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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2 / Austin, Christian Lillian(1887-1968, SP)

닉네임
장성철
등록일
2020-07-03 16:06:40
조회수
63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장성철.hwp (10353664 Byte)
오스틴 선교사 / Austin, Christian Lillian (1887-1968)

Ⅰ. 기본사항
이름: Austin, Christian Lillian(오스틴 / 吳瑞敦(오서돈) / 미국 / SP)

1. 생몰연도: 1887. 2. 9. - 1968. 9. 2. 미국 노드캐롤라이나주 출생
2. 학력: 프로나 맥도날드대학 졸업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 장로교 교육대학원 졸업
3. 경력: 1912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멕스턴교회의 스폰서)
전주선교부에서 농촌선교, 학원선교, 여성계몽교육에 헌신
기전여학교 및 성경학교에서 성경과목 강의
1939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고향의 맥스턴교회에서 교회학교, 교리학교 교사로 봉직
4. 가족사항: 부모 - 존 데이비드 오스틴(1855-1917)
앨리스 메리 맥 브리드 오스틴(1858-1913)
형제자매 - 샐리 뉴웰 오스틴 헨드먼(1884-1946)
데이비드 맥 브리드 오스틴(1889-1961),
존 딕슨 오스틴(1892-1929)
5. 논저: 없음
6. 참고문헌: 기백 11권; KMYB; Mission to Korea; 구미인조사록; 호남교회사; In Memorian Lillian Austin.

Ⅱ. 선교사 소개

1. 선교사로 방한 전까지

Austin은 1887년 2월 9일 미국 노드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멕스턴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아버지 존 데이비드 오스틴과 어머니 엘리스 메리 맥 브리드 오스틴 사이에서 태어났다. John D. Austin과 Dr. and Mrs. David McBryde의 손녀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멕스턴의 개척자 가족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멕스턴 학교, 플로리다 맥도날드 대학, 레드 스프링스,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있는 장로교 기독교 교육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남 장로교의 선교사들은 그 대학들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서는 한국 선교 현장에서도 계속 지속되었다.

2. 내한과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사역

Austin은 1912년 남장로교선교부 소속으로 멕스턴교회의 스폰서를 얻고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고 곧 전북 전주선교부에 부임하여 농촌선교 및 학원선교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여성 계몽교육에도 헌신하였다. 또한 기전여학교 및 선교부 산하 성경학교에서도 성경과목을 담당하였으며 기도생활과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주력하였다.
그녀가 사역했던 기전여학교는 1902년 1월 매티 테이트에 의해 시작되고 1904년부터 전킨 부인이 교장을 맡았다. ‘기전’ 이라는 이름은 1908년 1월 2일 순직한 전킨을 기념하여 명명하였다. 선교사의 기와집에서 12명으로 시작하였던 사랑방 학교가 2층짜리 서양식 건물로 바뀌며 2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1911년 8월 랭킨 교장이 맹장수술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여 뒤를 이어 새디 버클랜드가 2년간 기전에서 봉직했다. 2년후 1913년 6명의 첫 졸업생이 나왔고 1913년 부임한 수잔 콜튼이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1937년까지 24년간 교장으로 있었다.


3. 당시의 여성들에 의한 사역

한국선교 초기 교인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다. 그러나 1927년 60%의 교인이 여자였다. 이것은 여자 전도사들의 효과적인 사역에 기인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여자 전도사들 중 전주의 Austin이 있었다. 그녀들은 독신녀들이었고, 그들의 사역은 특별히 더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적 관습이 남자 전도사들은 한국의 여성들을 집에서 만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전주 지역에서의 여성 복음전도는 모든 지역의 전형적인 것인데, 그녀들은 순회하여 안수를 주는 방식이 아닌 특별한 시골교회에 집중에 4~5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믿을만한 한국인을 동반하여 마련하여준 집에 상점을 차리고, 기독교 여인들을 위한 공부반을 열어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등을 가르쳤으며 더 높은 수준의 반에서는 예수의 생애와 창세기 첫 부분을 가르쳤다. 오후에는 자유롭게 한국 가정의 안방을 찾아가 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저녁때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모두 모아 일반 모임을 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되도록 간단하게 구세주와 구원의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매우 힘들고 외로웠는데, 사생활이 없어 고통을 받고, 하루 일과가 너무 복잡하였으며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은 보상 받았다.

4. 강제출국

Austin이 사역했던 기전 여학교에는 1916년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여성 항일 비밀 결사인 ‘송죽회’의 지회 형태의 독립운동 그룹이 형성되었다. 숭의학교 출신 교사 박현숙에 의해 태동된 이 그룹은 1919년 삼일 운동 당시 ‘기전 여학교 결사대’로 결성되어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주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승하여 1930년 전주 지역에 반일 애국의 기운을 일으키는 거사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6년 이후 가속화된 일제의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로 기전여학교는 스스로 폐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39년, Austin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게 된다.

4. 이후의 삶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한 Austin은 멕스턴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녀는 그녀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이자 청년 노동자로 지냈으며 여성 조직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수년 동안 그녀는 또 다른 은퇴 선교사 레나 파운틴과 함께 교회 내의 젊은 공동체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쳤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동안 Laurngburg에 있는 스코틀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 Gray Lady로 일했으며 그녀의 교회와 Fayetteville 노회를 통한 선교 사업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했다.
1986년 9월 2일, Austin은 지병으로 죽었고, 그녀의 장례식은 그녀의 목사인 Rev. John A. Brothers, Jr. 와 전임 목사 Dr. James Appleby of Richimond, Va. 에 의해 1968년 9월 3일에 멕스턴 최초의 장로교에서 치러졌다. 그녀의 묘비는 멕스턴The Oak Grove cemetery에 있다.
작성일:2020-07-03 16:06:40 182.172.4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