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20/ Lambuth, Walter Russel

닉네임
3반 김성현
등록일
2020-07-03 11:32:24
조회수
66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20번_김성현.hwp (172544 Byte)
램버트 선교사/ Lambuth, Walter Russel (1854-1921)

1) 기본사항

1. 이름: Walter Russell Lambuth/ 램버트/ 한국명: 미상
2. 생몰연도: 1854.11.10.(상해).-1921.9.26.(요코하마)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899-1920
5. 탄생과 가족: 중국에서 태어난 감리교 주교인 램버트는 1880년대에 중국, 한국 그리고 일 본에서 학교와 병원을 건립하는 사역을 했다. 그는 제임스 윌리엄 램버트와 매 리 이사벨라 멕켈란의 장남으로써 테네시주와 미시시피주로 초기 교육을 위해 서 보내졌다. 월터의 부모님은 중국 선교의 개척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함께 일본 남쪽의 감리교 사역을 개척했다. 월터의 할아버지는 미시시피의 매년 열 리는 집회의 설교자였으며,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윌리엄 램버트 목사는 홀스턴 의 매년 열리는 집회의 설교자였다.
6. 교육: 월터는 1875년 에모리-헨리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에 벤더빌트 대학에서 신학과 의 학을 수학했다.
7. 이력
1875년 Emory & Henry졸업
1877년 Vanderbilt University에서 의학 및 신학 학위 취득
1877-1885년: 미국에서 추가 연구를 위한 짧은 기간 동안 중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서양 의료기관으로 일하면서 상해에 아편 치료 센터를 설립하고 베이징의 록펠러 병 원이 된 곳을 설립했다.
1887년 일본에 남감리회 선교부 설립, 선교사역을 의학에서 교육 및 복음 사업으로 전환
1892-1910년 선교부 장관으로 봉사,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계지도자가 되어서 교회가 쿠바와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1910년 브라질과 아프리카를 위해 남쪽의 감리교 주교로 선출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군목으로 프랑스에서 9개월 동안 종군
1919년 극동지역 선교 총괄하며 한국의 3.1운동 때 옥중에 있는 교역자, 교인의
석방 위해 노력
1920년 서울에 태화 여자관 건립하여 여성의 계몽교육
1921년 9월 26일 일본 요코하마병원에서 수술 후 소천, 중국 상해에 안장, 소천 직전 한국 은퇴 교역자의 은급기금으로 500달러 화사






2) 선교사 소개

동아시아를 향한 가슴을 품은 선교사

미국 남감리회 소속인 램버트는 중국에서 선교했던 아버지인 남감리회 소속 제임스 램버트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사역의 무대는 전세계였지만 그중 아시아에서의 사역이 많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미국으로 건너간 렘버트는 1875년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1877년 벤더빌트 대학교에서 신학과 의학을 전공했다. 테네시의 감리교 원로 감독들로부터 성직을 임명받았고, 1877년 그의 아내인 데이지 켈리와 의학 선교를 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1883년에는 감리교회의 목사인 램버트 박사의 지원을 통해서 중국 장수성에 병원을 건립했다. 그가 일본의 감리교 사역을 위해서 일본 서쪽 지역으로 보내어졌는데, 1889년에 그는 코베의 간사이 지역에 가쿠인 대학을 설립했고 그것은 일류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선교사의 일환으로 미국 남부 감리교 선교의 총무로써 일했다.
램버트는 남감리교회의 감독으로 임명을 받은 후에는, 1910년에 브라질에서 사역을 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 감리교회를 설립했고, 유럽을 여행한 후에는 벨기에, 폴란트. 체코와 시베리아에 남감리교를 설립했고, 1921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전세계 선교 사역의 감독으로 일했다. 그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죽었고, 그의 재는 중국의 상해의 그의 어머니 매리 옆에 묻혔다.
미시시피의 메디슨 카운티에 있는 펄 리버 교회에서는 매년 10월 6일 램버트의 날로 기념한다. 이렇듯 그의 무대는 전세계였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중국, 그리고 묻혀있는 곳도 중국이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이 포함되어있는 동아시아를 가슴에 품은 선교사였다.

의료선교사로써의 램버트의 입장

월터 러셀 램버트는 중국과 일본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에 대한 필요, 선교, 목적과 범위, 선교사가 되는 과정, 숙련된 선교사와 그의 임무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선교사에 대한 필요는 다음과 같다. 북미에서는 훌륭한 기독교 학생을 찾고 있다. 첫째는 인생 전체를 투자할만하고 관련된 자격과 훈련을 갖추었고, 수행할만한 시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외국의 선교에 대한 다른 지점에 대한 봉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비기독교 국가의 사람들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콜레라, 천연두, 흑사병, 한센병, 말라리아, 이질, 수면병, 황열 등의 피해가 있다. 그들에게는 종양이 있어도 제거하지 못하고 자라 그것으로 고통 받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들에게는 증상에 대한 약간의 지식은 있지만 과학적인 진단에 관하여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예방 방법이나 치료 수단도 알지 못한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의하면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곳에 1억 2천 2백만의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 했다. 
의료선교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선교는 근대 과학의 기적이고, 근대 과학의 기독교의 기적이다. 즉, 과학으로 인한 근대 의학이 성립된 후 의료선교가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의료선교에 있어서는 질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있는 아픔도 치료해야 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하신 일이다. 의료선교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의무감이 있어야 되고 그의 자비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의료선교에 헌신된 사람은 세계에 대해 삶을 드리고 삶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계된 것이어야 한다. 
의료 선교의 목적은 고통 받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의료선교사는 먼저 선교사이고 둘째가 의사이다. 의료선교 사업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의료선교사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한다. 의료선교사는 봉사의 이상을 묘사하고 소통한다. 목적이 없는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봉사하고 도우려는 욕망이 가득차야 한다. 의료선교사는 공동체를 신체적으로 좋게 한다. 
선교사 후보에서 선교사가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그는 그의 이웃 수백만의 사람들이 환자에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대해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 부르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선교사는 그의 문명을 통해 세계를 복음화 하도록 보내진 것이 아니다. 의료선교사가 되려면 신체적인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강건한 체력이 필요하고, 거친 식이섬유도 잘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으로는 관찰력이 좋아야 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며, 기억력이 좋아야하고 언어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들은 25세가 되기 전에 선교 현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론이고 30세는 되어야 한다. 응급상황에서 차분함과 자기 절제가 중요한 요소이다. 도전적인 상황에서 유쾌함을 유지하는 것이 젊은 의료선교사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자격이다. 하나님에게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모든 기독교적인 인격과 사업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이다. 사랑은 모든 진실함과 선교사업에 있어서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필수적인 열쇠이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실제적인 기독교 사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의대를 마치고 병원에서 적어도 1년을 수련을 받아야 한다. 열대지방에 지원하는 자는 3개월간의 열대의학에 대한 수업을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같이 의료선교는 사람의 힘으로만 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램버트는 의료선교를 ‘두 배의’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1877년부터 1885년까지 미국에서 추가 연구를 위한 짧은 기간 동안 램버트는 중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서양 의료 기관으로 일하면서 상하이에 아편 치료 센터를 설립하고 수 차우 병원을 개설하며 베이징에 록펠러 병원이 된 곳을 설립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1887 년에 일본 남부 선교부인 감리교 성공회를 설립했으며 램버트는 의학 연습에서 교육 및 복음 사업으로 전환했다.

교육에 힘쓴 선교사 램버트

램버트는 1886년 부모와 함께 일본 고베로 가서 남감리회의 일본 선교를 시작했다. 선교사 자녀로서 성장한 램버트는 1886년에 남감리교회(MECS) 일본 선교부의 총리로서 고베에 건너와 일본 최초의 남감리교회를 개척하고 명문 기독 학교인 간세이가쿠인대학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그는 언더우드와 비슷하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자금난 속에서 모두들 램버트의 교육 계획을 비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램버트는 홍콩상하이은행 고베지점으로부터 무담보 융자를 받아 내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기적을 체험했다. 아울러 신뢰와 더불어 가슴을 울리는 그의 명연설은 미국의 은행가 토마스 브랜치 등의 마음을 움직여 거액의 헌금을 쾌척하도록 이끌었다. 램버트는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들을 향해 “기도가 건설적인 힘을 내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를 가진 대담한 기도여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또한 램버트는 1891년 10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개최된 미국 신학교 연맹 연차대회에서 윤치호와 언더우드와 인연을 돈독하게 맺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설립하였을 때, 남감리교회가 연희전문의 교파연합 정신에 찬동하여 이사를 파견하는 등 연희전문학교의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협력을 이어가며 교파를 초월하여 ‘교육 선교’에 힘썼다.
그리고 지금도 UMC의 멤피스라는 감리교 학교에서는 연합감리교회 교육위원화와 고등사역을 통해서 연합감리교회와 관련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연간 4500달러의 장학금을 램퍼드의 이름을 따서 지급하고 있다.

남감리회 시베리아 선교에서의 램버트의 역할

시베리아 지역은 3.1운동의 해외거점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3.1운동 이후의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 되었으며, 한국교회 해외선교의 주요 지역으로서 한국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남감리회는 1920년부터 1931년까지 보다 적극적이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시베리아 선교를 담당하였다.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선교는 감리회 해외선교 백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 남감리회가 폴란드에서 첫 번째 선교사업을 할 때, 백러시아인들 가운데 감리에 대하여 나타낸 호의적이고 협조적인 반응은 남감리회에게 러시아의 철저한 복음화를 위하여 러시아에 교회를 건립하는데 도와주어야겠다는 선교의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이 과정가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램버트이다. 램버트는 러시아는 소비에트 혁명 때문에 감리교에 의해 수확될 성숙된 열매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정교회는 제정러시아와의 관계성, 그리고 외형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번잡한 예전과 미신적인 풍습으로 인해 볼셰비키의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볼셰비키의 지배 속에서 몰락되는 러시아 정교회가 바로 개신교의 복음을 위한 준비임을 확신했다.
램버트는 이 당시 하나의 선교전략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총괄적인 감리교 협공전략”이었다. 러시아의 동쪽(아시아의 시베리아)과 러시아의 서쪽(유럽의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양측에서 동시에 감리교 선교를 진행하여 볼셰비키 지배하의 러시아에 대해 집게형의 협공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서 양측 연쇄효과의 결합작용으로 러시아에 대한 총괄적인 개신교 복음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램버트는 이러한 전략적인 협공전략 속에서의 시베리아 선교사역 착수를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선교의 기회”라고 말하였다.
램버트는 1919년부터 1921년 별세하기까지 남감리회의 조선을 포함한 동양교회들을 총괄하는 감독으로서 친히 조선에 와서 사역하였고 또한 시베리아와 만주에 선교처를 직접 창설하였다.

세계를 섬긴 선교사 램버트

램버트는 1910년 남감리교회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되어 브라질에 사역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이사회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업을 계획했으며 1911년 램버트는 파이네 대학의 길버트와 함께 기독교 감리교 교회의 지도자와 함께 그 대륙으로 갔다. 그들은 보트와 철도로 2,600 마일, 정글을 통해 벨기에 콩고의 보엔야마 마을까지 도보로 1,500 마일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만난 보니야마 (Whimbo Nyama) 족장의 진지한 응접은 램버트에게 바테텔라 부족에게 섭리적으로 인도되었다는 확신을 주었고, 선교 사업을 계속 진행했다. 1년이 지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와 1913년 콩고를 방문한 선교사 그룹을 모집했다. 또한 그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런던 왕립 지리학회의 연구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램버트는 유럽으로 가서 전선을 방문하여 벨기에,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남감리교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했다. 1921 년에 그는 시베리아로 선교사들을 데려와서 선교를 했고 이후에, 그는 태평양 지역에서 잠시 일했으며 캘리포니아 오크 데일에서 한동안 거주했다.
램버트는 에큐메니칼 감리교 회의와 세계 선교회의 및 교회 협력을 포함한 기타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의료 임무, 동양과 선교 운동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썼다. 램버트는 1921년 9월 2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골은 상하이의 어머니 옆에 묻혔다. 그의 아내인 데이지 켈리 램버트는 1923년 5월 24일 캘리포니아 오크 데일에서 사망했다.

한국에서의 램버트의 사역

램버트는 1899년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한국과의 인연을 맺었고 그 후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하여 연회에 참석하고 진행을 돕는 등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1919년부터는 남감리회 한국, 만주, 시베리아 등 극동지역 선교사역을 총괄하였고 특히 한국의 민족적 대운동인 3.1운동에서 많은 한국교회의 교역자와 교인들이 옥중에 감금되는 등 수난을 겪게 되자 직접 그들 곁으로 찾아가 격려하고 위로하며 여러 방법 동원하여 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에는 한국 여성들의 계몽 사업을 위하여 감리회의 여성 선교사 매미 마이어스를 도와 서울에 태화 여자관(현 태화복지재단)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시베리아와 만주에 이주하여 고생하는 한국인들에게 선교를 목적으로 만주 시베리아 선교처를 개설하였으며, 중국서북지역에 기아자 구제를 위해 미국에서 100만 달러를 모금하기도 했다. 그 후에 시베리아 선교 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극동지역 선교의 필요성을 글로 저술하여 인쇄에 붙였으나 신병으로 입원하여 한국연회도 인도하지 못하게 되자 그 부인의 명의로 한국교회 은퇴교역자를 위하여 기금 500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신병을 얻은 이후에도 램버트는 선교 사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시찰하며 선교처를 관리하였으며, 그곳의 사업을 소개하는 논문을 집필하여 미국 내 교회기관지에 게재하였다. 이에 답지되는 헌금을 통해 기념예배당을 설립하였다. 램버트는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한국 교회에게 로마서 8장 26절을 항상 보며 전도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더불어 “저는 계속 여러분들을 지켜볼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통해 한국의 복음화가 속히 이루어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후 램버트의 후임으로 남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를 맡았던 핀슨(W. W. Pinson) 목사는 램버트를 “나의 선임이었던 램버트는 예언자이자 개척자였다”고 램버트의 평전에서 말하며, 램버트의 평전을 직접 썼을 만큼 램버트의 정신과 삶을 계승한 그의 제자였다. 또한 램버트는 자신의 기고에서 한국의 복음전도를 위한 미국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무를 다섯 가지 말하는데, 첫째, 그는 죄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끊임없이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곧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젊은 남녀 청년들은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를 전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청년들을 교육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 사람이었다. 셋째, 설교와 가르침에서 효율적인 복음 전도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 긴급한 호소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모든 교회는 복음 전도에 있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섯째, 한국에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가 듣기에 충분한 기회를 가질 때까지 복음 전도를 멈추지 말아야 하며, 그를 위해 캠페인을 구성하고, 예수님은 완전히 끝까지 그들을 구할 수 있고 구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고에서 끝으로 한국은 복음 전도를 위해 이미 추수밭이 익었으며 이는 곧 우리가 받은 예언이기에 복음 전도를 강력하게 호소한다. 그는 성령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한국으로 갈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하며,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한국은 복음화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기고를 마쳤다.

평가

램버트는 한국에서는 강력한 인상을 남길만한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에서 특별히 남감리회 선교사로써는 인정할만한 사역을 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아편 치료센터나 병원을 개원해서 했던 의료사역이나, 언더우드와 같이 의료사역에서 교육사역으로 전환하는 방편으로 했던 일본에 대학을 설립한 일, 그리고 한국에서 태화 여자관을 설립해서 여성들을 계몽하는 일들을 한 것이 그의 사역을 대표하는 것들인데, 그 당시에 램버트가 세운 간사이카쿠인대학은 현재 일류대학 중의 하나가 되었고, 한국에 설립한 태화 여자관은 현재까지 태화복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복지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비록 그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희박하지만, 그래도 희박한 그의 사역의 업적들을 살펴볼 때 앞으로 선교사를 준비하는 많은 선교사후보생들이 참고할만한 좋은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작성일:2020-07-03 11:32:24 125.130.18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