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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48 / Chase, Maria Louise

닉네임
이동근
등록일
2020-07-06 23:48:22
조회수
68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48_이동근.pdf (278810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Chase, Maria Louise / 체이스 / 한국명: 최씨(崔氏)

2. 생몰연도: 1869. – 1938. 4. 21.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896. - 1911.

5. 연표
1869. 미국 출생
1896. 10.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부산 부임
부산 지방 교회 순회 사역
여성 중심 전도 활동
1898. 대구 지방 여성 전도 사업 전개
1901. 12. 평북 선천으로 옮겨 평북 지방 여성 전도 사업
1911. 9. 건강 악화로 선교사직 사임 후 귀국
1938. 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6. 가족사항: 미혼이라는 사실 외에 딱히 알려진 바 없음.

II. 선교사 소개

1. 부산으로 파송되는 체이스

체이스(Chase, Maria Louise, 1869-1938, 한국명: 최씨(崔氏))는 미국에서 출생해서 미국북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1896년 10월 19일에 한국으로 오게 된다. 당시 부산에서 일하던 베어드가 새로운 선교지부 개척을 위해 대구로 이동하게 되었기에, 체이스는 부산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체이스는 부산에 파송된 최초의 미혼여성 선교사였다. 체이스가 부임할 당시 부산지부의 사역자는 어빈(Irvin) 의사 부부와 아담스(Adams) 부부뿐이었고, 부산지부는 여성과 어린 아이 사역을 위해 여성 사역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2. 체이스가 선교사로 오게 된 배경

부산에서 사역하던 아담스는 1896년 2월 말 이전(정확한 날짜 미상)에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엘린우드 박사에게 이렇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곳 부산에서 미혼 여성 사역자가 긴급히 요구된다는 점을 박사님께서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사역이 무르익은 선교지부에 여성사역자가 얼마나 긴요한지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은 언어를 습득하고 나면 많은 일을 할 시간이 날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 그러나 미혼여성은 자기 일거리를 정하거나 조직화할 수 있고 그 일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혼 여성 사역자의 효율성은 두 배 혹은 세배 이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혼여성 사역자는 시간이 자유로울 때 언제든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1896년 5월 25일자로 쓴 편지에서는, “여성들을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사역에 쏟을 수 있는 독신여성은 선교부에 큰 소득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을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여자들은 한 번에 두 세 명씩, 혹은 12명까지 집 구경을 하러 옵니다.” 기혼 여성 사역자는 언어를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도 육아나 가정사 때문에 사역의 방해를 받지만 미혼여성은 필요한 사역에 전력투구할 수 있고, 또 전도하러 다닐 필요 없이 찾아오는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아담스는 부산지부에 미혼여성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엘린우드에게 호소했는데, 아담스의 편지를 받은 엘린우드는 1896년 4월 14일자로 아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체이스를 선교사로 임명할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 계획에 따라 체이스는 1896년 5월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임명받은 체이스는 부산에서 일하고 있는 아담스에게 편지를 보내 9월이나 10월경 한국으로 향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특히 아담스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선교지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체이스가 1896년 10월 19일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3. 독신 여성 선교사로 사역하는 체이스

체이스는 이때부터 1901년 12월 로스 목사 내외와 더불어 선천으로 이동하기까지 부산에서 5년간 일하게 된다. 체이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언어공부 했는데 언어습득이 비교적 빨랐던 것 같다. 체이스의 내부 6개월이 지난 1897년 5월 29일자 편지에서 아담스는 엘린우드에게 “체이스양은 언어 습득에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Miss Chase is I think making good progress on the language)”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선교사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도 아담스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담스는 엘린우드에게 쓴 1897년 5월 29일자 편지에서, “채이스양은 ... 깊은 영적 체험과 소명에 대한 의심이라는 시기를 거침으로서 선교사로서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그는 한때 선교사로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제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보이며 이 경험을 통해 틀림없이 더 효과적인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녀는 어빈 부인과 함께 지방 교회를 순회하며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벌인다.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확실했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전까지의 여성 전도는 대개 한국 사역자와 남편의 도움 속에 선교사들의 부인들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미혼여성으로서 체이스의 사역은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녀는 1901년에, 32일간 지방의 5개의 교회를 방문한 후 그 5개 교회 중 2개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보다 많았다는 보고를 남겼다. 그 당시에 이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부산에서뿐만 아니라 1898년 겨울부터 1899년 봄까지는(약 3개월 정도) 대구에서 아담스, 존슨(Johnson) 부인과 함께 대구지방 여성전도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체이스는 부산에서 체류하는 5년간 아동들과 여성들을 위해 일했지만 그의 역할은 주로 아담스 부부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예컨대 1897년 2월 아담스 부부가 대구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로 대구로 갈 때 체이스도 동행했고, 1897년 4월 대구로 갈 때도 체이스와 동행했다. 1897년 11월 1일 대구지부로 이동하기 위해 이사할 때도 체이스는 아담스 가족과 동행하여 대구로 갔고, 존슨(장인차) 의사 부부가 대구로 올 때까지 같이 지내기로 했다. 대구로 이동할 때 육로로는 3일 길이지만 낙동강을 따라 선편으로 이동하는데 11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낯선 대구에서의 정착을 위해 체이스도 대구까지 동행하여 3개월을 지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체이스는 대구에서 사역하는 아담스를 도왔다. 예컨대, 1899년 2월 20일자로 엘린우드에게 보낸 아담스의 편지를 보면, 체이스는 대구에서 아담스와 같이 지내며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대구지방에서 최초의 여성들을 위한 사역이었는데, 안의와 부인과 장인차 의사의 부인과 더불어 1899년 2월부터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이들의 사역을 도와주었다. 정리하면, 체이스는 부산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 그리고 교육사역에 집중하였는데, 때로는 대구지부로 가 아담스 부인의 사역을 보조했음을 알 수 있다.
1901년 12월에는 평북 선천으로 사역지를 옮겨 이후 10년간 머물면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평북지역 여성전도사업을 주관했다.
1902년부터 2년간은 간호사인 Esther L. Shields 부인과 동역했고, 1903년에는 거의 25년간 지칠 줄 모르고 사역한 Jane Samuel 부인과 동역했다.

4. 건강 악화로 멈춰진 선교와 하나님의 부르심
1911년 건강의 악화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사우스 다코타(South Dacote) 주에 있는 파커(Parker)에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1938년 4월 21일 별세했다.
작성일:2020-07-06 23:48:22 180.70.16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