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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9 / Forsythe, Wiley Hamilton

닉네임
윤석인
등록일
2020-07-07 14:30:56
조회수
90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2반_9_윤석인.hwp (10247680 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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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 Wiley H. Forsythe, M. D. 한국명[보위렴(保衛廉)]
2. 생몰연도 : 1873 ~ 1918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04.8.10 ~ 1912
5. 연표 :
1873.12.25. 켄터기 주 해로스버그에서 출생
1890년 프린스턴 대학 입학
1894년 프린스턴 대학 졸업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 졸업,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 군의관으로 참전
군의관 전역 후,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 실천
캔터기 주 랙싱턴에 병원을 개업했지만, 불타는 선교의 열망으로 선교사 지원
1904.8.10. 미국 출발
1904.9.29. 제물포 도착, 전주에 의료 선교사 파송, 순회 진료 및 고아원 운영
1905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괴한의 습격으로 귀가 잘리고 두개골 골절의 중상 당함.
1905년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일시 귀국(2년간 신병 치료)
1907년 신병 치료 후, 한국에 귀환
l908년 3월. 목포 파송, 목포 French Memorial 병원 의사
1909년 오웬선교사 치료를 위해 광주에 가던 중, 나병 여인에게 외투를 벗어주고 타고 가던 자신의 말에 태워서 말고삐를 잡고 광주에 도착함.
1912년 광주 나병환자 수용소와 병원 설립의 계기를 제공하고 크게 기여함.
1912년 풍토병(스루프)으로 미국으로 귀국함
1912년 ~ 1918년 미국에서 순회강연으로 수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함.
1918년 5월 9일. 4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김.


Ⅱ. 선교사 소개
출생 및 성장
포사이드는 Joseph H.와 Adeline Shyrock Forsythe의 아들로 1873년 12월 25일 솔트 리버의 켄터키 주 머서 카운티(Mercer County)에 있는 해로스 버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0년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1894년 졸업한 후 루이빌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1898년에 졸업 후 인턴 과정을 마치고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이 벌어진 쿠바에 군의관으로 참전한다.
군의관에서 전역 후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자로 활동하다가 고향인 캔터기 주 랙싱턴에 병원을 개업하지만 불타는 선교의 열망으로 선교사 지원을 하게 된다. 포사이드의 의료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켄터키주 동향의 선교사로 군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오긍선을 키운 알렉산드 선교사이다. 오긍선과 포사이드는 루이빌의과대학 동문이기도 하다. 미국 남 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로 전주에 파송된 포사이드 선교사는 1904년 일본의 고베(神戶)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린다.

2. 전주에서 의료 선교와 고아 사역
전주 예수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처음 2년을 보낸 그는 틈만 나면 남문 시장터로 ‘쪽 복음’을 들고 전도했다. 또한 그는 전주 지역의 거지 아이들을 위한 고아 사역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번잡한 시장터에서 벌거벗은 아이들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추위에 떨고 배고픈 거리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따뜻하게 닦아주고 옷을 입히고, 먹였다.
한번은 그가 부모 없는 아이들을 굴뚝 통로에서 불러내 보니 3명은 유기 상태로 이미 죽어 있었고, 7명이 겨우 살아남았는데, 그중 병원에서 죽은 아이는 “고통이 없는 아버지 집으로 저를 데려다 주세요.”라며 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3. 전주에서의 성공적인 선교 현황 보고
전주에서의 지난해는 바쁘고 성공적이었습니다. 전주는 전북 지방의 도청 소재지로 평야의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남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기에 한국 복음화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일찌감치 교회 출석률은 매우 높아 강단을 문 밖에 놓았지만, 신자들은 점점 불어나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거나 또는 마당에 앉아 예배드리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당 건축의 필요성이 점점 대두되지만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땅 값은 5, 6배 빠르게 올라가고 기존의 거처를 교회로 바꾸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건축을 하려면 목재를 장만해야 하는데, 건축에 필요한 재목들은 모두 유교의 종중부지에 속해 있어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한 노인이 나무를 팔기로 하여 우리는 그것을 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헌금을 자유롭게 하였지만, 교회를 짓기에 충분한 자금이 되려면 수년이 걸릴 것이고,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해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Junkin 씨는 신속한 처리를 결정하여 자금의 15%를 급히 빌려 와야 하였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졌습니다. Junkin 씨는 버지니아의 기독교인 변호사에게 편지를 썼고, 뉴욕에 있는 한 친구가 30만 달러를 보내 왔습니다. 뉴욕에 있는 이 친구는 200,000 달러를 추가하고, 또 교회 건축으로 고갈 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새 계좌를 확보하도록 1,000달러를 보내왔습니다. 참으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백한 응답에 점점 더 감명을 받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새 교회가 완성 될 것이고, 우리들은 완성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여러 역사는 오래된 우리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도의 응답은 인구 밀도가 높은 이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업이 점점 왕성해지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4. 조선의 의료 실태 소개
한국 의사들의 “만병통치(cure all)"는 침(Chim)이나 혹은 바늘이다. 이론은 기(氣)의 회로가 몸을 통해 흐르고 있어서 만일 사람이 아프면 기의 회로 중 하나에 탁한 기가 차서 그러는 것이므로 유일한 치료 방법은 이 기가 빠져나가도록 막힌 것을 뚫는 것이다. 설사, 매스꺼움엔 손목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찔러 막힌 기가 빠져나가도록 뚫는다. 얼굴 마비에는 반대 편 귀 밑에 바늘을 찔러 강한 통증으로 다른 쪽을 당긴다.
담즙 이상이나 변비에는 허벅지 안으로 대침을 놓는다. 뼈가 부러지면 부러진 곳을 구리를 조제한 것으로 문지르면서 버드나무 껍질로 그것을 싸맨 다음에 환자에게 조제된 구리를 먹이는데, 그렇게 얼마 지나면, 비록 항상 원래 자리에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지만 뼈가 붙는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그런 치료를 받고도 잘 사는 것이다.

5. 괴한의 습격과 미국에서의 치료
1905년 3월 13일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은 양반집에서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마을에 찾아가 부상자를 치료하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어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즉각 세브란스로 옮겨져 에비슨과 헌트의 집도로 응급처치를 마치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를 계기로 치료를 받은 양반이 기독교인이 되어 전주 서문밖 교회에 출석하게 됨으로써 종래 서민이 중심이던 교회에 상류층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6. 목포 파송과 탄원서
당초 전주 의료원 의사였던 포사이드가 미국에서 2년간 부상을 치료받고 돌아와 목포에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자, 지방 관찰사에서부터 지게꾼에 이르기까지 전주에서는 1,000명이 포사이드를 다시 전주로 보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는 충직하고, 사랑스럽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 포사이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7. 광주에서 나병환자와 조우목포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포사이드는 오웬 선교사의 병세에 대한 전보를 받고 4월 4일 광주로 향했다. 조랑말을 타고 오던 그는 광주 길목 40리 밖에서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포사이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버려진 그 여인을 살펴본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병 환자였다.포사이드는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길이었지만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포사이드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마음에 가책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후일에 목사가 되어 나환자를 돕는 일과 사회사업을 하였다.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광주는 낯선 곳이었고, 잠깐 다녀가는 곳이었다. 포사이드는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찾아가서 그 여인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해 보았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 여인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얻어 챙겨주고 목포로 돌아왔다. 닥터 포사이드와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나병 환자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은 한국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닥터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나서 파란눈 노랑머리 서양의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닥터 포사이드의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비롯해 광주 지역 선교사들은 닥터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병원 시설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뜻밖의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광주 주민들이 병원의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광주 한복판에는 안 된다는 항의였다. 선교사들은 1912년에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웠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이다.

8. 제주도 사역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들어 온지 1년 후, 포사이드는 1909년 프레스톤 선교사와 함께 제주읍으로 들어와 진료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제주 의료선교에 동행한 조수들 중 일부를 제주도에 남겨두고 진료에 힘쓰도록 했을 정도로 가난한 자와 병든 자, 특히 나환자들을 돌보는데 삶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계속된 제주도 의료봉사 활동은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지역에 1908년 입성한 후부터 제주에 불어 닥친 복음화의 열풍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제주성내교회 당회록에는 포사이드 선교사가 전도지 3천권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 구좌읍에 있는 세화교회 설립 기록에도 이와 같이 나와 있다. “제주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가 목포에 주재하고 있었던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에게 복음을 받았고, 부산진에 사역하던 왕길지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1918년 가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이곳의 초대신자가 되었다.”

9. 풍토병으로 귀국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귀를 잘린 후유증과 풍토병에 감염되어 선교지에서 더 이상 봉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1912년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포사이드는 투병 중에도 7년 가까이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 선교에 대한 열띤 강연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도와줍시다. 조선은 앞으로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조선의 사정을 알려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보내는데 힘썼다. 그는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과 한국으로 파송할 선교사 모집 등, 많은 일을 하다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45세 이른 나이에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안위를 뒤로 하고 이름도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며 버려진 자들과 함께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던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빛은 이 땅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마침내 조선은 포사이드 선교사가 꿈꾸었던 것처럼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작성일:2020-07-07 14:30:56 112.157.24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