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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 / Edward Adams, Mrs. E. Adams Susan Comstock)

닉네임
양승일
등록일
2020-07-07 02:41:30
조회수
107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반_01_양승일.pdf (1171745 Byte)
I. 기본사항
이름: Adams, Edward A. (안두화, 安斗華)

1. 생몰연도
1895.2.6.-1965.9.7 미국 캔사스주 토피카 출생
2.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장로교, 정통장로교
3. 한국선교기간: 1921~1942, 1946~1963.
4. 연표
1910 중국 산둥성의 지푸 내지선교회 운영학교 졸업
미국 매코믹신학교 졸업
1921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재령 선교부에서 활동
1925 대구선교부로 전임하여 많은 활동
1926-40 대구성경학교 교장으로 농어촌 교육활동
1936 대구에서 성경학교(the Bible Institute) 장으로서 15-20개의 교회를 관장함
1941.12. 일제에 의해서 20일간 감옥에 억류
1942.6.1. 부산행 열차에서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 주관
- 8월 17,18,19,20일 네 차례 회의 이후 뉴욕 송환
1946 [Mrs. Adams 부인] 정신여자학교에서 가르침
1946.10.2 귀국 및 비상대책위원회를 서울에서 개최, 안두화 선교사 대구로 배치됨
1948.1.21 한국 선교 조직 개편 회의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서울로 이주)
1948 미국연합장로회 선교부 총무로 피택
1948-1957 비상집행위원회 현장 대표, Field Representative
이 기간 동안 피난민 사역, 전쟁 포로 선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침.
1949.10.10. 미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구세군 선교회를 연합하여 기독교연합봉사회 설립
1950 동해안 감포에 목회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피난 건물(학교)를 마련
[Mrs. Adams 부인] 옷 500상자를 난민에게 분배
1950 아동복지회 한국지부 위원, 운크라(UNKRA) 위원,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이사,
연세대 · 세브란스병원 이사,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지부 책임자, 예장자선사업 상임
이사 등 역임
1950.11.4 [Mrs. Adams 부인] 도쿄 혈액 은행에서 일함
1951 [Mrs. Adams 부인] 일본의 비기독교 대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침
1951 멕코믹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 수여
1952.12 기독교 대학 설립을 위한 이사회에서 회장으로 선출
1953.9 교회 세계 봉사 위원회(the Church World Service Commitee)로 선출
1954.2 계명기독대학 초대이사장으로 취임
1955. [Mrs. Adams 부인] 연세대학교 장애아동센터가 세워질 수 있도록 ‘교회 세계 봉사 위원회에’ 특별 보조금 요청
1958 신학 기금 유용과 관련 봄 총회 이사회에 선출
1958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 수여
1958.9-1961.9. 제2대 학장으로 봉직 후, 정년퇴임
1961.9.30. 5.16.에 수립된 ‘교육에 관한 임시 특례법’에 의해 정년 퇴임
1961.11.30. 11.13일 문교부 장관의 승인으로 명예학장 및 협동학장으로 추대
1962.2 20만불 모금 운동을 시작함
1963 경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63.06.08. 국민훈장모란장 수여
1963.7 귀국
1965.9 미국 오레곤주 로스버그에서 사망

5. 가족사항
Adams, James Edward(안의와/부)
Adams, Nellie Dick(모)
Adams, Benjamin N.(제), Adams, George J.(제)
Adams, Dorothy(매)
Adams, Susan Comstock(부인)
Adams, John(장남), Adams, Dick(차남-주미대사관 근무)

5. 논저: Needed in Stratigic Positions, Women and Missions, 1928.2.


Ⅱ. 선교사 소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며 교육가로서 안두화 선교사(安斗華, Adams, Edward)는 아버지 아담스(J. E. Adams; 안의와)의 아들로서 미국 캔사스주 토피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安義窩)는 한국의 3대 선교사로도 불리우는데, 대구 지역에서 많은 복음의 씨앗을 뿌린 바 있으며, 계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대구 교육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그런 안의와 선교사(安義窩)의 꿈은 기독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아버지의 소원을 안두화 선교사(安斗華)가 이어갔다. 그의 사역은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安義窩)의 사역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실상은 다방면에서 매우 활발하게 펼쳐졌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가 경험한 두 번의 큰 위기인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 내전 가운데 그의 선교 열정이 더욱 빛을 발한다. 또한 그의 노년에 기독대학 계명대학교를 설립하여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가 꿈 꾼 바를 2대에 걸쳐서 성취하였다.

1. 성장 과정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불과 생후 2-3개월 때에 미국에서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安義窩)와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때로는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을 통해서 한국 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15세 때(1910) 중국 산둥성에 있는 지푸 내지선교회 운영학교를 졸업하였고 이어 미국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21년 제2대 선교사가 되어 그의 부친이 재임 중인 한국에 도착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황해도 재령선교부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경북 대구선교부로 전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많은 일을 하였는데, 1926년 농어촌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대구성경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퇴임(1940)하기까지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아내(Adams, Susan Comstock) 또한 이 기간에 함께 동역하였다.
그의 주요한 논문으로는 1928년에 발표된 ‘Needed in Stratigic Positions, Women and Missions,’이 있었다.


2. 위기의 과정: 일제의 핍박과 6.25 한국 내전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安義窩)와 달리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또 다른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1937년에 발발한 세계 2차 대전과 함께 일제의 박해를 많이 받았다. 점차적으로 선교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심해졌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국으로 추방되게 된다. 그는 특히 대구에서 활발한 사역을 감당했는데, 1941년 12월에는 20일 간 감옥에 갇히는 일도 겪게 된다. 이후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있었으며, 결국에는 일제 의해서 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의 멤버로서 한국선교에 대한 끈을 놓치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 추방되면, 한국 선교에 대한 끈을 놓치게 되기에 모임의 합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추방된 이후에도 그를 포함한 미북장로교회는 한국 선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일본의 전운이 다함과 함께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선발대와 같이 1946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귀환한 초기 멤버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기간에 그의 아내(Adams, Susan Comstock) 또한 정신여자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귀국 이후에 처음에는 대구 지역에 배치되었으나, 이내 북장로교단의 한국 선교 조직 개편 회의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서울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선교 현장 대표(Field Representative)로서 다방면에서 활발한 사역을 감당하였다(1948-1957년). 이 기간에는 특히나 해방 이후에 사회 재건과 더불어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가운데 미장로교ㆍ감리교ㆍ캐나다ㆍ구세군 선교회와 연합하여 기독교연합봉사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1949).
그러나 다시 2년 뒤에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내전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태천에서 58회 선교사들의 선교 정례 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전황을 전달받고 급히 함께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현장 대표(Field Representative)로서 목회자들과 가족들의 피난과 물자 확보을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부단히 노력하였다. 군사적으로 긴급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난민 캠프들을 돌며 현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부산 등지에서 피난민들을 위한 사역들을 활발하게 펼쳤다. 1950년에 그의 아내(Adams, Susan Comstock)는 피난민들을 위해서 후원받은 옷 500상자를 분배하는 등 구제 사역도 활발히 펼쳤다. 또한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1950년을 전후해서 경북 경산·의성·군위·영천 등지를 순회 전도할 당시에는 2만 여 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100평씩 분배하여 10년 상환 조건으로 나누어 주어 농촌교회 및 농민들의 자립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구제 사역과 더불어 복음 전파의 선교적 목적도 잊지 않았다. 안두화 선교사(安斗華)가 1951년 5월 6일에 그의 아들 Dick에게 쓴 편지를 보면 피난민들을 향한 사역이 기회임을 잘 표현하고 있고, 이에 따라 복음 전도 등 헌신적인 사역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가운데 전쟁 포로들에 대한 사역 보고서를 보면, 그가 이런 쪽에도 기회를 포착하고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사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더욱더 선교적인 사명으로 이를 극복하였고, 구제와 더불어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헌신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6·25 동란 당시 피난민을 피난시키는 데 크게 활약하는 등 그 공이 인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후에 국민훈장모란장(1963)을 받았다. 이 기간 가운데 그의 아내(Adams, Susan Comstock)는 일본 도쿄에서도 혈액 병원에서 일하기도 하였고, 기독 대학교가 아닌 일반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도 하였다.


3. 계명대학교 설립과 노년

초기에는 기독대학을 설립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내한 선교사들의 요청에도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2년에 기독교 대학 설립을 위한 이사회가 구성되었고, 안두화 선교사(安斗華)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안두화 선교사(安斗華)와 감부열 박사는 스미스(John. C. Smith) 박사에게 계명대 설립자금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뉴욕 당국의 승인을 얻어서 12만 5천 달러가 책정되었고, 이 중 3만 5천 달러는 평양의 숭실대학을 서울에 재건립하는데 사용되었고 나머지 9만 달러가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부지매입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도 수 많은 재정적인 지원으로 인해서 본관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내 재원이 없어서 캠퍼스 조성이 주춤하다가, 1958년에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 사는 크리스천 바우어(Christian Bauer)가 기부한 미화 2만 5천 달러와 미군부대의 원조 건축자재로 연건평 720평 규모의 도서관이 준공되고 그해 7월 18일에 봉헌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1958년 9월 제2대 학장으로 전임되어 봉직하며, 기독 대학교로서 계명기독대학교의 기틀을 닦았다.
계명기독대학교의 발전은 1954년 2월에 안두화 선교사(安斗華)가 계명기독대학의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1956년에 ‘영문학과, 철학과, 역사지리학과, 교육학과 4개의 과로 시작하였고, 이때 내적 충실이 중요한 과제로 판단하고 우수한 교수진 확보와 시설 확충, 학업 분위기 조송 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958년에 학장이 된 이후로 1959년에는 종합교육학과, 보육학과, 가정 학과가 설치되면서 규모의 일차적인 확대가 이뤄졌다. 이로서 7학과로 정원 560명의 성장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안두화 선교사(安斗華)는 ‘교육에 관한 임시 특례법’으로 인해서 1961년 9월 정년퇴임하였다. 하지만 퇴임 이후에도 1961년 11월 30일에 문교부 장관 승인으로 명예학장 및 협동학장으로 추대되어 계명기독대학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62년에 시작된 1년 반에 걸친 20만불 모금 운동을 통해서, 계명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더욱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1963년 7월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65년 9월 거주지인 미국 오레곤주 로스버그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는 부인(Susan Comstock, 1894-)과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John)은 오레곤에서 목회하고 차남(Dick)은 외교관으로 한때 주한미국대사관에서 활약하였다.
작성일:2020-07-07 02:41:30 49.142.4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