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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25/ Gilmore,George Williams

닉네임
김선미
등록일
2020-07-08 23:51:22
조회수
90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2반_25_김선미.hwp (346624 Byte)
1. 이름: Gilmore, G. W. / 길모어 / 한국명: 길모(吉毛)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p.233


2. 생몰연도: 1858 ~1933 출처: http://worldcat.org/identities/lccn-no00021044/


3. 출신 및 소속: 영국 런던,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86 ~ 1889

5. 연표 『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SER』, (서울: 기독교문사, 1980), p.148

1857 영국출생
1883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졸업
1886. 7. 4. 벙커(D.A.Bunker), 헐버트(H.B.Hulbert)와 함께 내한
1886. 9. 육영공원에 교수로 부임
1887. 7. 애니 엘러스와 달젤 벙커(D.A.Bunker)의 결혼식 주례
1889. 아들의 병고와 월급 부족으로 귀국
1892. 필라델피아에서 『Korea from its Capital』이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책을 간행하여
육영공원이나 서울에서의 초기 선교상황 등에 대하여 흥미로운 사실들을 제공
~ 1893 브루클린 공예기술학교(Brooklyn Polytechnic Institute)등 사립학교에서 가르침
~ 1899. 방고르신학교에서 영어성서, 성서역사 및 비교종교학을 강의
~ 1906. 미드빌신학교에서 구약성서원어와 문학종교사학들을 강의
1905 ~ 지의 편집위원이 되어 비교종교학에 관한 많은 논문발표
1895. 《The Johannean Problem》이란 저서
1896. 허스트(J.F.Hurst) 감독 주재하에 《Literature of Theology》를 편집하는데 공헌

6. 가족사항
내한 전 부인과 아들이 있다고만 알려짐
Ⅱ. 선교사 소개: 길모어(Gilmore, G. W.:1857~)
1. 건전한 생각과 훌륭한 정신을 가진 세 사람의 만남과 한국입국
선교사들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상호 협조하였다. 서양교육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높아지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노력이 비록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교육을 앞장서 도입하였다. 1881년 정부는 일본과 중국에 학생들과 시찰단들을 파송하여 세계정세를 공부하게 하고 있었다. 서양인의 직접적인 훈도의 시작은 1883년 T. E. 핼리팩스(halifax)가 육영공원에 교사로 부임한 때부터이다. 1885년 봄에 이르러, 대군주는 주한 미국사절을 통하여 국립학교의 운영과 교육을 기획할 만한 유능한 청년 세 사람을 추천하여 달라고 미국 교육행정관사인 죤 이톤(John Eaton)장관에게 요청하였다. 이톤은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세 사람의 “건전한 생각과 훌륭한 정신”을 가진 학생들을 선택하였는데 그 중 두 사람은 졸업반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죠지 W. 길모어(George W. Gilmore, 1883년 프린스톤 졸업생), D. A. 벙커(Bunker, 1883년 오벌린 졸업생), H. B. 헐버트(Hulbert, 1884년 다트마스 졸업생)가 바로 그들이었다. 미인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육영공원은 1886년 9월에 창설된 이래 성과가 좋아 정부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었다. 그렇게 필요한 학교였지만 소기의 목적을 얻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가난한 관리들이 공금을 사용화 했기 때문이다. 이런 한심한 실정이 되매 먼저 길모어가 그만두고 그 다음에 헐버트가 다시 마지막으로 벙커가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 두 사람은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사, 1973), p.132-133


2. 세 사람의 인연과 배에서 만난 여성과의 결혼과 주례
1886년 7월 4일 제물포에 도착한 최초의 독신 여성 선교사인 애니 J. 엘러즈(Annie J. Ellers, Bunker의 부인)양은 선교부로부터 한국에 가도록 권면을 받았는데 의료수업 과정을 거의 다 마친 숙련된 간호사였다. 해리 로즈,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최재건 옮김, (서울: 연세대학교출판사, 2009), p.22
그녀는 여행길에서 헐버트(H. B. Hulbert), 벙커(D. A. Bunker), 길모어(G. W. Gilmore), 길모어 부인과 동행했는데, 이 세 교사들은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미국 정부가 보낸 자들이었다.

1886년 5월 22일,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기 위해 애니 엘러즈가 탄 증기선 ‘시티 오브 페킨(City of Pekin)’에는 그녀 외에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길모어와 헐버트, 벙커가 동행하고 있었다. 길모어는 기혼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있었고 헐버트에게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메이 한나(May Belle Hanna)라는 애인이 있었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뉴욕에서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벙커는 독신에 애인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엘러즈와 벙커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었다. 다소 지루한 배 안에서 오랜 여정을 함께 지내며 같은 나라 같은 장소로 가는 일행이 나눈 첫 인사 이후의 교제들을 떠올리면 정확한 단서는 없지만 짙은 사랑의 혐의에 대한 심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배 위에서부터 들떠 있었다. 그녀의 회고 속에 많은 내용이 함축돼 있다.

“증기선에서는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또 얼마나 이렇게 순박하고 무턱대고 대담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위대하고 놀라운 상상들과 열망들과 희망들과 기대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인지!”(Annie Ellers Bunker, “Personal Recollections of Early Days,” Within the Gate, 1934, 58.) 2015/11/23 22:46 국민일보


내한 선교사들의 결혼과 관련하여 길모어, 헐버트, 벙커는 각각 전형적인 패턴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길모어처럼 미리 결혼을 하고 부인 또는 남편과 함께 내한한 경우, 헐버트처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본국에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던 경우, 벙커처럼 선교지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경우의 세 가지가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결혼 방식이었다.


따라서 결혼 적령기를 맞이해 내한한 미혼의 남녀 선교사들이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결혼까지 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독신보다는 안정적인 가정을 갖도록 장려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애니 엘러즈와 벙커의 사랑과 결혼이었다. Ibid.


애니 엘러즈와 달젤 벙커의 결혼식은 1887년 7월 초순 화요일 저녁에 알렌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육영공원의 교사 길모어 목사였다. 약 50장의 초대장이 당시의 모든 주한 외국인들과 조선인 귀족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린 첫 외국인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다. 초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왕실에서 보내주고자 했던 악단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결혼잔치는 생략했다.

보름달이 비추이는 서늘한 여름밤의 결혼식이었다. 예식장의 중심에는 임시로 설치한 분수가 꽃들 가운데 있어서 주변의 청사초롱들과 어울려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의 아들과 세관 직원의 딸이 신랑신부가 행진하는 길 위에 꽃을 뿌려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새롭게 마련된 신혼집으로 향했다. 신혼집은 조선 왕실에서 금팔찌 금반지 세트와 더불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비단, 식기, 차 세트, 커피세트 등 다양한 선물들을 보내왔다. 모두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 Ibid.


3. 길모어의 저서 『서울풍물지』
길모어는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1886년 한국에 왔다가, 서울의 유력자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업에 열의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뒤 귀국하였으며, 1894년엔 이 학원도 폐교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길모어는 전체 15장으로 구성된 ‘서울풍물지’를 기록하여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길모어는 국토, 정부, 서울의 모습, 언어, 국민, 가정생활, 복식과 장식, 여성의 생활, 놀이, 종교, 자원, 문명화로의 진보, 외교관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생활, 선교사업 등에 관하여 보고, 느낀 바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게으름은 문명의 적’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은 근검절약과 금욕적인 청교도 정신을 중요한 덕성으로 여기고 동아시아 사람들의 문제점은 이러한 청교도적 정신의 부재로 게으르고 노동을 귀히 여기지 않고 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본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이룬 문명의 가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길모어는 조선인들은 서양인의 근면함의 덕성과 노동의 소중함을 배워야 하며 이것이 조선을 문명화하는 중요한 요소라 보았다.

그는 조선인의 게으름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생긴 것 이라고 여겨 노동 의욕을 감퇴시키는 주범이 되는 관리들의 부정을 막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비문명적인 생활습관을 부각시키면서 문명과 비문명의 차별성을 강조 했다.

4.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가?
조선에 도착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인의 생활을 목격하고 받은 첫인상은 한결같이 불결하며 문명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관습에 얽매어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지 길모어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 나라에 와 보니 가장 놀라왔던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는 것이다” (구한말 선교사들이 본 조선의 쌩얼),
http://blog.naver.com/alsn76/40203995505, 2014.01.05.21:31

“조선인들은 때가 타기 쉬운 흰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더러움이 훨씬 부각됐다.
아침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검정 옷이 되어 있으니 더 유별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작성일:2020-07-08 23:51:22 223.38.8.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