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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56 / Trudinger, Martin(1883-1955, AP) / Trudinger, M.

닉네임
정다니엘
등록일
2020-07-06 23:56:37
조회수
67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3반_56_정다니엘.hwp (236544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Martin Trudinger / 트루딩거/ 한국명: 추마전(秋瑪田)
2. 생몰연도: 1883- 1955
3. 출신 및 파송기관: 호주, PWMU Mission Bands
4. 한국선교기간: 1922- 1941
5. 연표
1922.1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1922-25 마산
1926-28 진주
1928-35 통영에서 복음 선교사로 활동, 선교부 회계직도 수행
1935 이후 부산에서 활동, 부인은 간호원 출신으로 아동보건 및 여자 성경학원 운영
1939 부산나병원 매켄지의 은퇴후 그 후임자로 병원 인계
1941.4 병원은 군용으로 징발당하고, 귀국 후 은퇴
1953 부인 소천
1955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Trudinger, M. (본명: E. Vera Foster)


II. 선교사 소개:
마틴 트루딩거 목사 / Rev. Martin Trudinger 秋瑪田 (1883-1955)

마틴 트루딩거 목사는 (M. Trudinger, 한국이름 추마전) 선교사이다.
그는 1883년 9월 25일 영국 요크셔(Yorkshire) 맨스톤(Manston)에서 출생했다. 트루딩거 목사는 강력한 선교사 전통을 지닌 가족에서 태어난 것이다.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수단에서 6년간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종교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모라비안 가족에서 태어났다. 모라비안 신앙을 가진 부모를 따라 그도 모라비안의 신앙을 가졌다. 그 가족은 그가 한 살 반 때에 애들레이드로 이주했다.
마틴의 누나, 안나 트루딩거(Anna Trudinger)는 1897년 SVM에 자원했고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가 되었다. 마틴은 웨이 칼리지(Way College)와 남호주 애들레이드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1917년 학사(BA)를 마쳤고, 말리(the Mallee)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섬기다가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1913년 그는 의사였던 그의 형 롤런드 트루딩거(Dr. Rolland Trudinger)와 함께 수단연합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수단으로 갔다. 그는 화이트 나일(The White Nile)의 지역의 선교지 총무로 임명되었고, 흑수병에 걸려 호주로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그 지역을 섬겼다. 귀향길에 그는 호주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곧 정전되었다. 그는 멜버른에 돌아와 오몬드(Ormond College)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919년 말, 다시 수단으로 갔지만 두 번째 흑수병에 걸려 1920년 8월에 멜버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신학공부를 마치고 1920년 12월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21년 1월에 간호사인 베라 이렌 포스트(Vera Irene Foster)와 결혼한 후 호주에 미련이 생기기 전에 떠날 것을 각오하고 곧 다음 해인 1921년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멀고도 지루한 항해가 끝나고 부산에 도착한 후 곧바로 마산선교부에 부임 했다. 1년 동안 오이연 교회(Ouyen congregation)에서 목회를 했다. 1928∼1935년 통영선교부에서 7년 동안 활동을 하였다. 선교사이자 목사로서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 진종학 목사와 함께 동사목회를 하며 거제 유천교회와 지세포교회의 당회장을 지냈다.
통영에서 의사로 통영과 섬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던 테일러 선교사가 진주선교부로 떠난 이후 진료의 공백이 생겼는데 간호사였던 트루딩거 선교사의 부인이 테일러를 이어 치료와 시약활동을 이어 나갔다. 트루딩거 부인은 당시 어린아이들의 영양상태와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하여 어린이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re)를 운영하기로 생각했다. 당시 통영뿐만 전국에서 영·유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 아이를 낳으면 일정기간 동안 호적에 올리지도 않을 만큼 심각한 실정이었다. 아동을 위한 건강관리 체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형태의 진료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부산·경남에 있는 5개(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의 선교부 중 거창을 제외하고 모든 선교부에서 활동을 할 만큼 이들 부부의 활동은 폭이 크고 넓었다.
1938년 맥켄지 목사 부부가 은퇴할 때까지 섬겼던 나환자 선교사역을 대체하기 위해 부산으로 이전했다. 트루딩거 목사 부부가 맥켄지의 뒤를 이어 부산 나환자수용소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부산 나병원은 1940년 말 일본군에 의해 강제 몰수되었다. 감만동의 수용자들을 소록도로 이주시킨 것은 1940년 12월이었고 철수가 끝난 것은 1941년 3월이었다. 당시 650명의 환자들중 390명은 소록도로 갔으나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1941년 4월 트루딩거 목사 부부는 한국을 떠났다. 다음은 트루딩거 목사는 나환자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조건에 필수적인 영양을 공급받지 못할까 매우 걱정스럽다... 우리는 그들이 이 병원의 삶에 결정적인 기독교적 공헌을 할 것을 믿고, 그들의 빛을 비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임을 믿는다.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따금, 특별히 그의 사역 초기에, 트루딩거 목사는 안수 받은 선교사들의 부족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들을 맡고 힘들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그의 건강은 손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따금 부과되는 선교회의 회계 일을 맡으면서, 마을 교회들을 보살피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했다.


일본에 의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1년 본국으로 철수하기 까지 조선에서 20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친 그들은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건강 악화로 1942년부터 목회했던 페놀라(Penola)의 교회를 1949년에 사임했다. 그의 나이 59세로 인생의 완숙함과 신앙의 성숙함이 어우러진 시기였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아내가 건강을 잃기 시작했고, 이어서 그의 건강도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만큼 그들은 조선에서 흔히 말하는 진액을 뺄 만큼 자신들의 건강을 돌아보지 않고 사랑과 희생에 몰입한 결과였다. 한산신문 hannews@chol.com
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125 2018-09-18 접속
마틴 트루딩거는 부끄럼이 많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깊은 신앙과 확고한 소명이 있었고 용기와 성실성과 이타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1947년 해외선교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국에서 20년 동안 성실하고 풍요한 열매를 맺는 사역을 해왔던 마틴 트루딩거 목사와 그 부인은 건강이 좋지를 못했다. 비록 트루딩거 목사는 다소간 회복을 하였고 페놀라에서 목회를 지속하고 있지만 그 부인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들은 선교지에서 건강을 잃었다.” http://chedulife.com.au/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들을 (수단에 1명, 중국에 6명, 그리고 한국에 1명) 모두 선교사로 길러낸 전설적인 모라비안 가족이었다. 그는 뉴헤브리데스에 선교사를 자원했지만 그곳의 열대성 기후가 그의 건강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해외선교위원회는 더 이상의 목사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할 자금이 없었다. 마틴 트루딩거는 다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자신의 형이 소속되어있던 미국장로교선교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때 한국을 섬기다 병에 걸려 멜버른에 돌아온 라이얼 목사가 사망했고, 트루딩거는 그 공석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1921년 11월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의 선교 동기는 모라비안 가족의 영향력과 그의 선교적 경험에 근거한다.




베라 아일린 트루딩거 부인 / Mrs. E. V. I Trudinger (본명: 포스터)
(-1953. 7. 3), 추마전 목사 부인
(마산 1922-25; 진주 1926-28; 통영 1929-37; 부산 1938-41)


마틴 트루딩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녀는 왕립 애들레이드 병원에서 간호사로 훈련을 받았고 1913년 졸업했다. 1917년 그녀는 트루딩거가 일하고 있는 수단으로 자원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당시 여성들은 해외여행이 금지되었다. 그 대신 베라는 종군간호사로 자원했다. 그녀는 1년동안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케즈위크 군병원에서 근무했고, 인도와 아프카니스탄 전선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나고 1921년 마틴 트루딩거와 결혼했다. 한국에 와서 1941년까지 알했다. 남편 트루딩거 목사와 처음에는 마산에, 그 다음은 진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통영에서 보냈고 트루딩거 부인은 유아복지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간단한 진료와 간호 활동을 했다. 1938년 2월 그들은 맥켄지 부부가 은퇴하자 부산으로 이전했고, 아이린 트루딩거는 그곳에서 나환자 부모를 둔 미감염 자녀들 시설과 유아 건강센터를 보살폈다.
아일린 트루딩거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침착성을 지닌 아주 상냥하고 온순한 사람 중에 하나로 평판이 좋았다. 비록 그녀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오랜 질병으로 허약해졌지만, 그녀를 확고하게 붙잡아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에 대한 단순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딸 조이스(Joyce)는 찰스 맥레오드 목사(Rev Charles McLeod)의 아내가 되어 뉴헤브리데스에 선교사로 섬겼고, 또 다른 딸 린달(Lyndal, 하워드 부인)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산모와 유아건강협의회(the Mothers and Babies Health Association)의 간호사로 일했다.

조카: 엘시 트루딩거 에드거(Miss Elsie Trudinger Edgar, ~1985)
그녀의 아버지 에드거는 중국내지선교회의 유명한 선교사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명한 트루딩거 가족의 딸이었다. 마틴 트루딩거 목사는 그녀의 삼촌이었다. 엘시가 한국선교를 위해 자원했을 때, 그녀의 부친은 티베트 국경지대에서 어렵고 위험한 선교사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로 온 이후에 그녀는 애들레이드 병원에 들어갔고 간호사로 훈련받았다. 그녀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이너미니커(Innamineka)에 있는 호주 내지선교회 진료소의 부름을 받았다. 거기에서 엘시는 위험을 감수하고 익사하는 어린이를 구해내서, 용감한 시민에게 수여하는 청동메달을 받았다. 그 당시 여선교연합회는 한국에 보낼 간호선교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에 있는 선교사 중 하나가 엘시를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고, 여선교연합회의 지도자들은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엘시는 “해외선교가 자신의 소망이었고 기쁘게 한국을 위해 자원한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녀는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필요한 훈련을 받았고 아동복지와 육아법에 대한 자격증을 받았다. 1931년 8월1일, 그녀는 한국을 향해 항해했다. 엘시는 장로교소녀회(The Presbyterian Girl’s Fellowship)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선교 동기는 모라비안 가족의 영향 그리고 여선교연합회의 권유였다.
작성일:2020-07-06 23:56:37 218.51.20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