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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oward, Meta(1858-1932, M)

닉네임
채진우
등록일
2017-06-07 21:19:26
조회수
2230
첨부파일
 M0258_2015222030_채진우.pdf (2118852 Byte)
메타 하워드 선교사 / Howard, Meta (1858-1932)


I. 기본사항
1. 이름
Howard, Meta / 메타 하워드
2. 생몰연도
1862. 06. 13. - 1930. 07. 28.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감리회
4. 한국선교기간
1887-1889. 2년 동안 활동
5. 연표
1862.06.13. 출생, 미국 알비온 칼훈
1876-1884. 알비온 대학교, 예술 학사
1884-1885. 알비온 대학교, 예술 석사
1885-1887.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사.
1887.10.29. 로드와일러와 함께 서울 정동 감리회 선교단 도착.
1887.10.31. 정동에 보구여관 개설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전담병원 시작
1889. 건강을 해쳐 귀국
1890. 선교사직 사임(후임: 로제타 셔우드 홀)
1893. 병원개설
(111 West Porter St. Michigan Albion Calhoun County United States)
1930.07.28. 사망, 미국 미시간주 칼라마주
6. 가족사항
미혼




II. 선교사 소개
1. 닥터 하워드 박사의 가족
Dr. Meta Howard(닥터 하워드 박사)는 Henry Howard(헨리 하워드)와 Adelin (milliman) Howard(아델린 하워드)의 사이에서 두 번째 자녀로 미국 미시간주 알비온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828년 영국 노퍽(Norfolk, England)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현재 미시간주 알비온인 셰리던(Sheridan)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헨리 하워드는 그의 부모(Samuel and Mary Howard)와 함께 뉴욕에서 살았으며, 닥터 하워드 박사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할아버지 사무엘 하워드가 죽었다. 하워드 박사의 아버지 헨리 하워드는 일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미시간주에 5센트를 가지고온 헨리 하워드는 존경스러우며 적극적인 사업을 통하여 미시간주 남부 약 60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게 된다. 알비온(Albion)에서 아델린 밀리만(Adeline Milliman)과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둔 부모가 된다.

하워드 박사에게는 네 명의 형제가 있었다. 1860년 7월 31일에 태어난 언니 마리(Mary b.)는 알비온에서 왈라스 베인(Wallace Bayne)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864년 2월 3일에 태어난 셋째 히바드(Hibbard b.)는 위스콘신 목재사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866년 12월 22일에 태어난 넷째 스텐튼(Stanton C. b.)은 농부였으며, 에바 발라드(Eva Ballard)와 결혼했다. 스텐튼과 에바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1873년 2월 23일에 태어난 다섯째 클라라(Clara L. b.)는 알비온의 정치인인 찰스 버넷(Charles Burnett)의 아내가 되었고, 그와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었다.

2. 닥터 하워드 박사는 미시간 주 알비온에서 의학을 전공한 최초의 여성 의사였다.
닥터 메타 하워드 박사는 좋은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고 고교과정의 대부분을 마친 후 1876년 가을 알비온 대학에 입학하여 1884년 예술 대학(BA in Arts of Bachelor of Arts)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1885년 석사학위(MA in Arts)를 받았다. 그리고 1885년 가을부터 시카고의 의과 대학(Women 's Medical College of Chicago)에 입학하여 파미터(E.L. Parmeter)박사의 지도하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188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하워드 박사는 선교훈련학교에서 몇 달 동안 훈련학교 의사로 보냈다. 동시에 그녀는 진료소의 여성부를 맡았는데, 이 모든 일은 의료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일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있었다.

3. 닥터 하워드 박사는 여성의료선교를 위해 파송 된 선교사였다.
스크랜턴(W.B. Scranton)이 운영하는 시병원(施病院)에서 남녀 환자 진료가 어렵게 되자 스크랜턴부인은 여성만을 위한 여성의료인을 본국에 요청하였다. 이에 닥터 하워드 박사는 미북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의료선교를 위해 파송되었다.

그녀의 입국 경로를 보게 되면 1887년 9월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여 파킨시티를 거쳐 요코하마로 건너가 21일 동안 관광과 쇼핑을 하였고, 며칠간의 관광을 하고나서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갔다. 그녀는 서울 정동 감리회 선교단에서 첫 번째 여학생이었고, 약 6개월 동안 한글을 배운다. 그런데 하워드 박사는 알파벳순과 음성학적으로 모국어로 이해할 수 있어서 6일 만에 한국어를 읽을 수 있었다.

1887년 10월 31일 정동에서 보구여관(保救女館)을 개설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전담병원이 시작되었다. 닥터 메타 하워드 박사는 시병원에서 여성을 진료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을 이화학당 교내에 설립하고 1888년 11월 이전하여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왕실에서는 이 여성병원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내렸고, ‘여자 환자의 집’,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구원해 주는 여성의 병원’이라고 하면서 그 활동을 격려하였다.

메타 하워드는 하루에 진료소에서 75~100명을 그리고 병원에서 7~8명을 치료하였는데, 처음 10달 동안 진료소에서 1127건을, 다음 해 같은 기간 동안 1423건을 치료하였다. 또한 그녀는 병원 외에도 이화학당 학생들의 보건도 전담하였으며, 나무가 너무 자라면 혼이 생겨 나중에는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나무를 과다하게 베어버린다거나 전통적인 조상 숭배 관습, 곳곳에 위치한 서낭당 등의 조선 사회의 미신에 젖은 한국 여성들을 깨우쳐 주기위해 헌신하였다. 이렇게 2년간 열심히 일한 하워드 박사는 각종 병의 노출과 과도했던 업무로 인하여 건강을 해쳐 결국 1889년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선교사직을 사임한다.

닥터 하워드의 뒤를 이어 로제타 셔우드 홀이 한국으로 출발한다. 하워드는 로제타 셔우드를 시카고에서 만나 로제타에게 한국의 의료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일러주기도 하였다. 상상 이상으로 환자들이 많아 몹시 바쁠 것이며,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차분하게 건강을 챙겨가며 사역에 임하면 반드시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여겨진다.

4. 귀국 후
닥터 하워드는 귀국 후 몇 년 동안은 전국 각지(네브래스카,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시간)를 돌며 강연하였고. 1893년에는 그녀의 집에 병원을 개설하였다.
1930년 07월 28일 미국 미시간주 칼라마주에서 닥터 하워드는 주님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현재 미국 미시간주 알비온 칼훈에 위치한 리버사이드 묘지 77블록 1로트 플롯에 매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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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를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작성일:2017-06-07 21:19:26 49.175.45.169