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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02_Adams George J

닉네임
위예찬
등록일
2020-07-05 23:18:07
조회수
70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02_위예찬.hwp (565760 Byte)
Ⅰ. 기본사항
이름 : Adams. George J (안두조)

1. 생몰연도 : 1907. 8. 6. - 2002. 3. 12.
(1959년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최종적으로 마감함)
2. 출신 및 소속 : 미국 / 북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3. 한국선교기간 : 1932년 - 1959년
4. 연표
1907. 8. 6. 대구에서 출생
1912.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과정부터 학업을 시작
1926-1927. 엠포리아 대학 재학
- 기독교청년면려회의 회장으로 활동
1929. 로스에넬레스의 옥시덴탈 대학 학사 졸업
- 학생자원자운동 대표단 활동
- 캠프미커와 몬테리오교회에서 사역
1930.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재학(1학년)
- 로스엔젤레스의 이글록장로교회의 멤버
6. 10. 마가렛 로버츠와 결혼
1931. 프린스턴신학교 신학 교육(2학년)
- 리치몬드의 베다니채플에서 설교목사
2. 22.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선교사로 청원
1932. 프린스턴신학교 신학 교육(3학년), 졸업
3. 6. 샌프란시스코 노회로부터 목사 안수
3. 7. 소속선교사로 임명, ‘조선선교부’로의 파송 결정
9. 23. 한국의 안동선교지부에서 선교활동 시작
1940.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됨
1942-1946. 캘리포니아주의 레이크사이드 장로교회에서 목회
1953. 12. 20. 조기 안식년 신청
1959.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 마감
1959-1964. 일본선교부에서 활동
1965-1972. 뉴멕시코 주 플라시타스의 라스 플라시타스 장로교회에서 목회
1972-? 세인트폴장로교회, 트리니티장로교회에서 목회
2002. 3. 12. 95세의 나이로 소천

5. 가족사항
아내 마가렛 로버츠(Margaret L. Roberts)


Ⅱ.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안두조 선교사는 1907년 8월 6일에 대구에서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부 초대 상주선교사들이었던 안의와 선교사와 넬리 아담스 선교사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의와 선교사 부부에게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출발하기 바로 전에 낳은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선교사)가 있었으며, 이제 대구에서 벤자민(안변암 선교사)을 낳고,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연년생인 딸 도로시를 낳게 된다. 그리고 약 8년이 흐른 후에 1907년에 대구에서 안두조를 낳았다.
안두조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15년을 살았으며,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과정부터 그의 학업을 시작했다. 그는 캔자스 주에 있는 엠포리아 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재학했고, 그 후에는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 대학으로 옮겨 1929년에 학사 학위와 함께 졸업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대학교부터 신학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신앙운동 및 선교운동에 지속적으로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첫째로,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자료는 그가 대학에 재학하는 중에 기독교청년면려회의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그 단체의 ‘성인 자문위원’이 되었음을 밝혀준다. 둘째로, 그는 대학시절과 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자운동에 가담했다. 선교부 자료는 “학생자원자운동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대학에서와 신학교 재학시절에 학생자원자그룹의 회장을 역임”했다고 기록한다. 셋째로, 그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수업과 수련목회를 마쳤으며, 재학 중에 결혼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옥시덴탈 대학을 졸업한 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1년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의 신학교육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받았다.
안두조는 신학교 재학 중에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다양한 현장에서 목회를 경험했다. 1929 가을부터 1930년에 이르는 첫 해에는 샌 호아킨 밸리에 위치한 크로우스랜딩교회에서 사역했고, 두 번째 해에는 캠프미커와 몬테리오교회에서 사역했다. 그 후, 그는 리치몬드에 위치한 베다니채플에서 설교목사로 1년간 일했다. 이러한 모든 수업과 수련목회를 마친 안두조는 1932년 3월 6일에 샌프란시스코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졸업하기 1년 전인 1931년 2월 22일에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 선교사로 청원했으며, 이듬해인 1932년 3월 7일에 소속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선교부’(the Chosen Mission)로의 파송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2년 9월 23일에 한국의 안동선교지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1) 경안노회를 통한 목회활동
안두조 선교사는 1932년 9월 23일부터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일원이 되었다. 1934년과 1935년에 열린 북장로교 한국선교부 연례총회는 그가 복음전도위원회, 정관위원회, 및 재정위원회와 같은 선교 선교부 차원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한국선교부에 정착했다.
그는 선교부의 안동선교지부에 임명됨과 동시에 안동지역에 설립된 경안노회에 소속되어 지교회들의 당회장, 노회부서의 부원 또는 부장, 그리고 교육 집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경안노회에 소속된 여러 교회들의 당회장으로 사역하면서 노회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다. 임사부, 시취부, 전도부 등에서 활동했다.
2) 장터전도
안두조 선교사가 1930년대에 안동선교지부에서 열정을 쏟았던 선교방법 중의 하나는 ‘장터전도’이다. 이것은 순회전도의 한 방법이며, 순회전도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선교지들에서 오랜 역사를 통하여 애용되었던 방법이었다. 그는 한국 선교사들의 세계에서 발행되던 The Korea Mission Field의 1939년 11월호에 “장터선교: 스테이션 웨건”(Market Evangelism: A La Station Wagon)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면서 순회전도에 대한 그의 신념 또는 사명을 피력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 땅의 구원받지 못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전달되어야 한다. 많은 전도지의 무료 배포, 쪽복음, 신약성경, 성경, 찬송가 및 기독교문서의 판매, 그리고 장터 방문을 통하여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도는 말로써 전파되었다.
안두조 선교사는 화물트럭을 개조하여 스테이션 웨건을 만들었다. 이것은 비교적 거리가 먼 장터에까지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기술적인 혁신을 제공했다. 이 뿐만 아니라, 스테이션 웨건 차량을 이용한 장터전도는 안두조 선교사와 전도자들에게 일종의 개량된 경영방식을 제공했다. 그는 이 차량을 단지 전도인들과 서적을 운반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차량의 앞과 뒤쪽에 책들을 진열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또한 이를 거점으로 삼아 전도자들을 장터로 보내 조직적으로 책을 판매하면서 높은 효율성을 가져왔다. 일종의 집단적이고 기업적인 문서판매형태를 제시했던 것이다.

3)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
1948년에 한국에서 재건된 장로교 선교부는 같은 해에 다른 선교부들과 함께 초교파 선교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했는데, 이 모임은 한국사회가 ‘사회사업 전반’과 ‘농촌지역을 위한 지도력 훈련’ 부문에서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파악했다.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는 4개의 선교부가 대전에 소위 “기독교봉사훈련센터”라고 할 수 있는 협력프로젝트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은 결국 “기독교연합봉사회”라는 초교파적 봉사단체의 탄생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1940년에 한국을 떠났던 안두조 선교사는 1947년 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두조는 1949년이 되기까지는 안동선교지부를 떠나 대전으로 자신의 사역지를 옮겼다.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기독교연합봉사회의 사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기독교연합봉사회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1949년 10월에 각 선교부가 한 명씩 대표를 보내 이사회를 구성했던 일이며, 이 첫 이사회는 기독교연합봉사회의 장소를 대전 근교인 대덕군 회덕면 중리로 결정했다. 이사장으로 안두화 선교사가 결정되었고, 안두조 선교사는 총무로 내정되어 향후 다양한 사업들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일부 사업들에는 직접 담당자가 되어 활동했다.
기독교연합봉사회의 다양한 사업 가운데에서도, 안두조 선교사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참여한 일은 ‘기독교농민학교’와 ‘시범농장’이었다. 1950년 2월 10일의 이사회에서 확정된 헌장에 따르면, 봉사회는 농촌사업, 도시지도사업, 보건사업 등을 큰 범주로 정하고 구체적으로 의수족부, 기독교농촌지도자 양성사업, 전시농장(시범농장), 그리고 구세군 고아원과 같은 사업을 진행했다. 안두조 선교사는 1950년 4월에 ‘기독교농민학교’의 교장이 되어 일을 추진했으며, 기독교세계봉사회 및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후원을 받았다. 그리고는 6.25 전쟁으로 인해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

3. 귀국 이후
6.25 전쟁 이후에 안두조 선교사는 교단 선교부에 안식년을 이른 시기에 신청했고, 1953년 12월 20일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기독교연합봉사회의 일도 이 시점으로 마감된다. 이후 교단 선교부와 자신의 사역의 변경 또는 은퇴와 관련하여 일련의 긴장상태를 경험했고, 1959년에 이르러 한국 선교로부터 완전히 은퇴를 했다.
안두조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 하고 북장로교회의 파송으로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일본선교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안두조 선교사는 8년간 뉴멕시코 주 폴라시타스의 라스 플라시타스 장로교회에서 목회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목회는 텍사스 주 노스리치랜드힐스에 위치한 세인트폴장로교회와 그랜드프레이리의 트리니티장로교회였고, 2002년 3월 12일에 9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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