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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68/Winn, Emily Anderson

닉네임
김성직
등록일
2020-07-03 00:17:27
조회수
71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68_김성직.hwp (3795968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 Winn, Emily Anderson (에밀리 윈 / 한국명: 위애미 / 미국 / SP)
2. 생몰연도 : 1883. 12. 30 –1977. 1. 20 미국 노드캐롤라이나 출생
3. 학력 : 1903년 아그네스 스코트대학, 이사벨 대학, UTS
4. 한국 선교 기간 : 1911 - 1954
5. 경력 :
- 1911년 남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전주선교부에 부임.
- 농촌지방 순회하며 여성 계몽사업, 전도 사업에 헌신.
- 1922년 전주여자성경학교 교장
- 1928년 클라크기념 성경학교에서 성경담당 교사로 봉직
-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 1947년 재내한, 클라크기념 성경학교 교장
- 1954년 은퇴 후 귀국
- 1977년 사망
6. 가족사항 : Paul P Winn(부) 1845~1931
Susan Anderson Winn(모) 1847~1907
Winn, Samuel Dwight(형) (윈 / 한국명: 위인사 / 미국 / SP)
1) 생몰연도 : 1880-1954년 미국 노드캐롤라이나 스테이티스빌리 출생
2) 학력 : 신학교 졸업
3) 경력 : 1911년 남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전주선교부에 부임.
- 전주시와 농촌교회 순회, 전도.
- 전주성경학원 성경교사, 전주신흥학교 교사로 활동
- 일제 말 신사참배 반대로 추방, 해방 후 재내한
- 1951년 은퇴 후 귀국
- 1954년 사망
4) 가족사항 : Winn, Emily Anderson(매)
5) 논저 :
6) 참고문헌 : <기백>12권; MTK; 호남기독교사; KMYB; 구 미인 조사록;
In Memorial E Winn
7) 사역 -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위인사. 미국 노드캐롤라이나주 스테이티스 빌리에서 출생.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자격을 갖춘 뒤 미 남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1911년 여동생(Emily Anderson Winn; 위엄일)과 함께 내한, 곧 전북 전주선교부에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전주시와 농촌교회를 순회, 전도하였고 특히, 완산군 운봉지역을 중심한 농촌선교에 주력하였으며 맥큐첸(L.O.Mc Cutchen; 마로덕)선교사가 경영하던 전주성경학원에서 성경교사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또한 농한기를 이용한 성경학교를 통해서 농촌 부녀자 및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앞장섰으며 전주 신흥학교 등의 교단에도 섰다.
그러던 중 1936년 이후 신사참배 반대로 인하여 강제 추방당했으며 1945년 이후 여동생과 함께 재내한 하였다가 다시 6.25사변을 만나 일본으로 피신, 9.28수복 후 귀임하였고 1951년 선교일선에서 은퇴하였다. 귀국하여 만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1945년 별세하였다.
그이 여동생은 그가 별세함과 동시에 귀국하여 미 남장로교 은퇴. 수양관에서 거하다가 1977년 별세하였다.


II. 선교사 소개

기존자료

그녀는 곧, 전북 전주선교부에 부임하였으며 전주시내는 물론 농촌 지방을 순회하면서 주로 여성 계몽사업 및 전도 사업에 헌신했다. 또한 그녀는 완주군 운봉교회 및 전주 완산교회에서도 봉사하였고 농촌순회 전도시에는 4-5일 동안 주간 성경학교 등을 개강하였다.
그리고 당시 클라크기념성경학교에서 성경담당 교사로도 봉직하였으며 1938년 이 후 일제의 기독교 박해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재내한 하였으며 전임지에서 농촌선교에 힘쓰다가 6.25사변을 당하여 오빠와 함께 일본 토오쿄오로 피신하였고 휴전과 동시에 귀임하였다가 1954년 은퇴하였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 장로교 선교부 은퇴회관에서 만년을 보내던 중 1977년 별세하였다.

참고사항: Winn, Emily Anderson의 사역지역인 –전주선교내용
1894년 2월 제2차 남 장로회 선교회의에서 테이트 목사와 그리고 그의 동생 마티를 전주에 파송키로 하고 그해 가을에 전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서 테이트 남매는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서 제일 먼저 정착케 되었고, 또 전주선교부가 탄생케 되었다.
이해 3월에는 드루(A./D. Drew)가 의료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고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드루는 레이놀드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호남지방의 관문인 군산에 도착했다.
이어서 호남지방 여러 도시와 마을을 다시면서 전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들은 전주를 방문하여 테이트 남매를 만날 수 있었으며, 전주를 방문하는 길에 임피를 방문하였다. 전주에서 목포까지 가는 사이에 김제, 영광, 함평, 무안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다시, 목포를 떠나 우수영과 좌수영등 주요한 마을을 거치는 동안 구경꾼과 방문객들을 많이 접했는데, 이들이 전도하는 일에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레이놀드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였다. 이때마다 [죄와 구원]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간단한 책자를 주면서 읽어 보도록 권하였다. 또 순천을 방문하였고 다시 부산까지 갈 수 있었다.

새로 찾은 자료

여성을 위한 성경학교

한예정신학교는 1909년 전주선교부에서 여성을 위한 한달 성경학교를 열면서 마요셉 빈(Mrs. JosephineHounshell McCutchen)이 가르친 것이 그 출발이었다.69) 이 학교의 명칭이1922년에 전주여자성경학교로 개명되었고,70) 교장은 윈(E. A. Winn) 선교사가 맡았다.
1928년에는 클락(H. Clark)을 기념하여 성경학원 건물을 짓고한예정 성경학교라고 불렀는데, 일제가 1940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에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여 이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1947년 윈 선교사가 귀국하여 6.25전쟁 때까지 이 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폰테인 선교사가 문을 열고 다시 소외된 여성들에게 교육의 장을 제공하였다.
여자성경학교였던 한예정성경학교는 1968년에 한일여자신학교로 개명하였다.

전도부인으로서 활동

1929년 남장로교 선교사 에밀리 윈(Emily Winn)의 보고에 의하면, 석 달 간 전도부인의 월급이 15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니까 한 달에 5원을 받는 것이다(1928년 4월부터 1929년 4월까지 회계). 따라서 이들 전도부인들은 한 달에 5-10원 정도를 받고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들보다 더 훈련을 받은 지도자격인 여전도사들은 1922년경에 20원 정도를 받고 있다.

3. 해방 후 에밀리 윈 선교사의 활동

해방 후 선교회의 첫 번째 연례 모임은 1947년 4월 전주에서 개최되었다. 이 시기에, 군산을 제외한 모든 선교 스테이션들은 재개되었다. 선교회는 존 탈메이지(John E. Talmage)와 윌리 그린(Willie B. Green)에게 군산으로 이동하여 가능한 한 빨리 사역을 재개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다음 해에선교사들의 숫자는 29명으로 늘어났다. 2차 연례 모임 회의록에 따르면 전주에는 폴 크레인(Paul Crane, 구바울) 의사 부부, 린튼(인돈) 목사부부, 마가렛 프리차드(Margaret Prichard, 변마지), 에밀리 윈(Emily Winn)과 윈 박사(S. D. Winn, 위인사) 등의 7명, 군산에는 레나 폰테인(Lena Fontaine), 윌리 그린, 페이스리(James I. Paisley) 박사 부부, 탈메이지 목사 등 5명이었다.ㅋ
작성일:2020-07-03 00:17:27 175.113.143.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