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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48 / Jones, George Heber

닉네임
이호빈
등록일
2020-07-07 16:13:55
조회수
666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48_이호빈.pdf (321245 Byte)
George Heber Jones (1867–1919)


Ⅰ. 기본
1. 이름 : George Heber Jones / 한글명: 조원시(趙元時)
아내 : Margaret J. Bengel Jones
2. 생몰년도: 1867.8.14. - 1919. 5. 11.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연표
1867년 8월 14일 뉴욕, 모 호크 출생
1887년 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 입국
1887년 배재학당에서 가르침
1892년 해리먼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 졸업
1893년 Margaret J. Bengel 과 결혼
1897년–1899년; 1907-1909년 M. E. Mission 두 차례 교육감 재직
1903년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위원회 임원으로 재직
1905년 아이오와 주 모닝 사이드 대학에서 선교학 강의
1907년 한국으로 돌아옴, 협성신학교장 재직
1909년 귀국
1911년 M. E. 선교부에서 편집자로 재직
1911년 선교사 은퇴 후 De Pauw 대학교에서 선교학 강의
1915-1918년 보스턴 신학교에서 선교학 강의
1904년 Successes and opportunities in Korea 집필
1907년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집필
1910년 The Korean revival : an account of the revival
in the Korean churches in 1907 집필
1910년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집필
1910년 Christian medical work in Korea 집필
1910?년 Education in Korea, a supreme opportunity for the Christian church 집필
1919년 5월 11일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소천https://library.columbia.edu/content/dam/libraryweb/locations/burke/fa/mrl/ldpd_6257798.pdf



Ⅱ. 선교사 소개

1. 1867년 뉴욕에 위치한 모호크에서 태어난 존스는 어린 시절 같은 주 유티카에서 자랐다. 그는 우리나라의 1세대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는 1887년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가 선교에 있어 서구적 접근 방법을 더욱 엄격히 고수했던 반면, 그는 한국의 풍토적 접근 방법에 더 우선시하는 입장을 추구했다.
존스는 3개의 신학잡지를 창간했다. 『The Korean Repository』『The Korean Review』『신학월보』 그는 하와이 이민사업에 독려했으며, 문화를 연결하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2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가는 사람들을 태운 첫 번째 배의 절반가량의 노동자가 인천에 있는 그의 교회 출신이었다. 1907년, 그는 항일투쟁하는 사람에 의해 거의 죽을뻔 하였다. 존스는 우리나라의 폭동을 진압한 일본 경찰의 행동을 칭찬하였다. 존스의 선교철학은 한국전통의 억압과 싸우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황화에 성공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문화가 현대화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존스는 1919년 5월 11일 프롤리다 주, 마이에미에서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George Thomas Kurian & Mark A. Lamport, 『Encyclopedia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London: Rowman & Littlefield, 2016), p1250


2. 존스는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는데도 공을 기여했다. 1900년 9월 완역된 신약성경 첫판은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 시험역본이었고 나머지는 개인역이었다. 신약성경의 완전 본 출판을 위해서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에게 맡겨져 추진하였으나 1902년 6월 아펜젤러가 목포 앞바다에서 조난당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존스가 이 일을 맡게 되었다. 1904년과 1905년 신약성경 수정본이 출판되었으나 인쇄상의 오류로 인해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p565


3. 존스는 한국교회의 주일학교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감리교는 선교 초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였다. 1893년 감리교는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여 존스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로인해 상당히 발전하였다. 1893년 5개의 주일학교가, 1895년에는 정동과 이화에 각 1개씩 2개, 상동교회 1개, 동대문교회 1개, 제물포교회 1개 합 6개로 발전하였고, 1896년에는 7개, 1897년에는 15개, 그리고 1898년에는 무려 28개로 늘어났다. 학생 수도 1893년에 133명, 1895년에 385명, 1896년에 512명, 1897년에 967명, 그리고 1898년에는 1,402명으로 증가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p616


4. 존스는 동학농민운동에 의해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1893년 4월 4일 존스가 맡고 있는 교회에 “목사퇴거방문”이 첨부되었다. 기독교인들을 “모리지배”라고 할 만큼 기독교에 대한 동학도의 공격은 강도가 높았다. 그로인해 미군함 한 척이 미국인 보호를 위하여 4월 18일 인천에 도착할 정도로 동학농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저항은 거세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p654

5. 1889년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한옥 두 채를 구입하고 노병일 권사를 권서인으로 파송하여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제물포교회가 시작되었다. 1891년 굿셀 감독이 아펜젤러 목사를 이 지방 책임자로 임명하여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존스가 서울에 거주하면서 인천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893년 강화도와 황해도를 인천지구에 편입시키면서 존스는 인천에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우각동에 거점을 마련한 존스는 교회를 담임하면서 제물포, 강화도, 황해도 연안 등지로 순회전도를 하면서 남학교와 여학교도 세워 교육사업도 시작하였다. 이들 소학교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자녀들을 모두 받아 교육시키면서 일반 교육과정과 종교 교육도 같이 하였고, 성경반을 조직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일도 병행하였다. 존슨느 1893년에 32명의 교인이 있었고, 1894년 18명 입교인과 42명의 초신자가 생겨났다. 그 해에 한국인들의 힘만으로 지은 최초의 감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인천에 목사 주택과 강화에 전도사가 거주할 작은 집 한 채를 샀으며, 교인수도 증가했다.
제물포 지역 외에도 존스가 열심을 쏟은 곳은 강화도 시루미였다. 이곳에서의 선교는 일찍이 제물포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 강화에 와서 생활하고 있던 이승환이 있어 가능했다. 고향에 내려와 홀로 성경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이승환은 자신의 어머니를 전도하였고 세례를 베풀려고 하였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서 그의 어머니는 존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존스의 지원과 이승환의 헌신적인 전도에 의해 강화지역은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1894년 존스에 보고에 의하면 제물포와 강화 지역의 경우, 지난 1년동안 장년 18명과 어린이 8명이 세례를 받았고, 입교인 13명과 학습인 45명이 생겼다고 한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p711-713
작성일:2020-07-07 16:13:55 59.14.56.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