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16 / Gillis, Ansel W.

닉네임
김석천
등록일
2020-07-09 00:48:59
조회수
98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2_16_김석천.hwp (22528 Byte)
길리스 선교사 / Gillis, Ansel W (1913-1919)

I. 기본사항

1. 이름: Gillis, Ansel W / 길리스 / 한국명: 길리서 (吉理書)
2. 생몰연도: 1888-1964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3.11.22-1919.7.20
5. 연표
1913. 11. 22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
1919. 7. 20 사임하고 귀국
6. 가족사항
아버지: Gillis, Robert Stuart
어머니: Gillis, Sophia Evans
부인: Gillis, Harriet Whiting (1890.9.10.- ?)
딸 : Gillis, Elizabeth (1913.4.12.- 2008)
아들: Gillis, Robert Stuart (1915.8.13.- 2009)
장인: Whiting, Harry C.
장모: Whiting, Elizabeth Fuller


II. 선교사 소개 - 길리스 선교사 / Gillis, Ansel W (1913-1919)

1. 위대한 장인 (Whiting, Harry C, 한국명 황호리)
길리스(Gillis, Ansel W, 1913-1919)의 아내 Gillis, Harriet Whiting과 결혼하여 1913년부터 평양에서 활동한다. 그의 장인은 Whiting, Harry C(한국명 황호리, 1903-1945)로써 의사로써 명성을 떨쳤다. 그는 1865년부터 1945년까지 선교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는 신학과 의학을 전공하여 1903년 11월 24일 부인 (Elizabeth Fuller, 1869-1918)과 함께 내한했다. 먼저 평양선교부에 소속되어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바 평양장로교병원에서 1906년까지 근무했고, 1905년부터 황해도 재령을 왕래하면서 재령선교부 개설에 참여하였고 재령선교부의 개설과 함께 1906년 5월 18일 초대 재령선교사로 피임되어 이주하였다. 1905년부터 쿤스, 헌트 등과 함께 재령지역 선교활동의 선봉이 되었으며 1906년 재령에 주재하면서부터 2칸짜리 초가를 개수, 진료소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자를 진료했다. 1906년 9월에 선교본부에 보낸 화이팅선교사의 첫 보고서에 따르면 1,500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후 1907년 3월 15일에는 뉴욕 메니슨에버뉴장로교회로부터 3천 달러의 특별지원을 받아 새 진료소를 착공하여 1908년 1월 3일 완공되어 개원하였다. 화이팅은 재령병원의 책임자로 계속 활약하였으며 1908년 8월까지만 해도 6천명의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는 보고가 있다. 1911년 안식년을 맞아 일시 귀국하였을 뿐 1919년 재령병원을 사임할 때까지 눈부신 활동을 계속했고 그의 놀라운 의술은 원근각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평양병원 재직시에는 안질과 실명위기로 고생하던 한국교회의 지도자 길선주 목사의 눈 수술을 시술한 바 있다. 1918년 부인을 잃은 뒤 1920년에 한국선교사직을 사임, 1921년에 본국으로 돌아가 1945년 8월 1일 미국 아이오와주 파이어필드에서 별세하였다.

2. 그에 못지않은 장모 Whiting, Elizabeth Fuller
남편의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한편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나간다. 재령에서 부녀자를 위한 교육, 계몽활동에 일익을 감당했는데 자신의 사택을 “화이팅하우스”라 명명하여 부녀자들의 회집, 교육장소로 개방하였다. 특히 화요반(Thursday Class)이라는 정기적 교육과정을 운영하여 성서강좌와 생활개선을 위한 계몽등을 실시한 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18년 10월 10일 재령에서 4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화이팅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Harriet 와 결혼하다
화이팅 부부의 외동딸 하레이트(Harriet)는 부모님의 영향인가 역시 한국 선교사 길리스와 결혼하여 1913년부터 평양에서 활동한다. 그녀는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한국에 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장인이 1903-1906년에 활동한 평양으로 10년 뒤 길리스가 다시 와 시골지역의 교회사역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학교 부설의 산업부를 시작하는 일환으로써 베어드 박사를 통해 세워진 안나 데이비스 물품제작소에서 부서의 협력사역자로 섬기게 된다.

4. Gillis, Ansel Whiting
미국 아이오와주 마운트 플레전트 출신으로 평양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 에서 농업을 가르쳤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지원하는 데 관여했다.
1888년 3월 27일, 아이오와주 헨리 카운티 센터에서 Robert Stuart Gillis와 Sophia Erwin 어머니의 이름에 대해서 Sophia Erwin 과 Sophia Evans로 나뉜다.
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예일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1년에 그는 같은 장로교회 출신 Dr Harry C. Whiting의 딸 Hariette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이에는 1913년 4월 12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태어난 Elizabeth 'Betty'(2008년 사망)와 1915년 8월 13일 한국 Sensen에서 태어난 Robert Stuart(2009년 사망),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오고 Ansel W. Gillis 목사와 그의 아내는 애리조나 주 가나도(Ganado)로 가서 미국 원주민들과 함께 사역했다.
그는 1964년 4월 1일 캘리포니아 San Bernardino에서 사망했다.

5. 사임 이후의 삶
길리스는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19년 7월에 사임하고 귀국해서는 로스앤젤러스에 살고 있다가 이승만의 초청으로 1922년 10월 27일에 하와이에 왔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에 이승만이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영어를 배웠던 여성 의료선교사 화이팅의 사위였던 길리스를 하와이로 초청하여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의 일에 전념하겠다는 의욕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하와이의 이승만 반대파들은 있는 말 없는 말로 그를 비방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22년 11월에 준공된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예배당 헌당식에 교회가 일본영사를 초청하여 단상에 앉히고, 그로부터 기부금 50달러를 받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헌금을 거둘 때에 한인기독학원 교사로 미주에서 새로 부임해 온 길리스(Ansel W. Gillis: 한국명 吉理書) 내외가 50달러를 헌금하면서 이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무명씨의 헌금한 금액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일본총영사가 50달러를 기부했다고 소문이 나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썽이 퍼진 것이었다.
작성일:2020-07-09 00:48:59 1.230.57.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