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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44_Hunt, Bruce F. / Blair, Katherine

닉네임
2018210111이아히둡
등록일
2020-07-06 14:17:44
조회수
64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44_이아히둡.hwp (4884992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Hunt, Bruce F(브루스 헌트) 한국명: 한부선
Blair, Katherine(블래어 캐서린) 한국명: 한가태

2. 생몰연도: 1903.6.3. - 1992.7.26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과 1년까지 마침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대학 졸업
-1924 뉴저지주 러트거스대학 졸업
-1928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4. 한국 선교기간: 1884.9.20.-1976.5

5. 연표

기간
내용
1903. 6. 3. 한위령(William B. Hunt, 1869-1953)선교사의 장남으로 한국 평양에서 출생
1919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수학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남
1919.6-1920.9: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거주하며 솔단고등학교 졸업
1920.9-1923.6: 미국 일리노이주에 소재한 휘튼대학(Wheaton Colleage) 재학
1922. 대학교회에 출석하면서 중생체험
1923.9-1924.6: 미국 뉴저지주에 소재한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 전학, 졸업
1924.6~9: 미국 메인주에서 주일학교 선교사역
1924.9: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eological Semmary) 입학
1925.5-1926.9: 캐나다 노스 시드니와 노바 스코티아에서 목회사역
1927.5-1928.5: 미국 뉴저지주 스탠호프-네트공 장로교회에서 설교사역
1928.4.25.: 미국장로교(PCUSA) 뉴 부른스윅 노회에서 목사안수
1928.5: 프린스톤신학교 졸업(Th.B.)
1928.5: 미 구로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 청주에서 사역 개시
1928.10.4.: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1932.9.27.: 방위량(Willam N. Blair) 선교사의 ᄄᆞᆯ인 한가태(Katharine Blair)와 결혼.
슬하에 Lois(Mitchell), Bertha(Kinnaird), Katharine(Stonehouse),
David, Mary(Heerema)를 둠.
1933.9.9.-10 조선기독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에 항의.
1935-1936: 안식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mary) 수학
1936.6.11.: 미북장로교를 탈퇴한 후 미국장로교(PCA, 후에는 정통장로교/OPC 개칭)
장립멤버로 제 1회 총회에 참석.
1936-1938: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중국 만주에서 사역
1938: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가결에 항의
1938-1942: 미국장로교(PCA)/정통장로교(OPC) 해외 선교사로 만주 하얼빈에서 사역
1941.10-1942: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
1942. 여름: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 강제 송환
1943-44: 미국 L.A. 하이랜드 팍 소재 웨스트민스터교회(OPC) 임시목사로 사역
1945-46: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근교에서 국내선교부 사역
1946.10.28.: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해외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여 선교사역 개시
1946.11.13.: 고려신학교에서 강의시작
1950-52: 한국동란으로 인하여 미국에 머물다가 1952년에 한국에 재입국
1957: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중에 미 정통장로교회 총회장으로 선출
1960.9: 고려신학교 교수직 사임
1976.5.17.: 부산 남교회에서 은퇴예배. 귀국하여 필라델피아 근교 에빙톤에 거주
1977: 필라델피아 중앙교회에서 목회사역
1979.9.3.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수여
1984.7.8.: 한국기독교 백주년 기념 뉴욕 전도대회에서 사무엘 H. 마켓,
존 F. 언더우드 4세와 함께 한국선교 공로상 수상
1992.7.26.: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퀘리빌 양로원에서 소천


6. 가족사항: Hunt, Willam B. (부) / Hunt, Bertha F(모)/ Blair, Katherine(아내)/ Lois(Mitchell), Bertha(Kinnaird), Katharine(Stonehouse), David, Mary(Heerema) (자녀)

7. 논저:
[저서] 증거가 되리라,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3.
[논문] 기독교 한국 전래에 대한 소고, 파수군 103호(1960, 10);
내가 본 에큐메니컬운동, 파수군 99호(1960.6);
한국 선교에 대한 전망, 파수군 114호)1961.11)

Ⅱ.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그의 아버지는 William B. Hunt 선교사로서 황해도의 재령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그곳에서 지역 복음화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노방 전도와 지방순회, 미자립교회에서의 사경회 등을 통해 복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고, 기존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면서 사역을 진행했다. 선교사들이 일 년에 두 번 정도 방문하는 것은 일종의 규칙과 같은 것이었고, 이러한 방문은 성경강좌와 성경학교가 열리게 되는 열쇠였다. 그의 사역은 여전히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그만큼 이북지역에서 사역한 사람이 없다고 칭송받을 정도였다.

한부선(Bruce F. Hunt)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앙으로 길러진 사람이었다. 그의 양친은 전통적인 청교도 가정처럼 신앙으로 자녀를 양육하며 엄격하게 주일성수를 지키게 했으며, 주일 오후에는 성경 구절들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들을 암송하게 했다. 이러한 신앙 환경에서 그는 부친의 사역을 본 받아 사랑과 성경으로 한국에서 어울려 자랐다. 그는 부모에게서 청교도 교육을 받으면서도 문화는 한국의 문화를 습득하여 한국과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는 1919년 고모의 집에 기거하며 솔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또한 연결이 되어 휘튼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복음주의적 신앙과 학문을 추구하며, 회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회심은 그로 하여금 선교에 소명을 갖게 했고, 목사와 선교사로서의 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메이첸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학업에 증진할 수 있었다.

2.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8년 9월 4일에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러 나라들을 통해 견문을 넓힌 후 한국에 도착하였다. 청년 선교사로서 그는 어린 시절 친구인 캐더린 블래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성장기에 같이 지냈고, 외국인대학교에서 동문으로 수학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그들은 1932년 혼인하게 되었고, 같은 사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기한건 사실 어릴 적에 아내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한국 교회를 위해 힘쓰는 가운데, 그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통해 사역에 힘썼다. 칼빈주의적 기초에 있어 성경을 기초로 하고, 교회의 구심력을 갖추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선교방법을 견지하면서 한국에서 또한 선교를 시작했다. 한부선의 첫 선교지는 청주였는데, 그곳에서는 한국 사회의 가난을 처절히 느끼게 되었고, 이를 위해 농촌 선교와 농협 조직을 세우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는 그곳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성경적 선교원리를 철저히 반영했고, 한국교회의 자립을 위해 열심을 다했다.

그는 안식년을 취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자유주의와 신사참배로 연결된 논쟁 사이에서 미 북장로교 선교부를 탈퇴했다. 그는 신사참배로 인한 죄를 피하기 위해 전도사 사역을 그만 두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따로 독립선교부를 두고 봉천노회 소속 하에 사역을 했다. 일제의 압박에 의해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있는 시점에 한부선은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내비췄고, 기독교 진리에 따라 목소리를 냈고,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금 돌아와 청주에서 사역을 하고 싶어 했지만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소원한 관계가 유지되고, 교단이 달라져서 결국 그곳에서 만주로의 사역을 결정했다. 그곳에서 만주의 한인 성도들과 함께 사역을 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을 따라 개혁주의적 색채 안에서 사역을 이어 나갔다. 한국은 아니지만 한인들의 터전에서 다시금 사역을 한 그는 하얼빈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그의 옥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는 시간이 되었다. 어두움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오히려 그곳에서 부활을 증거했다. 자신은 그곳에서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곳에서의 사역이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그는 오히려 영광송을 부르며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운동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자 1945년 일본군은 항복하였고, 한국에 독립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부선은 다시금 그곳에서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힘썼고, 한국교회의 신앙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 속에 도착한 한부선은 고려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와 동역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에 심겨진 신앙을 계속해서 지켜내고자 했다. 자유주의적 감리교 선교사와 2시간 넘게 토론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그의 신앙적 열심을 발견할 수 있다

한부선은 해방 이후 개혁신학의 본질을 밝히고 개혁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편집인으로 수고했던 파수군 지에 기고한 소식들은 그의 안목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신학교와 인연을 맺고 은퇴하기까지 선교사역은 계속되었으며, 교회 재건운동과 신학교육에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전도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교수사역과 더불어 병행하면서 복음전파자의 사명을 잃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사역에는 학생신앙운동에 초석을 두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파급되어 많은 청년들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3. 귀국 이후

그는 1976년 은퇴 후 한 평생을 보낸 정든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날 때, 그는 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한국교회와 백성을 사랑하며 고난과 시련을 겪은 그의 사역은 한국교회에서 꽃을 피게 되었다. 은퇴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조차 한국 이민자들과 동고동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쉴 새 없이 복음을 전파했으며, 개혁신학에 기초를 따라 말씀 사역을 이뤘다. 그는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이 있는 한 한국인이 있는 곳을 찾아갔고,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로 많은 성도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위로해주었다. 귀국 이후에도 한국을 향한 사랑은 고스란히 나타났고, 그의 향기는 펜실베니아의 양로원에서 끝까지 피어났다. 그는 끝까지 선교지를 그리워하며 1992년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4. 그의 사상과 신학

프린스톤 대학교에선 전통적으로 성경 말씀에 대한 영감과 권위를 강조했다.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그곳에선 신학적 수정을 거부하고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성하려는 슬로건을 외쳤다. 그곳의 교수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동의하고 서약했으며, 성경을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한 확고한 진리 가운데 신학을 세우며,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성경을 기초로한 믿음으로 개진했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와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은 복음주의의 전통들을 공유했는데, 그리스도의 속죄, 중생의 필요성, 성결한 신자의 삶 등을 강조하였다. 보수적인 신학과 청교도적 복음주의를 따랐고, 경건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한부선은 첫째로 선교사적 자질이 두드러진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선교 사역을 경험하였고, 많은 견문을 넓힌 바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사역을 따랐고,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주의에 깊게 뿌리 두고 있으며 성경의 권위에 따른 성경적 선교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두 번째로 그는 칼빈주의적 신학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대학교에서의 그의 학업은 그의 가정환경과 더불어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개진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을 막는 데 일조했다. 그는 자유주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이것과 연결되어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더 나아가 메이첸과의 깊은 교제와 자유주의의 적나라한 공격에 맞서 근본주의의 가르침을 강하게 붙잡았다. 성경무오를 강하게 변호하고 개혁주의의 길을 따라갔다.

그는 개혁주의의 큰 핵심인 언약사상을 견지했다. 언약사상을 통해 오직 r=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국가가 그 자리를 대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신앙과 함께 종말신앙도 전천년설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신학 속에서 그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절했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고난 받는 중에서도 진리를 지키려 했다.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청교도 가정교육을 받으며, 개혁주의 전통을 수호하는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자 노력했고, 메이첸과 함께 학문과 신앙을 같이 개진해 나갔다. 그의 신학은 성경 중심의 신학이었고, 그러므로 언약을 중심에 세워 나아갔다. 오직 말씀으로의 구호는 한부선의 신학에까지 연결되었고, 성경과 신앙을 폄훼하려 했던 신사참배와 자유주의에 맞서 한국교회의 정수가 되는 개혁주의를 지켜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성일:2020-07-06 14:17:44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