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68 / Crane, John Curtis / Hedleston Florence Crane

닉네임
홍성지
등록일
2020-07-03 14:41:34
조회수
73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68_홍성지.pdf (1451402 Byte)
존 크레인 선교사 / Crane, John Curtis (1888-1964)

Ⅰ. 기본사항
1. 이름 : Crane, John Curtis / 크레인 / 한국명 : 구례인(具禮仁)
2. 출생연도 및 장소 : 1888.2.25. 미국, 미시시피, 야주 카운티(Yazoo County), 야주(Yazoo City)
3. 사망연도 및 장소 : 1964.7.17.(76세) 미국, 미시시피, 해리슨 카운티(Harrison County), 걸프포트(Gulfport)
4. 매장 장소 : 서던 기념공원(Southern Memorial Park) - 미국, 미시시피, 해리슨 카운티(Harrison County), 빌럭시(Biloxi)
5.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6. 한국선교기간 : 1913. -1957.
7. 연표
1888.2.25. 미국 미시시피주 야주 출생
1904-1905. 미시시피 대학교, 학사
1905-1906. 사우스웨스턴 장로대학교
1907-1909. 콜로라도 대학 졸업
1910-1913. 유니온 신학교 신학, 석사 / 1910. 사우스웨스턴장로교대학 학사.
1913.5.18. 설교자 인허와 목사안수 받음
1913.5.20. Florence(부인)과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에서 결혼
1913.6.3. 센트럴미시시피 노회로부터 선교사 임명
1913.8. 한국어 공부,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순천선교부에 파송,
1914. 한국어 공부,
1915. 한국어 공부, 남장로교선교회의 교육위원회에 소속, 순천지방
1916. 한국어 공부, 도서관 관리, 전도사역, 타지역에서 공부하는 순천 학생들 관리. 언어시험(필기, 구두) 합격.
1917. 서부구역 전도사역, 흥양(興陽) 5처(五處) 교회에 동사전도목사(同事傳道牧師)로 임명됨
)
1918. 서부구역 전도사역, 안식년
1920. 서부 순회구와 순천 선교지부 담당 & 안식년이던 프레스턴의 권서인 순회구 담당 이재근, 134
. 책방책임, Preston구역 순회전도사역
1921. 서부 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 매산학교 설립(4월~)
1922. 서부 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 매산학교의 초대교장이자 임시교장(~8월)
, Reynolds, J.B. 구역 전도사역, 광양 전도담당
1923. 서부 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 신학교(1학기)교수,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32회 연례회의에서 선교회 회장으로 당선
1924. 서부 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1925. 서부 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 5회 노회에서 총회 총대 3인(선교사)에 뽑힘(2월3일).
1926. 서부및 남서부 순회구 및 프레스턴 부재시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 담당함
, 동부구역 전도사역, 장흥 전도보조, 문서사역, 안식년(6월~27.여름)
1927-1929. 유니온 신학교 명예신학(박사), 안식년 복귀
, 서부순회구 전도사역, 동부와 동북부 순회구도 상황에 따라 담당, 문서사역
1930. 서부구역, 동부구역 전도사역, 문서사역, 13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당선(6월2일) 1931. 서부구역 전도사역, 번역사업, 일시적 귀국
1932-1933. 남서부, 북동부, 남동부구역 전도, 문서업무, 성경개정, 16차 노회에서 회장으로 당선(6월 8일)

1934. 12구역제외한 전지역 전도사역, 문서업무, 성경개정
1935. 남서부, 북동부구역 시찰, 문서업무. 성경개정
1936. 남서부구역 전도사역, 문서사역, 신약성경개정사역
1937. 순천 남서부구역 전도사역,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조직 신학교수로 청빙되어 학생지도(9월~38.6.)
, 성서 공회의 성서 번역위원으로 활약, 문서 및 신약성경개정사역,
1938. 안식년(6월~)
, 미시시피주 파스카골라장로교회에서 목회, 프린스턴신학교 박사후(post-doctorate) 과정 이수
1939. 입국.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선교사자녀 교육(교목과 교사 역할)

1940. Sacerdotal Prayer of Our Lord 출판.
1941.9. 귀국
1942-1946 Pascagula에서 state supply minister로 사역.
1945 한국선교 재개를 위한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46. 입국(8.15), 순천에서 황폐화된 순천지부의 전반 복구 중점, 순천 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과 소요리문답 강의, 매산고등학교에서 영어 강의(9월~), 순천노회 시골교회 순회사역
1947. 조사위원회 해체, 선교회가 정식 조직됨, 2차 회의에서 전주로 선교부 배정됨.
1948. 전도사역, 남자성경학교 교육활동
1949. 전도사역, 건강상의 문제로 귀국(~1954년)하고, 조직신학 저술 작업 마무리 함.
1950.3. 심장발작, 미국에서 요양
1954.9 – 1956.10.6. 재재입국, 서울 소재 장로교신학교의 임시 교수
1956.10.6 선교사 은퇴후 SS INdian Bear호를 타고 귀국길에 오름.
1956.10.25. 42세(closing 43)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 Gulfport에서 거주.
1964.7.17.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 금요일 첫 번째 장로교회 남성 모임에서 사망.

8. 연구활동
8.1. 저서
1946. 조직신학 3권
8.2. 역서
1931. 안식일과 인생행복, 조선예수교서회(역서)
1933. 하나님과 협동생활, 조선예수교서회(역서)
8.3. 논문
1925.9. 신학변증론(역) 신신학과 구신학을 비교함, 신학지남 7.3
1928.8. We give thee thanks, Presbyterian Survey
1929.1-3. 청직이의 복음, 신학지남 11.1-2
1935.7. 성지의 발견과 준행, 신학지남 17
1937.11. 신약개역에 제하야, 신학지남 19.6
1938.1. 신학이란 무엇인가? 한 과학인가?, 신학지남 20.1
3. 예수의 배일성찬에 대한 명상, 신학지남 20.2.
5. 교의신학상의 사상급역사, 신학지남 20.3
사상의 근원, 신학지남 20.5
7. 종교란 무엇인가, 신학지남 20.4
1939.1. 팔레슽틴에서의 고고학상 발견에 대한 최근의 몇 가지, 신학지남 20.1.
11. 현대 미국에서의 신학사조의 경향, 신학지남 20.1
1940.1. 에길 뿌르너에 대한 평론, 신학지남 22.1.
3. 의지의 자유와 승리의 생활, 신학지남 22.2
5-9. 신약개론, 신학지남 22.3-5
1950.2. 의지의 자유와 우리의 전하는 복음, 신학정론 2.1.

9. 가족사항
부모 : Edgar Shields Crane(1858-1918),
Elizabeth Letitia Gebhart Crane(1861-1906)
부인 : Hedleston Florence Crane(1888-1973.11)
누이 : Janet Crane(1885-1979)
동생 : Paul Sackett Crane(1889-1919)
William Earl Crane(1899-1987)
자녀 : Lillian Crane Southall(1915-2000)
Paul Shields Crane(1919-2005)
이복형제 : Edgar Martin Crane(1914-1977)

Ⅱ. 선교사 소개 : 존 크레인 선교사 / Crane, John Curtis (1888-1964)
1. 출생 및 선교사로 방한 전.
1.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을 지켜온 경건한 가정과 그의 신학적 배경
1) 경건한 가정
존 커티스 크레인은 1888년 2월 25일에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야주 시티에서 태어났다. 존의 어린 시절 가정에 대한 기록을 아직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부모가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야주시티에 정착했는지, 어떤 신앙과 직업을 가졌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네 자녀 중 세 자녀가 남장로교 선교사로, 막내가 일평생 남장로교 목사로 일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가정이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을 지켜온 경건한 가정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2) 신학적 배경
1904년-1905년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미 장로교의 구학파 신학 전통(완전영감, 유기적 영감)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에 열려있던 학교였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 공부한 크레인 역시 구학파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한 자였다. 다만 그는 한국에 최초로 무천년설을 가르친 사람으로, 개혁주의에서는 무천년과 전천년과 후천년설이 모두 포용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크레인이 종말론에 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사에서 종말론의 해석이 다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자신의 종말론만을 주장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세로 인하여 종말론의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2. 한국 땅에서의 첫 사역을 위한 도약(순천 선교지부)
1913년 8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그 해에 막 신설된 순천 선교지부에 소속된 크레인 부부에게 첫 1년 동안은 언어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맡겨지지 않았다. 부부는 순천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언어 프로그램이 개설된 광주에 일정기간 머물러야 했다. 실제로 1913년 8월에 열린 연례회의록의 순천지부 선교사 명단에는 1913년 4월에 공식 시작된 순천선교지부 소속으로 크레인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순천지부 선교사 사역할당 항목에 처음으로 크레인과 아내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사역할당은 언어공부였다. 크레인 부부가 명부에 누락된 이유는 그들이 언어공부를 위해 광주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순천에 온 지 1년이 지난 1914년 연례회의록에 의하면, 존 크레인이 1년차 언어시험을 통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신참 일부와는 달리, 구두시험에 통과했다는 기록만 있는 것으로 보아, 1년차 필기에는 불합격한 것 같다. 서양에서 온 신참 선교사들에게 언어가 얼마나 큰 도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후 1916년 2년차 필기시험에 통과하고 1917년 6월에는 3년차 필기와 구두시험에 합격했다. 3년간의 언어공부와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더 중요한 전도 사역을 맡을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크레인은 남장로교 선교회의 교육위원회에 소속되어, 순천 지방 남학교를 책임지게 되었다. 후에 매산남학교가 되는 이 학교는 원래는 사숙 형태로 운영되던 보조학교로 시작했다가, 매곡동 천막에서 운영되던 문법학교를 발전시켜 인가를 받아 1913년 9월에 은성학교로 개교했다. 학교의 운영은 쉽지 않았다. 문제는 1915년 4월에 총독부 당국이 발표한 사립학교규칙 1차 개정령 때문에 발생했다. 이미 1908년 10월의 사립학교령을 통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모든 사립하교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준 총독부는 1915년의 개정령을 통해 종교계 학교에 대한 통제 의도를 명확히 했다. 교육과정의 표준화, 자격증 보유 교사의 채용, 일본어 교육 의무화에 더하여, 종교교육을 금하는 것이 핵심인 이 규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종교교육 금지, 즉 선교계 학교의 경우, 성경교육 금지였다. 다행히 이 규정이 실제 적용되는데 10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법령 선포 이전에 이미 ‘사립 각종학교’로 분류된 상태로 운영되고 있던 남장로교 선교회 구역 내 다른 학교들은 10년 간 버텨낼 수 있었다. 은성학교는 규정을 어긴 결과 결국 1916년에 교육명령을 받고 폐쇄되었다. 이 난제의 시기였던 1915년에 학교운영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기로 합의된 이가 바로 존 크레인이었다. 1916년에 존 크레인이 할당받은 사역은 언어공부, 도서관 관리, 전도사역과 더불어, 타 지역에서 공부하는 순천 학생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즉, 이때 폐교된 은성학교 학생들은 광주학교(숭일학교)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는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이 때 이후 크레인은 순천지역, 특히 서부순회구, 혹은 서남부순회구를 순회하고 돌보는 목회자이자 전도자로 장기적이고 안정된 사역에 돌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 3년차 언어시험의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모두 합격함으로써, 말과 글을 통해 전달하는 복음전도사역에 가장 중요한 무기를 장착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사역전환의 계기라 볼 수 있다.

3. 크레인 부부의 고통 그리고 위안

1913년에서 1919년 사이의 시기는 크레인 부부에게 따뜻한 위안을 준 동시에, 한편으로 처절한 고통의 근원이었던 것은 가정이었다. 1915년 10월 31일, 순천에서 첫째 딸 릴리언이 태어났다. 그리고 릴리안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레티셔 크레인이 언니보다 2년 늦게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여동생은 세상에서 채 4개월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 가정에서 어린 자녀가 죽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은 이 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2년 후 존 크레인 부부가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나 있던 1919년 3월 26일에 형의 분신과도 같았던 연년생 동생 폴 새킷 크레인이 열차사고로 한국에서 사망했다. 딸 하나를 얻고, 다시 딸 하나를 잃고, 이어서 분신 같은 동생을 잃은 존 크레인에게 다시 위안이 찾아왔다. 시동생이 사망한 시기에 거의 만삭의 몸이던 플로렌스는 5월 2일에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의 친정에서 첫 아들 폴 크레인을 낳았다. 그러나 1921년 3월 25일 크레인 부부는 둘째 아들 존 커티스 크레인 주니어를 출산하지만 6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다시 크레인이 36세이던 1924년 5월 20일에 새로운 딸이자 막내인 플로렌스가 태어남으로써, 자녀를 얻고 잃는 이전의 패턴을 다시 반복했다.

4. 전도와 순회사역

크레인은 한국 동역자들과 함께 순천의 서부지역교회 성장에 확고한 기틀을 닦으며, 동시에 짧은 기간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얼마간 복교한 매산학교의 교장이 되며,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다시 안식년을 떠나는 1926년 6월까지 크레인은 계속해서 서부, 혹은 남서부 순회구를 책임졌고, 프레스턴이 없는 기간에는 그가 맡았던 권서인 순회구와 북서부 순회구를 추가로 맡기도 했다.
이 시기 한국 장로교 호남지역 교회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은 순천노회의 탄생이었다. 1913년에 선교지부가 세워짐으로써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순천은 이 때 이후 선교사와 한국인 전도자들의 노력으로 10년 정도가 지나면 새로운 노회가 하나 결성되어도 될 만큼 교세가 성장했다. 이에 1922년 9월 10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제11회 총회에서 전남노회가 순천노회를 분리하여 따라 세우기를 청원했다. 이 안이 통과되어, 순천노회가 1922년 10월 3일에 공식 결성됨으로써, 전남 지역은 전남노회와 순천노회로 양분되었다. 당시 회의에서 순천노회가 맡기로 한 지역은 구례, 곡성, 순천(여수), 광양, 보성(고흥)이었다.
이후에 존 크레인은 주력 사역 현장이 서부였음에도 더 광범위하게 순천지부와 노회 전역에 미친다.
크레인은 전도사역에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그의 사역은 많은 열매를 맺는 사역이 되었다. 첫째, 고흥군 화전리 교회에 조사를 파송하여 전도를 지원하였고, 신자가 다수 증가하여 초가 8간(間) 예배당을 건축하고 분립하도록 도왔다. 둘째, 순천군(順天郡) 이미교회에서 풍우로 잃은 교회가 전복되어 전도를 열심히하여 4가정을 얻고 4간(間) 예배당 건축함) 박용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개정판, , 길두리교회(吉頭里敎會)의 분립한 교회에서 시무(視務)하였다. 셋째, 고흥군 신지구(申之求)의 자택에서 시작한 교회가 발전하면서 선교사 안채륜과 목사 정태인과 조사 목치숙 등과 함께 시무하였다. 넷째, 보성군 무만리교회에서 분립하였으나 전도가 되지 않자 선교사 크레인은 목사 이기풍과 정태인 등과 무만리교회에서 전도대를 조직하여 1주일 동안 전도하였고, 50-60명의 신도를 얻고 8간 초가를 매수하여 회집예배를 하여 무만리교회에서 분립하도록 도왔다. 다섯째, 고흥군 고흥읍교회에서 한천교회가 분립하였고, 이계생이 10년 간 전도하여 다수의 신자를 얻어 8칸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분립하였는데, 크레인이 조사 이형숙과 교회를 인도하였다.
크레인의 도움을 받아 설립된 교회는 순천 가곡교회, 낙성교회, 월곡교회, 이미교회, 고흥 길동교회, 유둔교회, 내발교회, 동정교회, 관리교회, 고흥읍교회, 한천교회, 보성 벌교교회, 칠동교회, 오정교회, 송천 화전교회이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압장선 크레인의 노력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5. 지도자로의 성장을 보여주는 교육책임자의 자리
1920-1926년 시기의 크레인의 성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는 그가 다시 문을 연 매산학교의 초대교장이자 임시교장을 1921년 4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맡은 일이다. 순천남학교가 총독부의 요구조건을 맞추지 못해 폐교된 후 학생 일부가 외지 학교(광주 야간)에 다닐 때, 크레인은 이 학생들의 관리 책임자였다. 그러다 총독부 당국의 유화정책에 따라, 폐교된 학교는 4년 10개월 만인 1921년 4월에 매산학교로 재개교하면서, 초대 교장직을 크레인에게 맡겼다. 이 때문에 크레인이 담당하던 선교구역에서의 전도 및 순회사역에 문재가 생기자, 선교회는 당시 안식년 중이던 존 레널즈에게 연락하여 1922년 여름에 빠른 복귀를 종용한다. 비록 전도와 순회사역이 주요 사역이었기 때문에 교육책임자 자리는 임시직이었지만, 이제 서서히 호남과 한국 장로교 선교 지형에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존 크레인의 성장을 증거하는 사례였다.

6. 성경 개정
순회 전도와 교회 감독 사역 외에 크레인이 주력한 분야는 성경 개정이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남장로교 연례보고서에는 크레인이 할당 받은 사역 내용으로 성경 개정, 특히 뒤로 갈수록 신약 개정 사역이 매년 등장한다. 여기서 개정은 1911년에 완성된 한글성경, 즉 오늘날 한글성서변역사에서 ‘구역’이라 불리는 성경의 번역을 개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서양사상이 들어오면서 나타난 언어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 그리고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고고학과 사본학의 지식이 성경의 의미와 해석을 새롭게 조명하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하여 기존 번역의 개역이 불가피” 했기 때문에, 구역이 나온 해 9월 벌써 개정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즉, 실제 ‘개역’한글판 성경이 완성되어 출간된 것이 1938년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구역의 개정이 완료되는데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크레인은 처음에는 신약개정위원회 위원이 아니었으나, 몇 차례 위원이 바뀌는 과정에서 1930년에 임명을 받고, 1932년부터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주로 지리산, 평양, 서울, 원산에서 약 한달 간 함께 모여서 개정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속도가 붙은 이 작업에서, 크레인이 개정에 관여한 성경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이었다.
신구약성경의 한글 번역은 한국선교 4반세기만에 이루어졌다. 이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인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탁월함과 지치지 않는 끈기와 인내, 협력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크레인은 다른 선교사들의 번역을 원문의 의미에 가깝게 수정하는 일을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번역된 한글성경은 매우 우수하게 번역되었고, 복음주의적 시각으로 번역되었으며, 동양에서 가장 탁월한 성경적 신관을 성경번역에 도입하여 복음전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민중의 복음화와 한글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8. 아내 플로렌스의 사역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제일장로교회 목사이자 미시시대 교수였던 윈 D. 헤들스턴 박사의 딸이다. 미시시피대 식물학과 졸업반이던 1912년 월드 페어에서 미술부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 존이 순회전도자와 목회자, 교육자, 번역자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며 순천지부의 기둥으로 성숙기를 맞이하는 동안, 아내 플로렌스도 교육선교사이자 선교사 부인으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선교 영역을 구축했다. 이미 순천에 처음 정착할 때부터 가정을 돌보는 일 외에, 주로 순천여학교의 산업부를 지도하는 일을 맡아온 크레인부인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학교에서 미술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일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아티스트와 작가들의 인맥이 넓었으며, 꽃들과 한국의 민속학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에게 단추, 테이블보, 손수건, 명주짜기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이 학비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 감상회, 들꽃 감상회를 자주 열었는데,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한국 야생화 도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 중 1931년에 인본 산세이도 출판사가 출간 후, 미국 맥밀런 출판사가 배포한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라는 영문 제목의 이 책을 기자는 ‘조선꽃의 민담’이라는 한글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소개 했다.

이 책은 크레인 부인이 조선에 건너와서 있는 동안에 조선에서 나고 피는 갖가지의 꽃 148종을 손수 그리고 그의 학명과 조선의 고유명까지 일일이 조사하여 그 꽃피는 순서로 편집한 것이다. 책을 열면 원색판 그림이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더욱 재미나는 것은 조선에서 나는 꽃에 대한 노래, 즉 꽃에 대한 조선민요와 또 민담을 일일이 적어 엮은 것이다 … 조선의 장서가 또는 조선의 자연과학자, 조선의 예술가에게 이 크레인 부인의 『꽃과 민담』을 한 번 읽기를 권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플로렌스는 단순히 꽃을 그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식물이 만개하는 때를 기준으로 학명, 향명, 쓰임새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꽃말과 얽힌 이야기까지 기록해놓았다. 그녀의 그림에는 생소한 꽃말을 가진 꽃들이 매우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꽃으로만 알고 있던 것도 매우 다양한 종류의 꽃이 있음을 밝혔다. 예를 들어 제비꽃의 종류가 호제비꽃, 알록제비꽃, 털제비꽃, 흰젖제비꽃, 흰털제비꽃, 고깔제비 꽃으로 구분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크레인 부인은 1930년대라는 이른 시기에 일종의 한국 야생화 도감을 펴낸 선구적 인물로, 많은 재한 선교사들이 자랑스럽게 떠맡았던 한국학의 선구자 중 하나라 할 만하다.

Ⅳ. 참고문헌

[단행본 및 논문]
John Curtis Crane, 『안식일과 인생행복』 (조선예수교서회, 1931)
, 『하나님과 협동생활』 (조선예수교서회, 1933)
김수진, 한인수 편, 『한국기독교사 호남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79)
총신대출판부 『한국신학논문 총색인(1916-1977)』 (총신대출판부, 1979)
G. T. Brown, Mission to Korea, 1962.
, 천사무엘, 김균태, 오승재 옮김 『한국 선교 이야기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1892~1962)』 (동연, 2010) ; Mission to Korea 번역
E.T. Boyer, In Memorial of Rev. John C. Crane.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사기편찬위원회, 박용구 편집, 이교남 번역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개정판』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4)
, 박용규 편집, 이교남 번역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개정판』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이재근, “남장로교 선교사 존 크레인의 유산: 전도자·교육자·신학자” 『한국기독교와 역사』, (4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121-156.

[웹사이트]
< http://blog.naver.com/jich55/220447439529 >, 2017년 6월 29일 접속. -게시물 삭제됨.
< http://blog.naver.com/kjyoun24/60100377680 > 2017년 6월 29일 접속.




새로 첨부한 자료들

[단행본]
한영제, 『기독교세계선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3), 145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Ⅰ』,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9

[웹사이트] - 7월 1일 접속

<https://blog.naver.com/sokhochoe/221565289956 >,
<https://cafe.naver.com/joonggonara/168738232>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52882539/john-curtis-crane#>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52882539/john-curtis-crane/photo>
<https://www.newspapers.com/image/?clipping_id=28383721&fcfToken=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mcmVlLXZpZXctaWQiOjI2NzQxNDM3MiwiaWF0IjoxNTkzNTc3NTcwLCJleHAiOjE1OTM2NjM5NzB9.dRgtXPNn601Q6J84XT0pFSANfAn8SaE6nIIlV1islmM >

<https://www.newspapers.com/image/?clipping_id=22652898&fcfToken=eyJhbGciOiJIUzI1NiIsInR5cCI6IkpXVCJ9.eyJmcmVlLXZpZXctaWQiOjI2NzA5NjQzMSwiaWF0IjoxNTkzNTkxODY0LCJleHAiOjE1OTM2NzgyNjR9.FrIDnkibohHTa6OuyjRzXFAaiFiL4e1fhsGcKB6Zzt0>

[웹사이트] - 7월 2일 접속
http://maesan.hs.jne.kr/user/indexSub.action?codyMenuSeq=178006612&siteId=maesan_hs&menuUIType=sub
작성일:2020-07-03 14:41:34 180.67.9.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