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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06 / Eversole. Finley Monwell(1879-1967, SP) / Eversole. Edna Earle Pratt

닉네임
신재승
등록일
2020-07-05 17:50:49
조회수
63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반_06_신재승.hwp (615936 Byte)
I. 기본사항

자료1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Centennial general catalogue
of the trustees, officers, professors and alumni of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1807-1907.
Ed. by Walter W. Moore and Tilden Scherer., ichmond, Va., Printed by Whittet & Shepperson [1908], p.170.

1257. EVERSOLE, FINLEY MONWELL; b. Honey Grove, Tex., Jan. 28, 1879;
A. B., and A. M., H. S. C.; teacher; (3. Gr.) ;
L. Ashev. Pby., Sept. 26, '06 ; 0. Ev. same date; asst. F. 1st Ch., Asheville, N. C., '06—(S. S. Oak Forest '06—; Swannanoa, '07——'07;
S. S. Robbinsville and Andrews, N. C., and prin. Robbinsville Ac., '07—.

위의 자료에 의하면 핀리 몬웰 에버솔(Finley Monwell Eversole) 선교사는 1879년 1월 29일 텍사스주(Texas) 허니그로브시(Honey Grove)에서 태어났다. 그의 학력은 “A. B.” 문학사(Bachelor of Arts)와 “A. M.” 문학석사(Master of Arts) 그리고 “H. S. C.” 고등학교 졸업증서(higher School Certificate)를 가지고 있다. 위의 정보는 1907년에 출판된 자료로, 그 이후의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래의 자료에 의하면 에버솔 선교사는 이후 “Ph. D.” 박사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다양한 정보가 약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추측하기로는 Ashev. Pby.에서 목회자로서, “N. C.” 노스캐로라이나주의 아쉬빌(Asheville)에 위치해 있는 1st Ch에서 사역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1906년과 1907년에 S. S. Oak Forest와, Swannanoa에 이동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약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파악할 수 없었다.

자료2 Ebersol, Charles E., The Ebersol families in America--1727-1937,
including the leading clans who spell the name Ebersole, Ebersol, Eversole, Eversull,
compiled and published by Reverend Charles E. Ebersol., Lansing, Mich., Printed by Franklin Dekeleine Co., 1937., p.220.

6a Dr. Erastus Clarence Eversole, b. July 31, 1846 at Popular Camp, Wythe Vo., Va. d. 1928; m. Elizabeth Jackson 1877. He was buried at Rural Retreat, Va. 6 children:
...
7a*Finley Monwell, 1879
a Finley Monwell Eversole, b. Jan. 29, 1879 at Honeygrove, Texas. Has Ph. D. degree; m. Edna Earle Pratt Sept. 5, 1906. 4 children :
8a Virginia McCready, b. Jan. 20, 1908, at Robinsville, N. C.
8b Catherine
8c Elizabeth
8d Finley Pratt

위의 자료는 에버솔 선교사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에버솔 선교사는 아버지 에라스투스 클라렌스 에버솔(Dr. Erastus Clarence Eversole)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잭슨(Elizabeth Jackson)사이에 여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에드나 얼 플랫(Edna Earle Pratt)과 1906년 9월 5일에 결혼에 결혼하여 네 자녀를 낳았다. 첫째는 버지니아 맥크리디(Virginia McCready)로 1908년 1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 로빈스빌시에서 태어났다. 둘째는 캐서린(Catherine)이고, 셋째는 엘리자베스(Elizabeth), 넷째는 핀리 프랫(Finley Pratt)으로 자신의 이름과 아래의 성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II. 선교사 소개

1913년 침체기에 접어든 신흥학교의 4대 교장으로 에버솔 선교사가 부임하면서 점차 회복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1912년 3월 25일에 4년제 고등과에서 첫 졸업생 4명이 배출하였다. 1913년에 제2회 졸업생 8명을 배출하고, 1914년에는 3회 졸업생 5명을 배출하였으며, 1915년에는 4회 졸업생 4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 3월 24일까지 79명의 소년이 등록했으며 이중에 29명은 교인, 10명은 불신자, 30명은 신자로 분류되었는데 그들 중의 대부분은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학교의 교사 수도 늘었고, 문교부의 교과과정에 맞추어 교과과정도 개편되었다. 졸업생 4명 중 3명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한국컴퓨터선교회," 초창기의 신흥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90년사 9)
, 2020년 7월 1일 접속, http://kcm.kr/dic_view.php?nid=37960.


학교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학생의 수는 기존보다 줄어들었다. 이는 가난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에버솔은 제한된 돈으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며, 기분을 상하지 않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에버솔 교장은 감자밭, 딸기밭, 마늘밭, 그리고 고추밭과 같은 채소재배에 관심을 가지고 1915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위해 채소재배를 하였다. 비록 한국의 양반문화는 육체노동을 천시해왔으나 에버솔은 채소재배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1914년에 비해 1915년에는 2배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조했으며, 이전에는 79달러의 적자를 냈다면 1915년에는 오히려 1.75달러의 이익을 남기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까지는 3·1운동으로 인해 졸업생을 배출할 수 없었다. 위와 동일.


윈(S. Dwight Winn)선교사의 1918년 10월 보고에 의하면 "전주학교의 운동회날"이 신흥학교에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윈은 에버솔 선교사를 성실하고 유능한 교장으로 평가한다. 에버솔은 전주지방의 모든 시골학교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주에서 임무가 허락하는 한 먼 거리에 있는 시골학교까지 자주 방문하였으며 졸업식에는 꼭 참석하도록 노력하였다. 윈은 1918년에 모든 시골학교들을 신흥학교로 초대하여 운동회를 개최한 것을 뛰어난 발상으로 평가한다. 한국 교육사상 유일한 사건이라고 말이다. 당시 여러 운동경기가 벌어졌으며 훌륭한 정신으로 경기에 임했고, 수많은 관중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윈은 이 행사를 위대한 날라 평가한다. 위와 동일.


"송철 회고록"에서 송철이 평가하는 여부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송철은 신흥학교에서 자랐으며, 신흥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교장 여부솔 목사는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로 공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공계통을 강조하였고 송철과 친근하게 지냈다고 말한다. 어느 날 총독부의 일본 공무원이 학교에 찾아와 송철에게 왜 국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의문을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좌담회 석상의 용어는 국어로 강요하는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철은 나는 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를 무시했다. 그가 교장을 찾아가고 나서 여부솔은 송철을 불러 "송 선생님의 애국심은 충분히 압니다만 제발 참아 주시오."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곤 일본인이 학교에 방문할 때마다 송철을 방에 가두고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려볼 수 있는 에버솔 선교사의 모습은 교장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있다. 일제와 독립심 사이의 갈등이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 학교의 존폐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에버솔 선교사는 유니온 신학대학원 재학시절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및 기타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니온 신학대학원 재학당시 부주필(associate editor)로 기록이 남아있다.
선교활동 이후 그의 흔적은 여러 저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The Christian Century라는 저널에서 1960년 “The witness of Jonah”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교회주의(Ecumenical)의 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글 썼다. Eversole, Finley, The Christian Century, 77 no 3 Jan 20 1960, p 70-71.
1961년에는 같은 저널에서 “The meaning of work in our time”이라는 제목으로 노동과 교회 사역에 대한 글을 썼다. Eversole, Finley, The Christian Century, 78 no 35 Aug 30 1961, p 1024-1027.
1963년에는 Theology Today에서 “Man's extremity and the modern artist”라는 제목으로 예술과 종교와 속죄와 허무주의에 대한 글을 썼다. Eversole, Finley, Theology Today, 20 no 3 Oct 1963, p 370-389.
1964년에는 다시 The Christian Century 저널에서 “Art and sacrament”라는 예술과 종교 그리고 현대교회의 성례에 대한 글을 썼다. Eversole, Finley, The Christian Century, 81 no 13 Mar 25 1964, p 393-396.
1968년에는 Theology Today에서 “Regenerative art of Adolph Gottlieb”에서 추상 표현주의 화가 아돌프 아돌프 고틀립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Eversole, Finley, Theology Today, 25 no 2 Jul 1968, p 220-224.
이처럼 에버솔 선교사는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술에 대한 그의 글들이 오늘까지 남아있다. 그는 예술, 종교, 현대문화 협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ibid., p 220의 각주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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