는 나병환자 20명을 조그만 한옥에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0년 대구 주재 선교사 브루엔(Bruen)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120명 이상의 교인들이 있었으며 1년에 36명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1924년 병원을 증축하여 수용능력을 3백 명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으며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2백명의 학생들이 성경을 공부하였다. 1936년 발행 조선총독부 통제자료에 의하면, 대구나병원은 원장 플레처 외에 의사 3명, 서무 2명, 목사 1명의 직원에 병실 79개 수용인원 519명에 달하고 있으며 진료비는 무료였다. 1938년에는 미감아를 수용키 위한 가옥을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체임니스 목사는 1925년 내한하여 미국 북장로교 대구 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의 강제 출국에 의해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16년간 사역했다. 그는 애락원에서 신앙지도와 함께 농장 및 가축사육 등 자활사업을 전개하였으며, 부원장을 역임했다.

3. 자식을 조선에 묻다.

본 체임니스의 딸 바바라 테임니스는 1927년 3월 3일 태어나 1927년 6월 4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현재 대구에 있는 은혜정원에 안장되었다. 체임니스 선교사 부부는 땅의 묘비에 이름과 사망 연도를 새겼으며 그들이 추방되던 1941년 까지 무려 14년간 아끼며 쓰다듬던 묘비이다.
작성일:2020-07-01 10:56:15 59.8.14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