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41/Bull, William Ford

닉네임
양성화
등록일
2020-07-14 13:56:34
조회수
120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1_41_양성화.hwp (862208 Byte)
Ⅰ. 기본 사항
1. 이름: Bull, William Ford 부위렴(夫緯廉)
2. 생몰연도: 1876년 2월 2일 ~ 1941년 12월 17일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정통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9 ~ 1941
5. 연표
1876. 2. 2.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 출생
1891. 햄든 시드니 대학 첫 축구팀 시작
1892-1893. 축구선수로 활동
1894. 축구 코치 활동
1899년 리치몬드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졸업
1899년 7. 목사 안수 받음
1899년 12.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군산에 부임
1902년 엘비(Alby, Libbie A)와 결혼
개인전도, 천막전도와 ‘복음부흥성가단’을 조직하여 복음증거 활동
전킨(W.M. Junkin)-전위렴 목사를 도와 군산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끔, 김제와 옥구 지방에 교회 설립
1910-1915.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담당
1915년 제5회 전라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
1919~1920년 전북노회 회계
1920년 전북지방에 교회진흥운동을 제창하여 부흥시킴,
군산 영명학교, 멜볼딘 여학교에 협력
1941년 귀국 후 사망
6. 가족사항 : Alby, Libbie A (부인)
1) 이름 : Alby, Libbie A (알비)
2) 생몰연도 : 1869 ~ 1957
3) 학 력 : 조사되지 않음
4) 경 력 : 1888년 멜볼딘 대학을 졸업
1888-1898년 10년간 교사로 활동
1899년 12. 5 군산선교부에 도착/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군산에서 활동
1902년 불(Bull, William Ford) 선교사와 결혼 후 선교동반자로서 활동
1941년 귀국
1957년 사망
5) 가족사항 : Bull, William Ford(남편)
7. 논저(설교) :부위렴1935), 해골의 부생(에스겔 37장1-14)

Ⅱ. 선교사 소개

1. 생애

William Ford Bull(부위렴)은 1876년 2월 2일에 미국의 버지니아주의 노포크에서 아버지 윌리암 불과 어머니 메리홀란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버지니아 주 햄든 시드니 대학에서(Hamden-Sydney College) 대학 간의 운동으로 학교의 첫 축구팀을 시작했다. 이 대학은 버지니아에 위치해 있는 사립대학이다. 그는 대학에서 1892년과 1893년에는 선수로 뛰었고 1894년에는 선수들의 코치로 선수들을 이끌었다. 햄든 시드니 대학을 졸업 한 후에 그는 1899년에 리치몬드 버지니아에 있는 정통 장로회의 유니온 신학교 졸업한 후에, 그 해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그는 남장로교회의 기독교 선교사로서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1901년 3월 1일, 그의 평생의 반려자인 엘리자베스(Elizabeth Alby)와 결혼하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1940년까지 사역을 하다가 본국으로 귀국해 노포크에서 명예로운 퇴직을 하고 1941년 12월 1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편 그의 부인이던 앨비(L. A. Alby) 선교사는 1899년 불 선교사와 같이 내한하여 군산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02년 불선교사와 결혼을 하였다. 그 후 불선교사를 도와 선교동반자로서 활동하였고, 남편이 귀국할 때 같이 귀국하였으며 바로 그해(1941년) 불선교사는 한국 선교 42년간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도 한국을 떠난 후 다시 와 보지 못하고 1952년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2. 한국에서의 선교사역(1899-1941:약 42년)

1) 교회 사역
부위렴은 군산 서부 지역인 군산 전역, 옥구, 김제, 익산, 부안의 동진, 읍내, 행한, 상서, 산내 등지에 그리고 충청남도 당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1920년대 전주의 담당 선교사는 최의덕, 이눌서, 마로덕, 강운림, 위인사였지만 군산 지역은 하위렴과 부위렴 선교사가 담당하였다. 그의 부인 앨비는 1898년 하위렴과 결혼하여 전주로 떠난 데이비스 양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1915년에는 전라노회 노회장으로 선임하였고 1919, 20년에는 전북노회 회계를 맡아 노회 발전을 위해서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에는 전북지역 교회진흥 운동을 제창하여 교회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충남지역에는 부위렴(Bull.william Ford)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개척된 교회들이 있다. 1903년 봄, 부위렴 선교사는 금강을 건너 서천을 방문하는 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곳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약 50여 명의 회중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은 전에 군산지부에서 설립한 만자산 교회 회원이었던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 가서 살며 복음을 전한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군산에서 치료 받다가 구암 교회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이 자신이 마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해 15-20명의 회중이 모였는데, 바로 이 교회가 충청도의 첫 번째 교회인 화산교회(현재는 기산교회)라 한다. 이처럼, 초창기 교인들은 들은 대로 나가서 증거 하는 전도 충만한 교인들이었다.
부위렴 선교사는 군산 선교부에만 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그의 명성이 알려졌으며 심지어 부산에 있는 일본인 교회에까지 알려졌다. 당시 전주 일본인교회에서 목회하던 도가라 못자가 부산 일본인 교회로 시무지를 옮기자 부위렴 선교사를 부산까지 초청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의 명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2) 교회 사역의 특이점
부위렴은 음악과 체육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도 능란하였고 전도설교도 유창하게 하였다. 부위렴 선교사는 군산 영명학교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익산, 김제, 일부, 부안 지방을 맡아 선교에 임하였는데 그의 전도스타일은 다른 선교사와는 많이 달랐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부흥복음 성가단이 조직되었는데 이 부흥 복음 성가단이 먼저 나가 나팔을 불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면 동네 아이들은 물론 부녀자, 장년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흥 복음성가단 뒤를 따라 나섰다. 일정한 장소에 천막을 쳐놓고 모여든 사람을 앉게 한 후 즉석에서 그 유창한 한국어로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이 되어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고자 하였다.
부흥사 출신인 그가 군산 영명학교 교장으로 부임할 때 가장 치중했던 것이 관현악단을 조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음악교사를 두고 학생들에게 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으며, 이 학생들은 부위렴 선교사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 성가를 불러 주었다. 이렇게 해서 훈련받은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개교회에서 가서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했고 이러한 일은 군산선교부 관할 하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때 총회 진흥부(현재 전도부에 해당)에서는 100만 구령운동을 전개한 일도 있었다. 전라북도에서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이 운동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부위렴 선교사는 이미 조직된 부흥복음 성가단을 베테랑급으로 교체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었던 현제명을 비롯해서 송기도, 양관해, 이우석, 나기용, 고석모 등이었다. 이 중 나기용은 전주 신흥학교 음악교사이기도 하였다. 물론 단장은 부위렴 선교사였다.
이렇게 부흥복음 성가단이 조직되면서 1918년 봄에 천막 하나를 싣고 부안 지방을 순회하게 되었는데 부안 읍내에 자리 잡은 이들 일행은 전도 집회 2시간 전부터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면서 열심히 알기를 연주했으며 가끔 이들은 한 목소리고 크게 외치기도 하였다.

3) 학교 사역
부위렴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도 1910-1915년까지 강의를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크게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학교 사역으로는 군산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군산 영명학교가 첫 시련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 후 일제는 적국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선교사를 강제 출국시켰다. 이 때 1940년 부위렴 선교사도 부인 엘비 선교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를 당한 군산 남녀 학교에 대한 충격 때문에 1941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899년 12월 5일 군산선교부에 도착하여 군산 멜본딘 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학교 시설의 확정을 위해 친히 모교를 방문하여 건축기금을 모금하는 등 학교발전에 기여하였다. 이 일로 멜본딘 대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로 군산여학교는 멜본딘 여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한편 이 학교의 신축은 그의 모 교회인 렉싱턴교회 여전도회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는데, 엘비 선교사의 피와 땀으로 설립된 멜본딘 여학교는 1937년 폐교와 함께 끝내 재건되지 못하였다.
다만 남학교였던 군산 영명학교는 1946년 8월8일 군산 노회에서 복교하기로 결의하고 그 위원으로 이창규, 계일승, 김윤식, 이재봉, 도희수, 심학윤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곧 선교회에 복교를 요청하였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노회에서 학교 건물과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고 1948년 9월 1일 새 학기를 맞아 복교하였다. 이 때 타요한 선교사가 교사로서 이 학교를 도왔다.
한편 군산노회에서는 통합측과 합동측의 교단 분열로 군산 영명학교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되자 그 학교건물과 대지를 고려합판 제지회사에 매각하고 거기에서 얻은 재원을 호남기독학원에 편입하여 군산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건물과 대지를 매입한 고려합판 제지회사에서는 군산 영명중 · 고등학교를 군사 제일 중·고등학교로 계명하였다. 그러나 그 학교는 끝내 일반인의 경영으로 찬송소리가 그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예산 명문 군산 멜본딘 여학교를 복교하기 위해 1965년 3월에 군산 개복교회 내에 있는 가건물에서 멜본딘 여자중 ·고등학교를 재건하고 그 전통을 이어갔지만 역시 얼마 후에 군산 개복교회와도 관계가 끊어져 사립학교가 되고 말았다. 만일 강제로 출국했던 부위렴 선교사와 앨비선교사가 해방 후에 군산에 왔으면 이 두 학교는 옛날 명문으로서 명맥이 유지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그 외 사역
부위렴은 군산 지방에 선교사가 거처할 만한 시설들이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이 일에 협력하여 주택을 완성하였다. 부위렴은 자신의 어학교사였던 오금성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풀어 미국에 건너가 그것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한국 의학계에 공헌할 수 있게 하였다.

3. 저술
설교 <해골의 부생(에스겔 37장1-14)>

내용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가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도 썩어지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살려 주시면 다시금 우리도 새 힘을 얻고 살아 날 수 있음에 대해서 부위렴 선교사가 한국어로 설교한 것이다.
작성일:2020-07-14 13:56:34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