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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9 / Koons, Edwin Wade

닉네임
권지훈
등록일
2020-07-03 17:54:35
조회수
83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19_권지훈.pdf (967151 Byte)
Koons, E, wade, Koons Lucy F, Floy Donaldson

Ⅰ.기본사항

1. 이름: Koons, E, wade, Koons. 쿤스/ 한국명: 군예빈(君芮彬)
2. 생몰연도: 1880. 8.2-1947.11.29. 미국 뉴욕주 이다케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3.09.27.-1947.11.29
5. 학력: 1900 코라엘대학 졸업
1903 오번신학교 졸업
6. 경력:
1903.10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평양선교부에서 활동
1905 황해도 재령선교사로 이전, 9.12 부인 내한
재령에서 전도와 교회창설, 명신학교 설립하여 교육
1913 서울 경신학교 제 8대 교장으로 취임, 학교발전에 노력
일제말 신사참배 강요로 교장직 사퇴
1941 미국간첩 혐의로 일제에 의해 감금, 본국 송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한국어방송, 격려
1947.11.29. 뉴욕 롱아일랜드 사우드엠프턴에서 사망
7. 가족사항: koons, lucy F. Floy Donaldson(부인)과 1남 5녀


Ⅱ. 선교사 소개

1. 대학졸업 후 선교의 길을 걷다.
북 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군예빈, 1880년 8월 2일 미국 뉴욕 주 이다케에서 출생했다. 1900년에 코라엘 대학을 졸업, 문학사학위를 받았고 1903년에는 오번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빈민구제 단체 ‘선샤인 미션’ 활동을 했고, 오번신학교 졸업 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미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1903년 10월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우선 2년 동안 평양선교부에 주재하면서 선교활동을 돕는 한편 한국어공부와 선교준비에 매진, 그 후 1905년 황해도 재령지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한편부인(Lucy F.Floy Donaldson)은 1905년 9월 12일 별도로 내한, 남편과 합류했다.


2. 재령에 선교기지를 세우다.
1904년 가을, 군예빈 선교사는 선교기지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러 재령에 갔다. 그곳에서 개신교인들을 만나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그곳의 장소는 8x16피트의 방에서 가장자리를 따라 얇게 한줄로 둘러 앉아 있을 뿐이었다.
군예빈 선교사는 1905년, 재령 땅에 선교적 관심이 있음을 보고했다. 이뿐 아니라 교회를 세운 후 4월에는 성도 250명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선교의 열매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재령의 선교기지를 세우며 여러 일들이 발생하였다. 1907년 3년 동안 이 읍에서 기독교 신앙고백자들의 수가 300명에서 500명으로 늘었다.
선교기지가 시작된 첫 해에 1천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새 예배당이, 선교사들이 낸 150달러 외에는 모든 비용을 한국인들이 부담하여 전망 좋은 곳에 세워졌다. 공간으로 인한 염려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임시 거처를 주심에 군예빈과 동료선교사 사역자들은 기뻐했다. 군예빈 선교사의 편지를 통해서 내용을 접했다. “The whang Hai station-charyung, we are all re joicing over. temporary quarters secured.” ‘임시거처를 확보할 수 있어 우리는 매우 기뻐하고 있다!’ 이후, 교회 건립 후, 일 년 내에 회중이 1천명으로 늘어났고 1908년 7월 8일에 두 명의 장로를 장립하면서 교회조직이 완비되었다.


3. 순회사역
군예빈 선교사 가족은 전도사역인 순회사역을 서울로 올라가기 전 1913년 이전까지 잠시 동안 맡았다. 이들이 맡은 지역은 서부 순회구역으로, 이곳은 한국인 최초로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 한 명인 소래의 서경조 목사가 목회를 맡았던 곳이다.


4. 군예빈 가족의 헌신: 기독교 학교의 설립.
그의 주동으로 재령에 북 장로회 선교부가 확정되었고 헌터(W.B.Hunt), 파이팅(H.C. Whiting) 의사 등과 함께 주재하면서 인근지역의 전도와 교회창설에 헌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또한 재령에 명신학교를 설립하여 이 지역 유수의 기독교학교로 발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명신학교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에 설립된 기독교학교, 이 학교의 역사는 재령읍교회(후의재령 동부교회)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1895년 교회가 서립되었으나 클 발전을 보지 못하다가 1898년 평양으로부터 송정신이 와서 교회 건물을 구입한 것을 계기로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이 무렵부터 사숙의 형태로 아동교육이 시작되었다.
1909년 신대리에 독자적인 학교 건물을 마련하고 새로 부임한 쿤스 선교사와 재령읍 교회의 정찬유 장로가 학교를 관리하였다. 초대 교장에 이 부임하여 잠시 있었고 2대 교장으로 김용선 장로가 부임하여 오랫동안 수고하였다.
1912년 안식년으로 본국에 다녀온 후, 군예빈은 (1913-1939) 1913년에는 서울 경신학교 제 8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육 선교사 쿤스는 ‘전도자 학교’가 아닌 ‘기독교 지도자 양성학교’로 가고자 했다. 경신학교는 깨우쳐 새로운 진다는 뜻을 갖고 있는 학교로 이후 줄곧 경신학교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쏟았고 일생을 교육선교에 몸 바쳤다.
이후 1915년 경신학교는 연희전문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학교의 교육 방침은 깨우쳐 새롭게 한다는 모토 아래, 미래의 지도자들이 배출되게 되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는데, 총독부로부터 “혁명자 양성소”란 표현을 들을 정도로 이 학교 출신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안창호, 서병호, 정재용, 김원벽, 김상덕 등이 그들이다.


5. 신사참배의 반대
1937년 정초,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분개했다. 그러나 무력 앞에 힘이 없었다. 당시 장로회 선교사 쿤스(한국명 군예빈), 로즈, 겐소, 코엔, 언더우드 2세는 ‘5인 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다. 그리고 5인 회의는 이렇게 선포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반대한다.” 이 5인 회의 결정에 따라 그해 6월 21일 평양 숭실학교에서 모인 장로회 선교사 150여명이 신사참배 거부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쿤스는 선교사들의 학교 폐쇄와 철수를 ‘파괴’라고 보았다. “당신들은 철수하면 그만이다. 조선의 성도와 백성들이 우리를 원망하는지 왜 모르는가. 그들은 버려진 양들이다”라며 한탄했다. 쿤스는 경신학교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부교장 최태영에게 ‘총독부 교육법 테두리 안에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최태영은 황해도 거부 안악의 김씨 문중 김홍량(1885~1950·교육사회운동가)이 학교를 인수해 기독교 교육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김홍량가는 그의 처가쪽 가문이기도 했다. ‘안악사건’으로 8년간 옥살이를 했던 김홍량은 일제 말기 소극적 친일을 했다. 쿤스에 이어 경신학교 교장이 된 최태영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 학교는 해방 후 다시 한국교회에 되돌려졌다.


6. 선교지를 떠남.
일제말기 신사참배의 강요에 부딪혀 북 장로회 각 교육기관들은 폐교되거나 학교의 정통성을 잃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쿤스 교장은 선교 부 본부의 교육사업 인퇴결정에 따라 교장 직을 사퇴하고 교사 최태영을 교장서리로 임명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반발 후, 쿤스 목사는 무고히 미국 간첩의 혐의를 받아 일제에 의해 조선총독부에 체포돼, 6개월간 수감되고 그 과정서 간첩 혐의 등으로 물고문 등을 받았다. 그 후, 포로교환의 형식으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며 본국에 돌아가서도 경신학교를 위해서는 교장의 자리도 즐겁게 내어 놓고 오직 ‘서광만 비친다면 죽어도 눈을 감겠다.’ 라는 비통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후 [미국의 소리](Voice OfAmerica) 방송에서 한국어를 사용,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한국민에게 격려와 함께 용기를 복 돋아 주었다.


7. 해방 이후
해방된 뒤인 1945년 10월 쿤스는 동 방송망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감격어린 메시지를 전해왔다. “나는 경신학교 쿤스 교장입니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은 드디어 해방되었습니다. 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고 일본은 패망하였습니다. 나도 기쁘고 여러분도 기쁠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남산에 올라가서 신사참배를 아니해도 좋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국에 다시 오겠다는 바람은 끝내 한국에 다시 오지 못하고 1947년 11월 29일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사우드-엠프턴에서 별세했다. 한편 부인은 이후 메인 주 워터 빌에서 여생을 보냈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고 모두 신앙의 맥을 잊고 있다.


8. 쿤스 선교사의 부인
그녀는 아주 특별한 일을 한 가지 했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요리책을 소개했다. 《서양 요리법》(원제: 션영(鮮英)대조 서양료리법, The Seoul women’s club cook book)(경성서양부인회 편)(조선예수교 발행)은 1930년대 군예빈(쿤스)(君芮彬. E.W.Koons) 선교사 부인(Floy D. Koons)을 중심으로 교회와 사회사업을 위해 구성된 여성단체인 ‘경성서양부인회’에서 국내에 처음 발간 소개한 영어와 한글로 병용 표기 제작한 ‘서양요리 지침서’이다. 서양요리를 23가지 부류로 구분하여 해당하는 수백 가지 요리 레시피와 재료를 자세히 소개하였다. 원문은 본래 도쿄의 가정문제클럽이 펴낸 ‘일본 가정 경제’의 요리법을 대부분 인용하였으며, 한글 번역은 당시 캐나다 선교사인 게일(J. S. Gale)(1863~1937)이 참여하였다. 이 사람은 당시 우리나라의 고전 다수를 영문으로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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