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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55/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1884-1973, AP) / MacRae, M. Hall

닉네임
조동진
등록일
2020-07-08 00:24:15
조회수
68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B55_조동진.hwp (966656 Byte)
맥 레 선교사 /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1884 - 1973)

Ⅰ. 기본사항

1. 이름: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 맥 레 / 한국명: 맹호은(孟皓恩)
2. 생몰연도: 1884. 5.14. - 1973. 1. 6.
3. 출신 및 소속: 호주, 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0.11. 2. - 1940. 첫 진주 방문부터 호주로 귀국하는 기간까지임

5. 연표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김승태, 박혜진 엮음,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327

1884.5.14. 호주 멜버른 출생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095184873 2017년 5월 23일 접속.

1910.11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진주에서 활동
1912 라이얼 목사와 함께 서울북쪽에서 열린 학생 컨퍼런스에 참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095184873 2017년 5월 23일 접속.

1913-1914 거창으로 이전, 거창, 안의, 함양 지역의 9개의 교회를 보살피도록 배정받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095184873 2017년 5월 23일 접속.

1915 일본 토쿄에서 홀과 결혼 후 함께 내한 25년 동안 마산에서 선교부 관리와 교회 및 학교운영 지도 부인은 마산지역 여성선교, 특히 아동보건사업에 공헌 마산 문창교회 발전시킴
1921 창신학교 교장
1925 호신고등보통학교 설립하여 운영
1940 안식년으로 귀국
1948 부인 홀 별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095184873 2017년 5월 23일 접속.

1970 당시 스코틀랜드교회에서 병원 원목으로 재직

6. 가족사항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095184873 2017년 5월 23일 접속.

부인: MacRae, Margaret Hall(? - 1948)
아들: MacRae, Farquhar / MacRae, Norman
딸: MacRae, Margaret




II. 선교사 소개 : 맥레(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1884-1973)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 선교사. 교육자. 한국명 맹호은(孟皓恩). 멜버른 출생. 프레드 매크레이는 스코틀랜드 콕펜(Cockpen)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1년 아버지가 투락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호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멜번 대학에서 석사(M.A)를 졸업하고 글래스고(Glasgow)에 있는 연합자유대학(the United Free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매크레이는 1910년 11월 2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언어를 공부하면서 그의 선생과 함께 장날에 거리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매우 가난한 한국 사람과 거리의 여성들과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또한 이 사역을 마을 시장들로 확장시켜나갔고 2년이 지났을 때 그는 40-50개의 장터에서 설교했다고 셈을 하였다. 한국에 도착한지 1년 후, 그는 커를 의사와 함께 진주의 북서쪽에 있는 교회들까지 거의 300km의 이르는 장거리 순회여행을 하였다.

1911년 12월 6일 경상노회(제1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진주(晋州郡 大安面 二洞)에 거주하면서 1912년 5월까지 순회하며 전도하고, 1908년에 설립된 의령군 백야리(白也里)교회에 시무하기도 했다. 1912년 5월 이후 거창, 안의, 함양지역까지 확장하여 순회 전도하다가 1913년 거창으로 이주하여 성기리(聖基里)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학생운동의 발전을 격려하는데 민감했던 그는 1912년 라이얼 목사와 함께 서울북쪽에서 열린 학생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1913-14년 동안 매크레이는 거창, 안의, 함양 지역의 9개의 교회를 보살피도록 배정받았다. 거창 선교지부를 설립하면서 그와 켈리 목사부부는 1913년 6월 18일에 그곳으로 이전했다. 매크레이는 코넷(cornet)을 연주하면서 찬송가 곡조를 가르쳤다. 이것은 장터에서 군중들을 끌어 모으는데 유용했다. 그는 한국인의 예절과 관습을 빠르게 배웠는데 복음을 전달하는데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1915년 1월 9일, 매크레이는 일본에서 온 마가레트 홀 양(Margaret Hall)과 결혼했는데, 그해 말 그들은 거창에서 마산으로 옮겨갔다. 그들의 딸 캐슬린(Kathleen)은 한국에서 죽었으나 아들들은 선교사로 섬기려고 아프리카와 중국에서 살았다.

매크레이는 활동적이고, 지혜롭고, 성실한 지역 교회들의 감독자였다. 처음에는 거창에서 안의와 함양지역을 보살폈고, 1915년부터 25년 동안 함안에서 창영, 웅천, 창원, 진통을 그리고 마산 지역들 안에서 교회들을 보살폈다. 이따금, 그는 또한 밀양과 다른 지역들 안에 있는 교회들도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한국인 목사들이 섬기는 많은 교회들의 동사 목사로 섬겼다. 마산교회도 그중의 하나였다. 30년이 지나서, 이러한 교회들의 나이든 교인들은 그를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마산 안에서 매크래이 목사는 라이얼 목사가 휴가를 간 1916-18년의 시기에 그리고 1920-38년까지 창신학교의 교장으로 섬겼다. 이 일은 직원과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라는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 저항하는 것을 수반하였다.

매크레이는 선교회의 생활에 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중요한 건축시기에 건축위원회에서 일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주일학교와 교육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권서들의 사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감독했다.

호주 본국 선교부는 1945년 한국이 해방된 이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는 이 요구를 신중하게 검토했으나 부인의 건강 악화 때문에 돌아가려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한편 마산지역 여성선교, 특히 아동보건사업에 큰 공을 남긴 부인은 남편과 함께 귀국 후 1948년 스코틀랜드에서 별세하였고 맥레는 스코틀랜드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70년 당시까지 병원 원목으로 일하였다. 편집자,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5권(로마-메스트레자) (서울: 기독교문사, 1982): 1076.


1915년 일본(도쿄)에서 마가렛 S. 홀(Margaret S. Hall)과 결혼하고 돌아와 선교 지역을 마산(上南洞 74번지)으로 옮겨 정착하고, 1940년까지 25년간 선교부관리와 교회 및 학교 운영에 열정을 쏟아 힘썼다. 이 기간 중 그의 주요 활동으로는

첫째, 1920년 5월 17일 창신 학교 교장(3대)으로 취임하여 희원동 교사(校舍) 건립 책임자로 토지를 매입하고 건축하여 창신학교 희원동 시대를 마련하였다. 교장 임기 중 제9회 졸업생까지 배출하며 청소년교육에 힘썼으며, 학교의 경영난으로 1925년 3월 22일 폐교되었다. 그 후 이 학교는 1938년 3월 24일 복교되었다.

둘째, 구마산(舊馬山)교회에서 아담슨(Adamson A., 孫安路)선교사와 상계(相繼)시무하며 교회를 발전시키고, 1918년에는 구성(龜城)교회에서 개최된 1주간의 마산지방 남여사경회를 통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다. 1921년 함안군 평림(平林)교회를 설립하고, 1923년 합천군 구원동(舊原洞)교회에 시무하면서 교회를 부흥하게 하였다.

셋째, 1925년 호신(濠信)고등보통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청소년 교육에 공헌하였다. 창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유치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9년 4월 20일 문창교회가 추산동으로 옮긴 뒤 남겨둔 교회 건물을 이용하여 마산 최초의 의신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이밖에 경상노회와 경남노회 소속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임원(1919), 부회계(1930), 시찰위원 등으로 봉직하고, 김해읍 교회(현 김해교회) 동사목사(1920)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는 장날이면 이곳저곳 장터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1922년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그는 크락션 대신 호각을 불면서 “호각소리나면 길을 비키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아이들은 너무 신기해서 그 뒤를 따라 다녔으며 이것이 마산에 선교사에 의하여 오토바이가 처음으로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통영, 고성, 웅천, 진해, 상남 방면에 교세를 착실히 확장해 나갔다.
부인 홀여사의 영향으로 일본어가 능숙하여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신사참배문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때 대부분의 교육기관을 책임진 한국의 선교사및 지도자들이 학교의 후세 교육을 중단없이 하기위한 방편으로 절충안에 동의하고 있었다.

즉 신사(神社)에는 가되 "참배 (Chambai)" 는 하지않고 "묵도(Meukdo)"하는 방법으로 타협하여다. 교육자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수밖에없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치 호주선교부가 굴복한것으로 선전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결국 페교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당시 호주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를 강경하게 했던 선교사는 멕크라렌(마라연), 태메시 ,서턱기(서덕기) 등 교육과 관계없는 선교사들이었다.

창신학교를 책임진 멕레 목사도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 처럼 신앙의 갈등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940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으며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오려 하였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 병원 원목으로 재직하였으며 1973년 1월 6일 스코틀랜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youn24&logNo=6005731651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2020년 7월 8일 접속



25. Rev Frederick John Learmonth Macrae MA (b. 14 May, 1884 at Cockpen, Scotland; d. 6 January 1973)

Chinju 1910-1912. Kuchang 1912 -1915. Masan 1915-1940.

Fred Macrae moved with his parents to Australia when his father became the minister of Toorak Presbyterian Church in 1891. He graduated M.A. Melbourne University, and studied theology at the United Free College in Glasgow.

Macrae arrived in Korea 2 November, 1910. While engaged in language study, he used to go with his teacher on market days to preach in the streets. He requested friends to pray for the very poor, for street girls and prisoners. He extended this work also to village markets and reckoned by the end of two years that they had preached in 40 or 50 markets. After a year he took a long itinerating trip of nearly 300 kilometres to the churches north-west of Chinju with Dr Currell.

In 1912, he went with Lyall to a student conference North of Seoul, keen to encourage the development of a Christian student movement.

For the year 1913 -14 Macrae was allocated the supervision of nine churches in the Kuchang, Aneui and Hamyang districts. Having established the station at Kuchang he and the Kellys moved there on 18 June 1913. Macrae played the cornet, using it to teach the hymn tunes. It was also useful for attracting crowds in the markets. He learned Korean etiquette and customs quickly and put these to good use in communicating the Gospel.

On 9 January 1915 Macrae was married to Miss Margaret Hall, from Japan, and later that year they moved from Kuchang to Masan. Their daughter Kathleen died in Korea, but their sons lived to serve as missionaries in Africa and China.

Mr Macrae was an energetic, wise and faithful superintendent of local congregations, first in the Kuchang, Aneui and Hamyang districts, and from 1915 onwards for 25 years in the Haman, Changyung, Ungchun, Changwon, Chintong and Masan areas. At times he was responsible for churches also in the Miryang and other areas. He served as co-pastor of a number of churches which also had Korean pastors. These included the Masan Church. Mr Macrae was remembered warmly by older members of these churches thirty years later.

As well, in Masan, Mr Macrae served as Principal of the Chang Shin School during Mr Lyall’s furlough from 1916 until 1918, and then from 1920 till 1938. This involved resisting the strongest pressure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to have the students and staff worship at the Shinto shrine.

Macrae took a full part in the life of the Mission. He served on the building committee during the major construction period; he remained a member of the Sunday School and Education committees for many years. He supervised the colporteurs, taking a particular interest in their work.

The Mission Board wanted Mr Macrae to return to Korea after Liberation in 1945. He considered the request carefully, but decided not to return because of his wife’s ill-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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