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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28 / Hard Theodore

닉네임
박성전
등록일
2020-07-08 10:56:06
조회수
590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28_박성전.pdf (135630 Byte)
하드 / 하도례( Hard Theodore 1925. 9. 11. -. OP )



I. 기본사항

1). 이름: Hard, Theodore (하드 / 한자: 河道禮 / 한글: 하도례)
2). 국적: 미국 (코네티컷 주 토링턴 출생)
3). 가족사항: Hard, Grace (부인: 1928 - )
4). 학력: 1942 필립스아카데미 졸업
1943 예일대학교에서 1학기
1944 세인트앤섬대학 1학기 수학
1949 휘튼대학 졸업
1952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5). 경력: 1953.6 미국 정통장로교 뉴저지노회에서 목사안수
1954.1.18.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부산에서 예장 고신측과 교류하며 선교
1958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 교수로 취임, 도서관장 역임
부산노회신학교, 대구 경북신학교 강사
1966-73 부산 영광신학교 교장 역임
1984 고신대학 신학부 교수, 도서관장
부인은 부산에서 국민학교 교사, 고려신학대 강의
6). 논저: 신약원어참고서, 1968;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 1972; 종교와 사회, 1977; 신학사전, 1978; 태양열오븐, 1976


II. 선교사 소개: 하도례 (Hard Theodore 1925.9.11. -. OP)

1. 한국에 오기까지

하도례는 선교사가 되지 전 1943-46년 간 미 공군 비행사로 B29 폭격기를 운행하였고, 그의 임무는 일본 상공에서 폭타는 투여하는 일을 하였고, 1945년 군 복무 시절 처음 티니안 섬에서 한국인을 보았고, 같은 동양인이지만 서로 깊은 반감이 있는 그들이 함께 수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몇 달 후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으로 지역을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쟁으로 생긴 분쟁이 있는 교회들과 관련하여 관계를 맺으며, 선교사로서의 소망을 다짐하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온 하도례 선교사는 곧장 예일 대학 과정에서 받은 점수를 가지고 휘튼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선교 준비를 하던 그레이스와 만나 선교를 위한 기도와 미팅 등을 하며 교제 중에 결혼한다. 그 후 두 부부는 티벳 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중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그때 중국이 티벳을 침략하여 계획이 수정되어 공부를 더 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때 하부선(브루스 헌트) 선교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강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그곳은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함을 느꼈고, OPC(미국 정통 장로교)에서도 선교지를 정할 것을 촉구받아 티벳을 가는 길목이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한국으로 선교지를 정하였다. 하도례 선교사는 하부선 선교사와 그의 가족, 그리고 고신 측과 함께 일하고 있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2. 내한 선교사로써의 하도례

하도례 산교사는 부산으로 내한하였는데, 헌트(하부선) 선교사와 함께 고신측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는 고신대학교에서 강사와 도서관장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도서관정으로서 책을 구입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하였고, 한국의 여러 교회를 순회 하며, 교회설립과, 후원, 집회를 인도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 하였다. 또한 농촌교회의 자립과 성장을 위해 힘썼다.

처음 그가 교회 개척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은 설교 사역이 전부였으나, 점점 시작하는 교회가 읽을 만한 서적을 모아 염가로 보급하고, 시청각 자료사용 방법을 알려주고 도와주었으며, 교회가 어떤 이해관계의 개입됨 없이 교회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 했다.

하도례 선교사는 내한 후 자선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기독교 병원, 고아원, 나환자 수용소,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 등을 운영하는 자선 사업을 하였다. 특이 이 부분에서 하도례 선교사는 활동적이었다. 그는 나 환자 속에서 학교를 운영하였고, 그들 중 선교 사역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신학과정을 마련 7년 동안 운영하였다.

마지막으로 하도례 선교사는 신학 교육 발전을 추구하며, 교육기관 내에서 신학의 기초 훈련 과정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강사로서 가르쳤으며, 자신 또한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TH.M(신약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학생들을 영국, 화란, 미국 및 남아프리카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도움을 주었으며, 그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충실하여 학위를 취득하여 왔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은퇴하기 까지 교신대학교 교수로서, 성경 언어, 선교학, 엘렝틱스, 험증학, 문화인류학, 조직신학 분야 등을 교수하며, 대학 발전과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고, 부산에서 칼빈대학의 설립과 건축, 교육에 기여 하였으며, 합동 교단의 지방 신학교인 부산노회신학교를 위해서도 기여하였다.

3. 문서선교사로써의 하도례

독서실, 도서관 등을 설치하며, 다양한 종류의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것, 저술 및 출판 등 모든 것이 문서 선교에 해당된다. 하도례 선교사는 한국에서 34년간의 노력으로 처음부터 문서 선교에 상당한 많은 투자를 하였다. 부산에서 독서실, 서울에도 한 독서실을 개설하여 기독교 서적을 배치하였고 길거리에서 보행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부산에서는 세 사람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창녀였는데 지금은 마산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여집사로서 봉사하고 있다. 두 명의 대학생들이 책을 통해서 주님 앞에 나왔으며 그들은 후에 결혼하여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

특별히 그는 도서관을 개관하거나 신학교 도서관을 돕는 일에도 열심히 하였다. 그가 시작한 도서관은 영광 신학교를 포함하여 부산 장로회 신학교(합동측)와 대구에 있는 합동측 신학교였다. 그는 고신측의 경북 신학교의 도서관을 처음으로 세워 확장하고 증축도 하였다. 하도례 선교사는 기금이나 책을 파는 일을 통하여 다른 도서관을 돕기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수원에 있는 합동 신학교(개혁파)였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고려신학교(고신대학)와 칼빈학원의 도서관 사서이며 운영자였다. 그가 사역하는 동안 처음엔 천권으로 시작하여 많은 도움을 받아 5만여 권의 장서가 된 것을 보았다.

서구 신학 서적들을 판매하는 일은 놀랍게 늘어났는데 이 일은 하도례 선교사의 동료 랄프잉글리쉬(Ralph English)가 도맡아 하였다. 고려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합동 신학교에서 수천권의 책들이 저장되었고 정규적으로 판매되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대부분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서너 권의 책들과 논문들은 다른 서적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빈약한 방면, 즉 농촌 지역의 성도들의 삶의 문제, 기독교 고전, 선교 및 비교 종교학 등을 기술함으로써 큰 만족을 가져왔다. 하도례 선교사는 박종철씨의 도움으로 번역을 한 메쯔거(Metzger)의 헬라어 사전인 신약원어 참고서가 계속 사용되고 있음에 매우 기뻤고 이것은 34년간의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문서 사역을 한 죄종적인 일을 언급하게 만들었다.

하도례 선교사는 개혁주의 신행협회의 한 설립 맴버로서 1988년까지 30년여년 동안 본 협회를 상당히 열심히 도왔다. 외국 출한사로부터 출판 허락을 받는 일, 출판권을 얻는 일이라든지, 출판 계획을 세우는 일, 책 표지 정하는 일, 타이프 치는 일 등을 포함하여 책들을 편찬해 낸 일을 대부분 언급한 일을 그는 해왔다. 그는 이 분만 아니라 아니 시골 교회들에게도 책을 팔며 보급을 했었다. 대부분 광고도 없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쉽게 책을 판다는 건 정말 힘들고 고된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이 개혁주의신행협회를 돕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지금의 신행협회로 성장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도례 선교사는 문서 선교가 계속하여 활발히 진행되기를 원했다.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은 인도와 필리핀에서 비슷한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은 교회 벽을 훨씬 멀리 뛰어넘어 간다고 생각했다. 문서는 독자가 무엇을 읽을 것인지, 그리고 관심 갖는 것을 선택해서 읽게 될 때 마음과 심령을 꿰뚫게 되는 것이다. 설교만 듣는 자들은 책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그들은 설교자가 설교하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며, 설교자의 말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손에 쥐어진 책은 읽고 싶을 때 빨리 또는 천천히 읽을 수 있으며 우리의 양심에 새길 수도 있다. 또 “사례금을 줄 필요도 없이 계속해서 모아 둘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도례 선교사는 그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실수한 것들을 다시 하지 않길 원했다. 하도례 선교사의 발자국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땅을 더욱 견고하게 되기를 그는 원했고, 맑은 물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작성일:2020-07-08 10:56:06 211.184.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