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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61/Vinton, C. C., Vinton, Lefitia Coulter

닉네임
진연경
등록일
2020-07-03 12:11:52
조회수
66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61_ 진연경.hwp (10094592 Byte)
I. 기본사항
출처: “Vinton, C.C.”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513-514.

Vinton, C.C. (빈턴/賓頓 /미국/ NP)
1.생물연도: 1856-1936.6.26. 미국에서 출생

2.학력: 의대이수

3.경력
1891.4.3.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서울의 국립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 원장에 취임
1893.11 제중원 원장 사직, 개인 진료소에서 치료, 복음전도 평양, 의주, 만주에 이르는 전도여행
1897.4.1.의 편집주간으로 실제 책임
1901부터 부정기 간행물로 발간
1905 와 병합, 월간 정기간행물
1904 나병환자 실태조사위원으로 선임, 부산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
1903.12 4 부인소천, 1908 딸 소천
1908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
1936.6.26. 뉴욕에서 소천

4. 가족사항: Vinton, Lefitia Coulter(부인), Vinton, Mary Blanchard(딸)

5. 논저: [논문] Slavery and Feudalism in Korea, KRP, vol.Ⅱ, 1985;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6:671, 1893; Missionary Review of the Year (with W.B. Scranton), KRP, vol.Ⅱ, 1895; Statistics of the Protestant Churches in Korea, KRP, vol.Ⅱ, 1895; Literary Need of Korea (with A.Kenmure) , KRP, vol.Ⅳ, 1897; Latest Advance in Korea, Missionary Review, 23:367-69, 1900; Today in Korea Mission, Missionary Review, 29:571-74, 1906; A Surgeon's Experience, church at Home and Abroad, 1891; Transportation in Korea, Railroad Men, vol ⅩⅢ, No.9, 1900; Obstacles to Missionary Success in Korea, Mission Review of the World, vol.7, No11, 1894.


Ⅱ. 선교사 소개: 빈턴 씨씨 선교사(Vinton, C. C. 1856-1936.6.26.)

Vinton, C.C, Vinton, Lefitia Coulter(빈턴 / 미국 / NP)

1. 선교를 준비하다

빈턴 Vinton, C.C 1856--1936.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의사(醫師,) 한국명 빈돈(賓頓) 미국 출신.그는 소년 때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다. 1891년 4월 3일 부인 (Lefitia Coulter)과 함께 내한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북장로회가 관리하던 국립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알렌은 빈턴 선교사에 대해 ‘평균적인 선교부 의사보다는 수준이 조금 높다’고 평한 바 있다. 빈턴 선교사는 의사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2. 한국에서 선교의 꿈을 펼치다.


그리고 헤론( J.W. Heron; )의 별세로 공석 중이던 원장에 곧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부 경영의 국립병원인 관계로 당신 조선 정부는 병원에서의 선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조선정부는 물론 알렌 공사와도 잦은 마찰을 빚었다.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제한받자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직하고 1893년 11월부터 자신의 처소에 개인진료소를 설치하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복음전도를 병행하였다.불과 14개월 동안에 2천 여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한편 빈턴 의사는 전도여행에 흥미를 지녀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여행에 동행하였고, 이후 평양을 북장로회의 선교 근거지로 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에도 평양 의주에 이르는 전도여행과 만주의 우장 지역까지의 순회전도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여행후 특별히 개신교 선교사업에 있어서 큰 저해요인의 하나로 대두되었던 천주교회의 방해활동을 보고 이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후 선교사 공의회의 회계로 선임되어 재정 전반을 관할하였다.


3. 한국기독교의 지성의 창을 담당하다


1897년 4월 장로교 최초의 그리스도 신문 창간시 편집주간을 담당했다. 조선성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의 창설에 공헌하고 초대 재정부 서기를 맡아보았다. 특히 재임시에 전국 교회에 「조선성교서회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게 하는 등 기독교서회 사업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 일은 1907년 그가 한국에서 퇴임할 때까지 계속하였고 그 사무를 구세군 사관인 본윅(G. Bonwick)에게 인계한 바 있다. 또한 1895년 11월에는 재경 외국인 인사들을 초청하여 <기독교문학의 실정과 요구를 고려하기 위하여>라는 주제로 집회를 열고 한국 독서계에 기독교문학을 보급시키는 데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1897년 4월 1일 언더우드 목사를 사장으로 하여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1901년 <그리스도 신문> (The Korea Field)를 부정기 간행물로 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1905년에는 감리교회의 존스(G.H. Jones)가 발행하던 와 병합하고 월간 정기간행물로 발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빈턴은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실제로 그 활동 분야에 있어서는 기독교 문서사업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 될 수 있다.



4 상한갈대를 돌보다

그밖에도 구라사업에도 전력하여 1904년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 어빈(C. H. Irvin), 스미스 등과 함께 나병환자 실태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그해 부산에 나병환자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그 후에는 이 수용소를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에서 관리하였다.한국의 나환자 현황은 후일(1909년) 미국 북장로교가 나환자 구호사업을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빈턴은 인도의 나환자 선교사인 베일리(Baily)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회사 받아 수용소의 시설을 확장하는데 공헌하였다.

5 선교를 위한 땀방울

또한 선교활동을 위한 자금확보를 위하여 100여 대의 재봉틀을 들여다 팔기도 하였다. 또한 성서공회(셩교서회)의 건물을 이용하여 벽지장사를 파슨스(Parsons)사와 계약하여 판매 수익의 5%를 서회에 지불하기로 하고 사업을 시작하였고, 1907년 12월 16일 은퇴하였다.


6 그의 가족들

Vinton, Lefitia Coulter (Vinton, C.C.의 아내)
레티샤 선교사는 제중원 3대 원장을 지낸 의료 선교사 빈턴의 아내이다. 1873년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에서 태어난 레티샤는 빈턴 선교사와 결혼 한 후 1891년 4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왔다. 레티샤 선교사는 내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디Cadwy(1894년)와 토미Tommy(1896년) 두 자녀를 잃었고, 그 슬픔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30세 되는 해인 1903년 자신마저 숨지고 말았다. 그녀의 사후 1908년에는 셋째 왈더Walder마저 죽음을 맞음으로써 양화진에는 모두 4명의 빈턴 선교사 가족이 안장되었다. 선교사의 세 자녀 묘비에는 오직 이름만 쓰여 있을 뿐 어떠한 비문도 새겨 있지 않아 보는 이를 더욱 슬프게 한다


양화진 제1묘역에는 그의 부인과 어린 세 아들이 (아-4)부터 (아-7)까지 자리하여 묻혀있다.
아-4 레티샤 C. 빈턴(Vinton, Letitia Coulter, 1873~1903)
빈턴 선교사의 부인이다. 레티샤는 1873년 1월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1891년에 내한하였다. 1903년 12월 4일 서울에서 30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 되었다.

아-5. 토마스 빈턴(Vinton, Thomas, 일명:Tommy, 1896~?)
선교사의 아들이다. 토미(Tommy)는 1896년 8월 19일 서울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아-6. 캐뒤 빈턴(Vinton, Cadwallader C., 일명: Cadwy, ?~1894)
선교사의 아들이다. 캐뒤는 1894년 8월 22일 사망하여 양화진 묘역에 묻혔다.

아-7.왈더 빈턴(Vinton, 일명:Walter)
선교사의 아들이다.

그 외에 딸 Vinton, Mary Blanchard이 있었으나( 내한 선교사 총람 기재) 안타깝게도 양화진 무덤에 그녀는 안치되어 있지 않다.
작성일:2020-07-03 12:11:52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