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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번 / Dodson, Samuel Kendrick(미국, SP) / Dodson Hattie B. Knox; Dodson, Violet Knox

닉네임
최은찬
등록일
2020-07-03 13:47:53
조회수
80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2번_최은찬.hwp (1370624 Byte)
1. 선교사 소개
1) 기본사항


성 명
(영문) Samuel Kendrick Dodson
(한글) 도대선(都大善)
생몰연도
1884. 5. 12.(미국 캘리포니아) - 1977. 5. 20.
국 적
미국
출 생
버지니아주
소 속
PCUSA
선 교 지
광주
내한연도
1911
이한연도
1928
가족사항
부모 George Washington Dodson(1840-1916)
Naomi Salina Dodson(1849-1937)
형제 Martha Rebecca Dodson(1879-1974)
Mary Lucy Dodson(1881-1972) 도마리아
Edwin Moseley Dodson(1882-1958)
Amy Alice Dodson Garrett(1885-1947)
William Huie Dodson(1891-1980)
배우자 Hattie Octavia Knox Dodson(1884-1924)
-> 1922년 결혼(자녀 1명)
Violet Blythe Knox Dodson(1886-1950)
-> 1927년 재혼



2) 선교사역


기간
내용
연도
선교부
1911
1912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7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제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
광주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내한
어학, 장성 순회전도 보조
어학, 곡성 Bell 구역 전도보조
어학, 북서구역(장성, 무장, 고창) 전도
북서구역, Knox 구역의 1/3 전도
북서구역, Knox 구역의 2/3 전도
북서구역, 북동구역, 남서구역 순회전도
북서구역, 안식년
북서구역, 영광 전도사역
북서구역, 광주 북부구역 전도, 녹스(Knox, Robert)와 화순군 원리교회 설립
북서구역, 광주 북부구역 전도, 남자성경공부반 책임
북서구역, 광주 북부구역 전도, 남자성경공부반, 전주계절사역(3주)
모슬포 사역
북부구역 전도
북부구역 전도
북부구역, 남동(Knox)구역 전도, 안식년
북부구역, 북서(Paisley) 구역 전도



3) 학력 및 경력

기간
기관
부터
까지
1902
1909
1926
1930
1906
1909
1927
1931
다니엘 베커 칼리지
오스틴신학교 신학 학사
텍사스 대학교
리치몬드 대학교 대학원, 유니온신학교 신학 석사




2. 선교사역 소개

1) 9년간의 불모기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총독부에 대한 반감은 교회 성장률에 영향을 미쳐, 1910년부터 교회 교인들의 수가 점차 감소하였다. 1910년 신앙고백으로 추가된 교인 수가 2,010명이었는데 9년이 지난 1919년에는 368명으로 줄었다.
1911년 선교회 회의록에는 전라도 지역의 세례교인 수가 7,000명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왓슨(A. W. Watson)은 이 시기를 ‘9년간의 불모기’로, 스피어(Robert E. Speer)는 ‘총 손실은 순 이득의 두 배가 된다’고 평할 정도로 교회 성장이 없었던 침체된 시기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만주로, 시베리아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업주의, 불가지론, 인문주의 등 서양 문화와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불거지면서 ‘자립’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순회조사들을 통해 시작된 교회가 스스로 복음전도자나 목사를 세워 교회를 책임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1913년 선교부 회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 여러 각도로 토의하며 기도한 끝에 선교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립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밀고 나가자”는 결의를 하였다. 당시 레이놀즈는 교회 순회 지도자들의 전체 모임을 열고 자급을 강조하는 선교부 결정에 대해 말하면서 두 명의 조사와 한 명의 여전도사 봉급을 인상할 것을 건의했다. 1913년 20개의 순회교회가 두 사람의 선교조력자 ‘순회조사’를 위해 72원씩 모금하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해애 열정적으로 그 액수의 5배 이상을 모금하고, 순회구역을 4구역으로 나누어 월급을 월 10원씩 책정하고, 네 명의 조사와 한 명의 전도사를 선출하였다. 이러한 확산이 다른 선교부에 의해서도 보고되었다. 1915년 광주의 도대선 목사가 순회 구역 안의 복음전도자 6명 중 4명은 한국교회가 전부 감당하고, 2명은 교회와 선교회에서 나누어 부담한다고 썼다. 세심한 계획, 믿음,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교회 성장이 없던 척박한 시기에 그들은 선교를 위한 터 닦기와 집중 개발이라는 두 가지 사항에 각별히 신경썼다.

2) 광주선교부
초기에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는 규모나 비중이 매우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광주에 도로와 철도가 신설되면서 광주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당시 광주에는 16,000명의 한국인들을 돌보기 위해 4개의 현지인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 세 교회는 매우 규모가 크고 잘 조직된 교회였다.
당시 광주는 주일학교 운동 확산의 본거지였다. 광주 선교부는 병원, 미션 스쿨, 성경공부방, 외국인 예배 등 다양한 방면의 사역을 감당했는데 그 중에서도 성경공부방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닷슨 선교사는 광주에 있는 금당리 교회, 비아리 교회 등지에서 순회사역을 하였다.

3) 화순과 순창에서의 사역
닷슨 선교사는 화순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그곳의 수리 교회, 석고리 교회, 화순읍 교회를 차례로 순회하면서 세례예식도 베풀고 또 강단을 지켰다. 1920년에는 화순군 원리교회를 녹스 선교사와 같이 설립했다. 원래 순창군은 전라북도였지만 광주 선교부가 선교구역으로 정하고 활동하였는데 여기서도 닷슨 선교사는 순창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 조사들과 같이 쌍계리 교회, 반월리 교회, 구룡리 교회, 금성리 교회 등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4) 장성에서의 사역
장성군읍교회가 설립된 후 선사에 선교사 배유지(E. Bell, 1868-1925)가 조사 변창연, 김기천 등에게 전도하여 약 40명의 신자가 모이게 되었다.
그후 닷슨 선교사와 김세열이 인도할 때 영수 정의가 사역에 매진하였다. 닷슨 선교사는 순창에서 장성으로 순회지역을 옮겨 사역하였다.
전남노회는 제 6회에 모임에서 임사부 보고에 의해 광주 북문외교회에서 남문외교회를 분립하고 닷슨 선교사, 지방조사 이도경, 남대리 지방 조사 정순모, 손창욱 등에게 학습내용권을 인허하고 장성군 삼동면 소룡리 교회에 백용기를 닷슨 선교사와 동사위임목사로 청원하였다.
전남노회 제 10회 모임에서는 장성역전교회에서 목사 백용기를 기지방 선교사 도대선과 동사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하였다.
1918년 보생리 교회는 이재현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목사 백용기, 선교사 도대선, 장로 김문삼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장성군 소룡리교회에서 정도명, 최한익, 성재원 등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고 닷슨 선교사와 조사 이계수, 김방호가 차체시무하였다.
장성군 두월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장병식, 장기수 두 명이 세운 교회에서 출발해 영신교회에 내왕하면서 전도하여 신자가 늘어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선교사 도대선과 조사 고시중, 박정필, 홍우종 등이 재직노회하였다.

1922년 도대선 선교사는 장성읍 교회가 선교사와의 불화로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학교가 폐지되었을 때 조사 고시중과 광주에서 이주한 문태원이 합심하고 노력하여 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썼다.

순창군 발산리교회의 경우 고창거, 김경호 처가에 방문했다가 전도하여 송판종 가족과 추병환이 믿고 송판종 가옥에서 회집예배를 하였고 선교사 도대선과 김경서가 교인들과 열성으로 전도하여 가옥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사기 편찬위, 박용규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48.
그밖에 행호리 교회, 월평리 교회 등을 크게 부흥시키는데에 일조하였다. 이처럼 닷슨 선교사의 경우 자주, 자립, 자치의 원칙 속에서 현지인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되 그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도록 현지 지도자를 도와 순회사역을 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1911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남 광주 선교부 소속으로 농촌지역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부인은 1927년에 처녀 선교사로 왔지만 곧 결혼하여 1년간 부부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28년에 부인과 같이 귀국하였다.

5) 제주 모슬포에서의 사역
도대선 선교사는 1922년 3월 제주도 모슬포에 도착하여 1주일 동안 선교활동을 했었다. 선교활동을 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리한 여행기와 여행과정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 3점이 한국선교상황을 알리는 잡지인 ‘코리아 미션 필드’ 1922년 9월호에 실린 것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도대선 선교사는 1922년 3월 16일 목요일 정오 쯤 목포에서 모슬포를 향해 출발하였고, 3월 20일부터 일주일 간 제주에서 성경강독회가 열렸다는 사료를 통해서 도대선 선교사가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한국 기독교의 첫 목사이자 항일 순교자인 이기풍 목사와 함께 일주일 간의 성공적인 예배 사역과정, 제주 사람들의 생활상, 모슬포 인근의 산에 올라 한라산 이남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본 소감 등이 여행기에 담겨졌다.
작성일:2020-07-03 13:47:53 119.197.136.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