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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51 / Swanson, Ererett E

닉네임
김민석
등록일
2020-07-07 03:54:41
조회수
79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3_51_김민석.hwp (4002816 Byte)
1. 기본사항
1) 이름: Everett, Swanson F 과제 목록에는(3학년 3반 과제항목 51번) Swanson, Ererett E로 표기 되어있으나 그의 묘비를 확인해 본 결과 Everett, Swanson F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2) 생몰연도: 1913 - 1965.11.4
3) 출신 및 소속: 미국/침례교
4) 가족사항 : 아내 – Miriam Edwards Westerberg(1915-1994), 3남 1녀
5) 연표
1913.11.15.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출생
? 신학과정 이수 후 침례교 목사 안수
1944-1950 센트럴 애브뉴 침례교회에서 사역
1950.7.22. 선교사 사역 시작
1952 일본에서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내한
1952. 내한 후 6개월 뒤 미국으로 온 뒤 한국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시작
1956. 미국 시카고에서 “스완슨 복음주의재단” 설립
1963. “스완슨 복음주의재단”의 이름을 “컴패션”으로 개명
1965. 11.15 에버렛 스완슨 미국 일리노이에서 뇌암으로 사망
1994. 미리암 스완슨 미국 일리노이에서 사망

2. 선교사 소개
1) 선교사로 방한 전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1913) 스완슨은 신학과정을 마치고 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7년 동안(1944-1950) 센트럴 애브뉴 침례교회에서 사역 한 후 1950년 7월 22일 아내에게 자녀들을 맡기고 선교사로 떠나게 된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일본까지 선교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2) 방한하여 어린이를 돕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
스완슨은 선교여행을 위해 일본에 체류 중에 한국전쟁 소식을 접하게 되고 한국에 파송되었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방한하게 된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로는 거의 유일하게 전방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많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많은 열매들을 맺었다. 어느 추운 날 미군병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가고 있던 길에 트럭위에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고 인부들이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쓰레기더미가 아니었고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아이들의 사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 경험을 친구 선교사에게 이야기했고 그는 스완슨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어. 당신이 그것을 봤는데 이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스완슨은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이라면 저에게 확실한 증표를 보여주십시오“그렇게 기도했다. 목적지인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편지가 하나가 와있었는데 봉투에는 ”한국의 전쟁 고아를 위해 써주세요“라는 메모가 적힌 1,000불짜리 수표가 들어있었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http://www.christianreview.com.au/sub_read.html?uid=3377§ion=sc5§ion2=리뷰초대석


3) “스완슨 복음주의재단” 설립과 컴패션으로 개명
한국 어린이들의 참상을 보고 귀국한 1952년, 스완슨은 미국에서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한다. 아내와 친구들, 친인척들이 적극 도와주고 격려해주었다. 특히 동역자인 의사 구스타브 헴월(Gustav Anders Hemwall, 1908~1998)과 부인 헬렌 헴월(Helen M. Moore Hemwall, 1911~2012)은 의료품과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4년부터는 개인과 가족, 교회가 한국의 고아를 위해 소액을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고 일대일로 한국의 아이들과 결연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마련한 기부금은 한국의 고아들에게 음식, 의류, 쉼터, 의약품, 성경 공부 등의 형태로 제공되었다. 공병호,『이름 없이 빛도 없이』(서울: 공병호연구소, 2018), 310.

1956년에는 아내 미리암(Miriam Edwards Westerberg, 1915~1994)과 함께 비영리 단체인 ‘에버렛스완슨복음주의재단’을 세우게 된다.
재단은 계속해서 발전하였고 1963년 스완슨은 마태복음 15장 32절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에버렛스완슨복음주의재단’을 ‘컴패션(Compassion, Inc.)’으로 개명한다. 같은 해 ‘컴패션 캐나다지부’를 세우게 되었고 캐나다를 시작으로 세계 25개국에서 아이들을 위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4) 침례교단과 관련한 사역들
한국에의 침례교단 분열 이후 1960년 5월 3일에 제 50차 총회를 경북김천침례교회에서 ‘김용해’ 총회장의 사회로 개최한다. 등록한 대의원은 164명이었으나 출석 대의원은 146명이었다. 본 총회의 개회설교를 스완슨이 선포하였다. 교단 분열 이후 선교회로부터 교회실무 보조비를 지원 받지 못하던 농촌의 교회들은 한국에서 당시 고아원 사업과 개척교회 목회자 보조사업 프로그램으로 선교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오던 스완슨 목사와 유대를 맺고 스완슨 복음전도회로부터 지원을 받는 길을 모색했다. 1961년 4월 18일 서울 종로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제 51차 총회에서 안대벽 목사를 총회장에 선임하고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에 가입한다. 안대벽 총회장은 ICCC에 가맹한 이후 ICCC의 창설자인 매킨타이어 박사와 함께 미국과 남아메리카 지역을 순방하며 포항총회와 기타 군소 교단을 보조하기 위한 기금모금에 활동했다. 이후 52차 총회에서도 안대벽이 총회장에 선임되고 1962년부터 포항총회가 ICCC의 재정적 지원도 받게되자 이때부터 ICCC와 스완슨 복음전도회는 포항총회의 유력한 재정적 후원단체가 되었다. 이러한 후원단체의 지원을 받은 포항총회는 1962년 6월 18일 서울 종로침례교회 안에 <대한침례회 신학교>를 설립하고 안대벽을 교장으로 선임했다.

5) 한국에서의 훈장 수상과 소천
스완슨은 1961년 11월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1964년 6월 16일에 대한민국 대통령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스완슨은 미국과 전 세계를 다니며 사역을 하였고 1965년 11월 15일 6시에 미국 일리노이에서 뇌암으로 사망하였다.
작성일:2020-07-07 03:54:41 112.15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